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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회 대분열 7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7

교황과 프랑크 왕국
Pope and Frankish Kingdom


목차

  1. 카롤링 왕조의 탄생
  2. 교황령의 성립
  3. 샤를마뉴의 대관식
  4. 참고 사이트 및 출처

카롤링 왕조의 탄생

이야기는 성상파괴논쟁이 테오도라(Θεοδώρα) 태후에 의해 종결되기 1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반도에 자리 잡았던 랑고바르드 왕국의 판도는 712년 집권한 유능한 왕 리우트프란트(Liutprand)에 의해 더욱 커지게 되는데 리우트프란트는 라벤나(Ravenna) 총독령을 침탈하였고 로마 공국(Ducatus Romanus)을 병합하려 하였다.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오 2세(Gregorius II: 715-731)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였던 레온 3세(Λεων Γ')의 성상파괴정책으로 인해 대립하던 상황이었으므로 비잔티움 제국은 이 괘씸한 교황을 혼내주기 위해 두 세력권 사이에 끼어 있는 랑고바르드 왕국이 교황을 괴롭히도록 은근히 충동질을 해댔다. 그러나 8세기부터 랑고바르드의 왕가가 아레이오스주의 기독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기 때문에 왕가는 가톨릭 세계의 상징적인 존재인 교황을 존중하였고, 양심상 리우트프란트는 도저히 로마를 공격하면서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공략할 수가 없었다. 교황도 이를 잘 알았기에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내세워 리우트프란트의 로마 침략 의도를 완전히 꺾어놓았다.

물론 교황이 이 난국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타개하기 위해 외부 세력과 연대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교황이 주목한 외부 세력은 바로 481년 클로비스 1세(Clovis I)에 의해 세워진 가톨릭 국가인 프랑크 왕국(Regnum Francorum)이었다. 그레고리오 2세를 이어 교황좌에 오른 그레고리오 3세(Gregorius III: 731-741)는 프랑크 왕국에 사절단을 보내 위기에 빠진 교황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은 예상과는 달리 교황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의 메로뱅 왕조(Merovins)는 잠시 단절되어 있었는데 공석인 왕좌를 대신하여 정무를 총괄하던 사람이 바로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l)이었다. 그의 직책은 궁재(宮宰, maior doumus)였는데 직역하자면 궁정장관, 궁내대신 정도가 되겠다. 그는 737년부터 741년까지 프랑크 왕국을 사실상 통치하였는데 말년까지 왕국의 불안정한 상황을 정리하는데 엄청난 공을 세웠다. 특히 샤를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바로 당시 기독교 세계보다 더 번성하고 강대하게 힘을 뻗치고 있었던 이슬람 제국이었다. 디마슈크(دمشق)에1 수도를 정하고 세습 왕조를 확립한 우마이야 왕조(بنو أمية)의 군대는 711년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지금의 프랑스 지방으로 쳐들어왔다. 프랑크 왕국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는 무슬림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마침내 732년 투르-푸아티에(Tours-Poitiers)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이슬람 제국의 유럽 정복 야욕을 분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때 샤를은 무슬림들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자 배후의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랑고바르드 왕국과 우호,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국제관계 속에서 교황을 구원하기 위해 랑고바르드 왕국에 칼을 들이민다면 우마이야 왕조와 랑고바르드 왕국으로부터 협공을 당해 프랑크 왕국이 대단히 큰 곤경에 빠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처한 위기 상황을 간파한 사람들에 의해 크고 작은 반란이 이어졌기 때문에 샤를은 교황이 보내 온 진귀한 선물에도 불구하고 교황을 구원하기 위한 군대를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투르-푸아티에 전투를 나타낸 그림. 가운데 거대한 도끼망치를 든 자가 샤를 마르텔. 2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750년경부터 급변하기 시작했다. 먼저 랑고바르드 왕국의 실력자가 바뀌었다. 749년 리우트프란트의 아들 아이스툴프(Aistulf)가 롬바르드 왕국의 실권을 장악하였는데, 아이스툴프는 신앙심보다 왕국의 번영에 무게를 둔 듯했다. 아이스툴프는 군사를 일으켜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총독령의 중심이었던 라벤나를 삼킨 것도 모자라 로마로 물밀듯이 치고 들어와 인두세를 랑고바르드 왕국에 납부하라며 압력을 행사했다. 이제는 교황을 굴복시켜 끝장을 볼 심산이었다.

이슬람 제국의 상황은 더 재미있게 변했다. 우마이야 왕조는 잇따른 대외 팽창의 실패 및 내부 분열로 인해 결국 750년 무너지게 되어 새로이 압바스 왕조(لعبّاسيّون)가 들어섰다. 이때 우마이야 왕조의 일족 중 하나였던 아브드 알 라흐만(عبد الرحمن الداخل)은 이베리아 반도로 피신하여 코르도바(Cordova)에 수도를 정하고 스스로를 칼리파(خليفة)3로 칭하였다. 이것이 후(後)우마이야 왕조였다. 왕조 교체기는 일반적으로 혼란의 시기였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의 대외적 상황은 안정되었고, 일단 피레네 산맥 너머 무슬림들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변화는 프랑크 왕국에서 일어났다. 743년에 즉위한 실데릭 3세(Childeric III)는 꼭두각시 왕이었고, 왕국의 전권은 당시 궁재였던 샤를 마르텔의 둘째 아들, 페팽 3세(Pepin III)의 것이었다. 원래 샤를의 궁재 직위는 두 아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졌지만, 첫째 아들이었던 카를로만(Carloman)은 신심이 워낙 깊었던 나머지 수도원으로 출가하면서 궁재 직위를 그의 아들에게 주었고, 이를 동생이었던 페팽이 빼앗았다. 왕국의 유일한 궁재가 된 페팽의 야심은 대단했다. 왕위가 비었음에도 죽을 때까지 궁재로 남아 왕좌를 넘보지 않았던 아버지 샤를과는 달리 페펭은 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접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때마침 대내외적인 상황이 모두 안정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의 계획으로 실천으로 옮길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페팽은 그레고리오 3세를 이어 교황이 된 자카리아(Zacharias: 741-752)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써서 보냈다.

지금 프랑크의 왕위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

이 편지를 받은 자카리아는 반색을 하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전한다.

왕가의 권위를 가지지 못한 자보다 실권을 가진 자가 왕으로 불리는 것이 더 옳을 듯 합니다.
키가 작았던 모양인지 페팽 3세의 별명은 단신(le bref)이었다. 4

이것은 교황의 권위를 등에 업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실력자와 그 실력자로부터 군사적인 비호를 받을 필요성을 느낀 교황 모두를 승리자로 만드는 이른바 윈-윈 전략이었다. 페팽은 자카리아의 답신을 계기로 왕조교체를 향한 수순을 밟기 시작한다. 결국 실데릭 3세는 폐위되어 수도원에 유폐되었고 페팽은 751년 기어이 왕위에 올라 카롤링 왕조(Carolings)를 연다. 이 때 스와송(Soissons)에서 열린 페팽의 대관식에 마인츠(Mainz)의 대주교였던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5가 참석하여 축성하였다. 이 사건은 가톨릭 세계가 새로운 세력인 프랑크 왕국과 더욱 긴밀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화된 비잔티움 제국과 결별하고 서유럽의 강국에서 독자적인 세력과 연대하여 독립하겠다는 교황의 의지가 표현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페팽의 즉위 이후에도 랑고바르드 왕국의 공세가 더욱 심해지자 자카리아를 이어 교황이 된 스테파노 2세(Stephanus II: 752-757)는 아이스툴프와 협상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다. 결국 스테파노 2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6 프랑크 왕국을 방문했으며 거기서 패팽과 만났는데, 여기서 페팽은 롬바르드 왕국에 의해 탈취된 영토를 교황에게 돌려주겠노라고 서약한다. 든든한 아군을 얻은 스테파노 2세는 무척 기뻐했고, 생드니(Saint-Denis) 수도원에서 페팽을 축성하는 전례를 베풂으로써 그가 프랑크 왕국의 왕임을 천명하였다. 비록 수 년 전에 보니파티우스가 페팽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가톨릭 세계의 인정을 받은 왕임을 보인바 있지만, 페팽은 끊임없이 그의 왕좌를 마땅하게 여기지 않는 다른 세력들의 도전을 받아왔다. 그러나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직접 프랑크 왕국까지 찾아와 그를 축성한 일로 인해 페팽의 카롤링 왕조는 그 정통성을 온전히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교황과 페팽이 만나는 자리에 소집된 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은 페팽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호응하여 페팽은 군대를 이끌고 교황을 구원하기 위해 곧바로 이탈리아 반도로 쳐들어갔다. 서유럽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무슬림을 쳐부순 프랑크 왕국의 군대는 아이스툴프의 랑고바르드군을 삽시간에 무너뜨렸으며 라벤나와 펜타폴리스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을 구원하는데 성공한다. 페팽은 아이스툴프에 압력을 행사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이 더 이상 교황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고 군사를 물린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아이스툴프는 마음을 고쳐 먹고 랑고바르드군을 전부 모아 로마로 진격하여 도시를 포위하고 섬멸할 태세를 갖추었다. 756년에 교황 스테파노 2세는 사도 베드로의 이름으로 프랑크 왕국에 구원 요청 서신을 보냈으며, 페팽은 다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군한다. 이번에도 아이스툴프는 페팽에게 패퇴해 결국 로마로부터 퇴각할 수밖에 없었으며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을 프랑크 왕국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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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령의 성립

그런데 이 때 서유럽의 상황을 강건너 불구경 하듯 가만히 지켜만 보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Κωνσταντίνος Ε')가 프랑크 왕국이 점유한 이탈리아 반도 내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이탈리아 반도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임명한 총독의 관할 영토였기에 랑고바르드족에 의해 불법적으로 점거되었던 땅들은 원래 주인인 비잔티움 제국의 품으로 돌아와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페팽은 황제의 요구를 묵살하고 그가 교황과 맺었던 서약대로 랑고바르드 왕국으로부터 얻은 땅, 곧 라벤나 총독령과 부속 도시들을 모두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기증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페팽의 기증(Donation of Pepin)이다. 비록 4세기경부터 교황은 로마 지역을 획득하여 세속 군주와 같은 권력을 행사해오긴 했지만 페팽의 기증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황령(敎皇領, Status Pontificius)이 시작되었다. 교황 연대표(Liber Pontificalis)는 이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비잔티움) 황제의 사절은 황제가 보낸 많은 선물들을 보여주며 페팽이 황제의 권위에 복종할 것과 라벤나 및 라벤나 총독령에 속하는 도시들을 반납할 것을 빌었다. 그러나 사절은 하느님께 신실하고 성 베드로를 사랑하는 왕의 굳센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었다. 왕은 이 도시들을 성 베드로의 권위와 사도좌의 교황이 다스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치리에서 떨어뜨려놓을 수 없다고 하였다. 왕은 맹세하기를 자신이 전쟁에 뛰어든 것은 오직 성 베드로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한 마음에서였지 인간적인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하였고, 따라서 성 베드로에게 바쳐진 것들을 훔쳐 자신의 부를 쌓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페팽의 기증을 그린 그림. 스테파노 2세가 교황령에 해당하는 도시들의 열쇠를 받고 있다. 이 사건 이후로 프랑크 교황 시대(Frankish papacy)가 시작되었다. 7

페팽은 증여 문서를 만들어 바쳤고, 수도사이자 사제인 풀라드(Fulrad)를 라벤나로 보내어 각 도시들의 열쇠를 가져오게 하였다. 풀라드는 이 열쇠들을 모두 로마에 있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증여 문서와 함께 올려놓는 예식을 통해 이 모든 도시들이 교황의 권위 하에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였다. 이제 교황은 단순한 영적인 권력을 가진 정신적 수장이 아니고 실제로 영토가 있는 세속 국가의 수장 역할도 겸하게 되었다. 페팽이 라벤나와 부속 도시들을 해방시킨 754년을 교황령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에 재위 중이었던 스테파노 2세가 최초의 교황령 군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교황령의 성립은 라벤나 총독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 및 로마 관구에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행사하려던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 상실을 의미했다. 로마가 비잔티움 제국과 결별하고 새로운 파트너인 프랑크 왕국을 맞이했던 것이다. 파트너를 갈아치우니 문화적으로나 정치, 종교적으로나 거리가 멀어진 비잔티움 제국의 간섭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어 교황은 자신이 다스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독립성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서유럽에서 프랑크 왕의 상전 노릇을 하며 그 권위를 어느 때보다 드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교권 위에서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려 들었기 때문에 교황은 그와 잦은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지만 프랑크 왕국의 왕은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최상으로 인정한 것도 모자라 그에게 세속적인 권력과 영토마저 헌납하면서까지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누구라도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택하기 마련인데 교황이라고 별다를 게 있겠는가. 교황으로서는 자신을 인정하며 높여주는 프랑크 왕국과 제휴하길 희망했을 것이다.

교황령은 통일 운동(Risorgimento)에 의해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는 1870년까지 존속하였다. 그리고 1929년에야 비로소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바티칸(Vatican) 시국이 탄생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8

이러한 연합은 페팽을 이어 왕위를 차지한 샤를마뉴(Charlesmagne) 때 정점을 찍게 된다. 아이스툴프 사후 랑고바르드 왕국의 패권을 차지한 사람은 데시데리우스(Desiderius)인데, 그는 교황 하드리아노 1세(Adrianus I: 772-795)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견제하는 스폴레토(Spoleto)와 베네벤토(Benevento) 공작들을 지원한다는 것을 알고 크게 분개하였다. 결국 데시데리우스는 군사를 이끌고 772년 로마를 침범하게 되는데 교황의 원조 요청을 받은 샤를마뉴는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랑고바르드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774년에 데시데리우스가 항복함에 따라 랑고바르드족의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고, 샤를마뉴는 롬바르드 왕국의 수도인 파비아(Pavia)에 입성하여 랑고바르드 왕위를 겸하게 된다. 그리고 샤를마뉴는 781년 회칙을 통해 교황령을 이전보다 더 넓혀 베네벤토 공국의 일부, 토스카나와 코르시카, 롬바르드 지역까지 포함시키는 광대한 지역을 하드리아노 1세에게 헌납하였고 교황의 통치를 보다 공고히 정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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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의 대관식

한편 교황 하드리아노 1세의 재위 중에 1차 성상파괴논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 비잔티움 정권을 잡고 있던 이리니(Ειρήνη) 황후와 가신들은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하드리아노 1세는 모처럼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자신의 수위권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 결과 동서교회는 모처럼만의 협력 상태를 맞이할 수 있었다. 또한 교황은 서방의 든든한 지원군(프랑크 왕국)과 동방의 충실한 정권(비잔티움 제국) 사이에서 안전한 균형을 획득했으며 그 가운데서 로마 교회의 권위를 회복했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은 하드리아노 1세의 선종 이후 교황좌에 오른 레오 3세(Leo III: 795-816) 때 깨지고 만다. 레오 3세는 평범한 가문 출신으로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던 하드리아노 1세와는 출신 성분이 완전히 달랐던지라 교황으로 임명될 당시 로마의 귀족층으로부터 많은 반발을 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교회 관료층과 로마 귀족들로부터 불륜과 위증 혐의로 고소를 당했고, 심지어 799년에는 테러를 당해 스폴레토 공국에 피신하여 은거해야 했다. 자신을 둘러싼 위협을 일찌감치 느껴서였을까, 레오 3세는 즉위 직후 샤를마뉴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즉위를 알렸고9 거기에 사도 베드로 무덤의 열쇠를 딸려 보냈다. 아마도 레오 3세는 자신의 입지를 강건하게 해 줄 이는 샤를마뉴와 프랑크 왕국밖에 없었다고 굳게 믿었던 것 같다. 샤를마뉴는 이 서신에 대한 답신과 증표로서 원정을 마치고 획득한 상당한 양의 전리품을 교황에게 헌납하기도 하였다.

교황은 파데르보른(Paderborn)까지 몸소 행차해서 거기서 샤를마뉴와 회담을 했고, 샤를마뉴는 레오 3세를 로마까지 안전하게 모셔왔다. 샤를마뉴의 권위 앞에서 레오 3세의 정적들이 꼼짝 못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레오 3세는 교황좌를 되찾게 되었고, 그의 적대 세력들은 샤를마뉴에게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교황의 호소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되는 형벌을 받는 수준에서 그치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바로 추방령이 떨어지기 이틀 전, 곧 서기 800년의 크리스마스 때에 벌어졌다.

샤를마뉴는 로마에 입성할 때 그의 아들과 함께 왔는데, 그는 성탄절 미사에 그의 아들이 교황으로부터 직접 축복받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샤를마뉴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마칠 때에 레오 3세가 황제의 관을 그의 머리위에 씌워주는 것이었다. 성 베드로 성당은 이 깜짝 대관식으로 인해 심히 들썩였으며 로마에 약 350년만에 황제, 곧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세워진 것에 모든 로마 시민들이 환호했다. 레오 3세는 고대 황제 대관식에서 보였던 신하의 예를 샤를마뉴에게 보였다. 이는 로마 가톨릭 세계가 이제는 황제권마저 프랑크 왕국에 수여함으로서 완전히 동방의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선포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역사학자들은 800년의 이 대관식이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기초를 놓은 사건이라고 본다. 비잔티움 제국은 797년부터 이리니 황후가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Κωνσταντίνος ΣΤ΄)를 죽이고 스스로 여황제가 되었으므로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를 찬탈로 여겼지만 샤를마뉴와 레오 3세를 벌하러 원정을 갈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또한 여자 황제라는 점이 정통성 면에서 대내외적으로 도전을 받았기 때문에 교황 레오 3세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수할 여력이 없었다. 기분이 언짢아도 샤를마뉴의 세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비잔티움 제국은 결국 샤를마뉴의 황제 자리를 816년에야 인정했으며 다만 '로마인의 황제'가 아닌 단지 '황제'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샤를마뉴의 대관식을 그린 벽화. 샤를마뉴는 교황으로부터 제관을 받았지만, 샤를마뉴의 아들은 황제로 임명될 때 아버지로부터 제관을 직접 받았다. 10

이렇듯 격동의 8세기가 지나가면서 유럽 세계는 새롭게 재편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동부의 이슬람 제국, 북부의 불가르족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고 내부적으로는 성상파괴논쟁에 휩싸여 점차 세력이 약화돠었다. 이슬람 제국은 아스투리아스(Asturias) 지역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를 집어삼켰으나 프랑크 왕국에 결정적으로 패했다.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 왕조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하고 이탈리아 일부 지역과 현재의 프랑스, 독일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그 판도를 넓혔다. 그리고 8세기 말부터 이탈리아 반도 허리에는 교회의 수장이 영토를 갖고 실질적인 세속 군주의 역할을 겸하기 시작했다. 이 균형은 8세기의 마지막 해인 800년에 프랑크 왕국에게 제관이 수여됨으로써 기울게 되었고, 이는 로마와 라벤나를 통하여 겨우 유지되던 동서방 세계의 결속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전의 동서교회의 분열은 신학적, 교의적 논쟁의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이제 교황은 군주였으며 서방 세계의 우두머리였다. 때문에 정치, 군사, 외교적인 문제가 동서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와 결합되면서 타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9세기에 동서교회는 파멸적인 분열 상태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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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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