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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2-3

Religion 2-3

동서교회 대분열 3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3

단성론과 아카키오스 분열
Monophysitism and Acacian Schism


목차

  1. 동방교회의 단성론 분쟁
  2. 아카키오스의 활약
  3. 헤노티콘 반포와 아카키오스 분열
  4. 재빨리 회복되지 못한 분열
  5. 아카키오스 분열의 종식
  6. 참고 사이트 및 출처

동방교회의 단성론 분쟁

교황 레오 1세가 교황의 권위를 드높이고 있던 때에 동방 교회는 혼란의 시기에 들어서게 된다. 이야기는 다시 451년 칼케돈에서 열린 세계 공의회로 돌아간다.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단성론 단죄에 관한 세밀한 법령을 공포하고 이에 따른 신조를 작성하여 정통 신앙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나, 워낙 어려운 주제였던만큼 모두가 공감 가능하고 완전한 이해를 보증할 수 있는 참신한 결론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다. 다음은 칼케돈 공의회가 추인한 신조이다.

교부들을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일치 안에서 한 분이시며 같은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데, 그는 신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동시에 인성에 있어서도 완전한 분이시고, 참으로 하느님이심과 동시에 참으로 인간이시며, 또한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시며,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같은 본질을 지니고 계시며, 그의 인격에 있어서는 우리와 같은 본질을 지니고 계시는데, 죄로부터는 떨어져 있으나 모든 측면에서 우리와 같으시고, 그의 신성에 관해서는 역사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셨고, 그러나 그의 인간적 출생에 관해서는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한 분이시고 동일한 그리스도, 성자, 주님,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는 두 가지 본성(nature)으로 인식되는바, 혼돈 없이, 변화 없이, 구분 없이, 분리 없이 계신 분이며, 성질들의 차이는 결합으로 인해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 오히려 각 성질의 특징들은 보존되고, 한 인격과 생존을 형성하기 위하여 함께 오며, 두 인격으로 분리되거나 나눠짐 없이 한 분 같은 성자요 독생자이시며, 말씀,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심지어 가장 최초의 예언자도 그에 관하여 말씀하셨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교부들의 신조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1

신조에서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느님이자 참 인간이고 성부와 같은 본질을 가진 신성과 우리와 같은 본질을 가진 인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양성론을 의미하며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분리된 채 존재한다는 네스토리오스의 이성론과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어 오직 신성만이 존재한다는 에우티케스의 단성론을 완전하게 배격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성질이 함께 있다는 것은 소위 부정신학(不定神學, apophaticism)적인 표현들로 기술되어 있는데, 즉 혼돈도 없고 변화도 없고 구분도 없고 분리도 없이 그러하다고 기술할 뿐 그래서 어떻게 함께 존재한다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동방 교회의 그리스 사람들은 이와 같은 모호한 기술에 대해서 저마다의 생각을 펼쳐나가며 어떻게 명증하는 것이 옳은지 치열하게 탐구하였는데, 뚜렷한 해석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단성론에 다시 이끌리게 되었고, 결국 동방 교회는 칼케돈에서 이미 정한 정통 교리와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난 단성론이 다시 쌈박질을 하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동방 교회의 혼란상은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의 저술을 통해 2세기 때부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결합을 별 논쟁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던 서방 교회의 모습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이 때문에 동방 교회는 칼케돈 공의회를 거치면서 크고 작은 분열을 맞이하였다.2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분열상이 바로 단성론자들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알렉산드레이아에서 나타났다. 알렉산드레이아가 있던 이집트 지역은 본래 유럽인 그리스 및 로마와는 상이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알렉산드레이아는 초기 교회 역사상 로마보다도 더 중요했던 기독교 중심지였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자부심 또한 상당했다. 따라서 총대주교 디오스코로스 1세(Διόσκο̣ρος Α΄: 444-451)를 파문시켜 알렉산드레이아의 콧대를 눌러버린 칼케돈 공의회와 또 이를 후원한 황제 및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가 그리스인 프로테리오스를 디오스코로스 1세의 후임 총대주교로서 파견하자 그리스인들에 대한 알렉산드레이아인들의 적개심은 더욱 커지게 되었고, 결국 단성론을 지지하는 많은 이집트인들은 티모테오스 2세(Τιμόθεος Β΄, 457-460;475-477)3를 대립 총대주교로 옹립하여 칼케돈 신앙 고백을 옹호한 사람들에 대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촉발된 알렉산드레이아의 분열은 점점 격해지더니 결국 티모테오스가 대립 총대주교로 선출된 지 12일이 지나 정식 총대주교였던 프로테리오스가 성 금요일에 세례소에서 살해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시체는 길바닥에 질질 끌린 채 원형경기장에서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비잔티움 황제였던 레온 1세(Λέων Α΄)는 이 끔찍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였고, 제국의 여러 주교들의 의견을 구한 끝에 대립 총대주교로 옹립되었던 티모테오스를 추방하고 새로운 알렉산드레이아 총대주교로서 (같은 티모테오스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칼케돈 신앙 고백 옹호론자였던) 티모테오스 3세(Τιμόθεος Γ΄: 460-475, 477-481)4를 세웠다. 하지만 티모테오스 3세는 너무 극단에 치우치면 혼란이 가중될 것을 우려해 단성론자를 포용하는 종교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중용 정책은 칼케돈 신앙을 따르는 사람과 단성론자 양쪽 진영에서 모두 비난을 받았고, 특히 교황 레오 1세는 티모테오스 3세가 성당 두폭 제단화(diptych)5에 단죄받은 바 있는 디오스코로스의 이름을 다시 올린 것에 대해 격렬히 노를 발했다. 앞서 살펴보았듯 레오 1세는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좌가 로마 교황좌의 아래에 놓여있다고 믿었기에 로마 교황이 칼케돈에서 단죄한 디오스코로스를 알렉산드레이아 총대주교가 제멋대로 감히 복귀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티모테오스 3세는 로마의 압력에 못 이겨 디오스코로스의 이름을 이면화에서 다시 삭제하기에 이른다.

프로테리오스는 단성론 논쟁에 맞서 정교회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주교로 기억된다. 6

알렉산드레이아에 이어 안티오케이아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안티오케이아 총대주교였던 페트로스 2세(Πέτρος Β΄: 469, 470-471, 476, 485-488)7는 삼위일체를 찬양하는 삼성송(三聖頌, trisagion)을 부를 때 “거룩한 하느님이시여, 거룩하고 전능하신 이여, 거룩하고 영원하신 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전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여”를 삽입하도록 지시했다. 사실 성자(聖子)는 말씀이 육화된 하나님의 한 위격이니 성부(聖父) 하느님이 못박혔다고 생각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단성론을 열렬히 지지하는 페트로스 2세의 태도를 생각하면 분명히 이는 칼케돈 신앙 고백에 반대하는 일종의 시위였던 셈이다. 결국 페트로스 2세는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소환되어 칼케돈 옹호론자들의 집중 견제를 받게 되었다.

이 무렵 황제 레온 1세가 죽고 제논(Ζήνων)이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이사우리아(Ισαυρία) 지역의 이민족 출신으로, 레온 1세가 사위로 삼아 후임으로 미리 점찍어 두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작 제논이 황제가 되자 이민족 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력이 반발하게 되었고, 결국 레온 1세의 처남인 바실리스코스(Βασιλίσκος)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위를 찬탈하게 되었다.

황제 제논의 얼굴이 새겨진 금화. 제논은 5세기 그리스도론 논쟁의 중심에 서 있던 황제이다. 8

그러나 바실리스코스의 쿠데타는 명분이 약했고, 그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구실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던 그가 주목했던 것이 바로 단성론 문제였다. 그는 동방 교회 안에 단성론자들의 세력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또 이들이 전임 황제의 종교 정책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이 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면 자신에게 매우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바실리스코스는 알렉산드레이아와 안티오케이아의 총대주교좌에서 쫓겨난 단성론자 티모테오스 2세와 페트로스 2세를 복귀시킬 요량으로 이들을 콘스탄티누폴리스 황궁에 초청하였다. 이에 의기양양해진 티모테오스 2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나귀를 타고 들어갔던 것처럼 나귀를 타고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입성했다고 한다. 티모테오스 2세와 페트로스 2세는 바실리스코스가 반포할 칙서의 초안을 작성했고 이것은 476년에 반포되었는데 그 내용인즉, 교황 레오 1세의 글과 더불어 칼케돈 신앙 고백과 관련된 것을 모두 이단적인 것으로 단죄하며, 이 칙서의 명을 반대하는 성직자와 수도사 및 평신도는 모두 교회와 제국에서 쫓겨나게 된다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단성론자 세력들은 강도 공의회로 불린 제2차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승리했다가 칼케돈 공의회에서 대패했지만, 바실리코스의 칙서를 통해 다시 부활한 것처럼 보였다. 이 칙서가 워낙 강경했기 때문에 동방 교회 500여명의 주교들은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여기에 서명했다. 티모테오스 2세는 칙서가 반포되기 전 자신의 소망대로 에페소스에서 또다른 공의회를 개최하였고 거기서 내린 결의대로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로 복귀하였다. 더불어 페트로스 2세로 하여금 다시 안티오케이아로 돌아가 총대주교좌를 차지하게끔 하였다.

그런데 승리에 너무 도취된 티모테오스 2세가 너무 앞서나간 듯했다. 이 공의회에서 동방 교회 주교들은 에페소스를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 지역을 총대주교대리구(總大主敎代理區, exarchate)로 독립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는 본래 그 지역을 관할하던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정이었다. 콘스탄티누폴리스를 꾸준히 경계하던 알렉산드레이아 성직자들의 계책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런 이유로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아카키오스(Ακάκιος: 472-489)는 대표적인 단성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칙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아카키오스가 티모테오스 2세의 뜻을 거부하게 된 다른 이유도 있었다. 칼케돈 공의회 법령 28조에는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에 로마 교회에 주었던 특권을 동등하게 부여하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만일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가 바실리스코스의 칙서에 서명함으로써 칼케돈 공의회 내용을 부정해 버리면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의 지위를 스스로 격하시키는 꼴이었다. 이미 티모테오스 2세와 페트로스 2세의 목적이 단성론을 위시한 신학적 논쟁을 매듭짓는 것뿐 아니라 콘스탄티누폴리스를 누르고 예전의 알렉산드레이아의 위상을 되찾으려 했다는 것이었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났으니, 여기서부터는 아카키오스가 동조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아카키오스는 칙서에 서명하지 않은 죄로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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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키오스의 활약

쫓겨난 아카키오스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에 복위하고자 먼저 당시 예언자적인 명성이 제국 전체에 자자했던 다니엘(Δανιήλ)을 움직였다. 그는 이전 황제였던 레온 1세와 아카키오스의 전임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였던 겐나디오스(Γεννάδιος: 458-471)로부터 강한 신뢰를 받은 사람이었고, 또한 칼케돈 신앙을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니엘은 일반적인 성직자나 수도사와는 조금 달랐다. 다니엘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높은 탑 위에서 먹고 마시며 기도하고 설교했던 소위 주상고행자(柱上苦行者, stylite)라고 불리는 고행 금욕주의자 중 한 살마이었다. 그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 등대와 같은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서 33년동안 살며 등대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온 힘을 쏟았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아카키오스의 설득에 따라 기둥에서 내려와 콘스탄티누폴리스 황궁에 들어온 것이다! 살아있는 성인 취급을 받는 다니엘의 등장은 바실리스코스를 비롯한 단성론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등탑자라고도 하는 주상 고행자들은 도시 외곽에 거대한 탑을 쌓고 그 위에 올라가 금식하며 기도와 묵상에 힘쓴 고행자들이었다. 성 시메온이 주상 고행자의 아버지격 되는 매우 유명한 주상 고행자였다.9

결국 바실리스코스는 수정된 칙서를 반포하여 칼케돈 신앙 고백과 반대되는 주장을 펼쳤던 네스토리오스와 에우티케스를 단죄하였고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의 지위를 재확인시켜 주었으며, 새로운 공의회를 소집하려는 모든 행위를 금했다.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심플리치오(Simplicius: 468-483)는 편지를 보내 이 혁혁한 공로를 세운 아카키오스를 치하하였고, 이제는 바실리스코스와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대수도원장들이 합심하여 이단성 짙은 티모테오스 2세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카키오스의 노력은 제논이 바실리스코스에게 빼앗겼던 제위를 다시 찾게 되면서 진정한 결실을 얻게 된다. 제논이 황제가 되어 바실리스코스의 모든 행위를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리자 동방의 주교들이 다시 일제히 바실리스코스의 칙서에 서명했던 것을 취소하였고, 아카키오스를 유효한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로 인정하며 상통(相通)하게 되었다. 이제 티모테오스 2세는 칼케돈 신앙 고백을 박해한 원흉이 되어 동서 교회 양 진영으로부터 공공의 적 취급을 받게 되었고, 제논이 황제로서 콘스탄티누폴리스 황궁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죽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단성론자인 그가 죽었으니 일전에 그로 인해 쫓겨났던 티모테오스 3세가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좌에 복귀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런데 교황 심플리치오는 콘스탄티누폴리스로부터 날아온 한 서한에 경악하여 분을 발한다. 내용인즉, 티모테오스 2세의 후임으로 페트로스 3세(Πέτρος Γ΄: 477, 482-490) 가 선출되었다는 것이다. 페트로스 3세는 단성론자였는데,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가 물밑에서 알렉산드레이아 총대주교로 티모테오스 3세를 은근히 밀고 있던 로마 교회를 물 먹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안티오케이아 총대주교 선출 과정 역시 교황을 격노케 하였다. 페트로스 2세가 황제 제논에게 축출당하자 단성론자들은 같은 단성론자인 요안네스 2세(Ιωάννης Β΄: 476-477)10를 후임 총대주교 후보로 밀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황제는 스테파노스(Στέφανος)를 안티오케이아 총대주교로 세우려 하였으나 그는 임명을 받기도 전에 단성론자들의 테러로 인해 살해되고 말았다. 그러자 아카키오스는 동명이인의 스테파노스를 총대주교로 임명시키려고 안티오케이아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교황의 심기를 자극하였다. 로마 교회는 다른 주교좌의 일에 끼어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수위권을 가진 교황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의 이러한 행위를 월권이라고 생각하여 크게 분노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카키오스는 교황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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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노티콘 반포와 아카키오스 분열

한편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가 된 페트로스 3세는 자신의 등극을 둘러싸고 주변에서 불협화음이 이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단성론을 반대한느 사람들의 압력으로 결국 황제 제논이 자신을 폐위시킬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정말이지 제논은 페트로스 3세를 폐위시키고 티모테오스 3세를 알렉산드레이아의 적법한 총대주교로 임명하였으며, 황제의 용단에 교황 심플리치오가 강한 지지를 나타내었다. 새로 임명된 티모테오스 3세는 과거의 중용 정책을 폐기하고 단성론의 중심에 선 전임 총대주교 페트로스 3세를 처단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페트로스 3세는 도망가는 데 성공하여 단성론자들의 수도원에서 은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총대주교좌에 다시 오른 티모테오스 3세는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명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가 여전히 칼케돈파와 단성론자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전쟁터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사후 알렉산드리아가 다시 단성론자의 수중에 빠지는 것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수도사였던 요안네스 탈라이아스(Ιωάννης Ταλαϊάς)를 콘스탄티누폴리스로 파견하여 황제 제논을 만나게 하였고, 자신의 후임으로서 요안네스를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딸려 보낸다. 제논은 요안네스에게 큰 호의를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후임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로 요안네스가 임명되어 티모테오스 3세의 뜻대로 단성론 논쟁이 가라앉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정치 문제가 개입되고 만다. 제논 황제가 바실리스코스로부터 제위를 되찾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일로스(Ιλλός)가 황제와 점차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다.11 그런데 요안네스가 일로스와 가까운 관계라는 의심이 콘스탄티누폴리스에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아마도 일로스가 칼케돈 신앙 고백을 따르는 정통 신앙 옹호론자였기 때문에 요안네스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라는 악성 루머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 아카키오스는 훗날 요안네스가 자신과 황제의 앞길을 험난하게 할 정치적 위험 인물이 될 가능성을 감지하였다. 눈치가 빨랐던 아카키오스는 황제를 알현하고 나온 요안네스를 만나 절대로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직을 맡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라고 종용했다. 요안네스는 그러겠노라고 다짐하고 알렉산드레이아로 돌아갔지만 결과적으로는 맹세를 어긴 꼴이 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레이아 주교들의 자유로운 선출에 의해 그는 481년 요안네스 1세(Ιωάννης Α΄: 481-482)의 이름으로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좌에 올랐다.

그런데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아카키오스는 요안네스가 총대주교가 되었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황제 제논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요안네스는 그간의 관습에 따라 로마와 안티오케이아에만 사절을 보내 자신의 선출을 알렸을 뿐이었고 콘스탄티누폴리스에는 자신의 임명을 알리는 사절을 일절 보내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보다 서열상 위에 있는 콘스탄티누폴리스를 무시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처사였다. 황제도 요안네스의 행동에 당혹해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총대주교가 된 것에는 분명 자신의 호의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는데도 요안네스가 자신의 등극에 대한 사의를 전혀 표명하지 않았다니! 제논이 더욱 괘씸하게 여겼던 것은, 요안니스가 당시 안티오케이아에 있던 일로스더러 콘스탄티누폴리스에 가게 되거든 그 때 황제에게 자신의 선출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황제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 처사로 여겨졌다. 아카키오스는 기회를 놓지지 않고 황제에게 요안네스가 단성론자의 괴수인 디오스코로스 1세의 이름을 제단 이면화에 다시 올리려고 한다는 거짓말로 참소한다. 하지만 제논은 확실한 증거를 잡을 때까지 좀 더 기다렸다.

제단 이면화(diptych)는 나무, 상아, 금속 등으로 만들어진 두 짝의 그림을 경첩이나 끈으로 연결한 것이며 보통 제단에 놓여져 있다. 이 제단 이면화에 상통하는 주교들의 명단을 적는 것이 관습이었으며 주교의 이름을 여기서 지운다는 것은 서로 통교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12

이 즈음 제논은 단성론으로 인한 제국의 교회 분열과 혼란 상황을 타개하고자 칙령을 반포한다. 이것이 통일 혹은 일치를 뜻하는 「헤노티콘(Ἑνωτικόν)」이다. 482년에 반포된 이 칙령에서 제논은 이성론을 주장한 네스토리오스를 단죄했고, 단성론을 주장한 에우티케스 역시 단죄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양성론을 정통신앙으로 고백한 칼케돈 공의회를 제외한 앞선 세 공의회, 즉 제1차 니카이아, 제1차 콘스탄티누폴리스, 에페소스 공의회의 결과물만을 정통 교리로 인정하였다. 즉, 니카이아-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인정한 삼위일체론을 인정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가 테오토코스로부터 난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닌 한 분이심을 선언했다. 그러나 에페소스로부터 칼케돈까지 이어지는 두 공의회가 낳은 가장 큰 쟁점 사안이었던 “신성과 인성이 도대체 어떠한 형태로 결합되어 있는가?”에 대하여는 언급을 완전히 회피했다. 아니, 회피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언급을 금지하였다. 제논은 칙령을 통해 앞에서 언급한 이 기초적인 믿음의 표현 외에 칼케돈 공의회 법령을 비롯한 다른 주교 회의에서 결정된 어떠한 신앙 고백을 추가로 덧붙이는 사람을 단죄한다고 명시했기 때문이었다.

헤노티콘은 제논이 실시했던 중립 종교 정책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었다. 양 극단에 있는 네스토리오스와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취급하되 그 사이에 있는 여러 주장들에 대해서는 그저 함구한 채 누구나가 다 기본적으로 믿는 이전의 기본적인 신앙 고백들만 명시하였을 뿐이었다. 제논은 이러한 정책을 통해 더 이상의 논쟁을 엄금하면 동방 교회의 분열과 혼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아가 비잔티움 황제가 교회에 대하여 가지는 막강한 통치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인 아카키오스는 헤노티콘 칙령에 바로 서명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레이아와 안티오케이아의 사정은 달랐다. 아카키오스의 예상대로 칼케돈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 요안네스는 헤노티콘에 서명하지 않았다. 안그래도 아카키오스의 참소로 인해 눈밖에 난 요안네스가 한 술 더 떠 자신의 칙령마저 거부하자 제논은 노발대발했던 모양이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에서 쫓겨나게 된 요안네스는 로마로 도망쳐 교황 심플리치오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때를 놓칠세라 단성론자들의 수도원에서 숨어 지내던 페트로스 3세가 헤노티콘을 지지하면서 기꺼이 서명할 뜻을 내비쳤고, 이에 제논은 그를 다시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삼는다. 한편 안티오케이아에서는 총대주교 칼란디온(Καλανδιων: 479-485)을 비롯한 칼케돈파 주교들이 일로스의 정치적 야심에 동참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아 안티오케이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좌는 극적으로 다시 페트로스 2세의 차지가 되었다. 이렇듯 동방 교회의 총대주교좌에 다시 단성론자들이 모두 앉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로마 교회는 헤노티콘 반포에 분노했다. 그리스도가 한 분이라는 사실을 넘어서 신성과 인성이 공교하게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고 수 세기동안 믿어온 서방 교회는 동방 교회가 헤노티콘으로 대변되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당연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더 나아가 헤노티콘은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사실상 백지화시키는 칙령이었으므로, 칙령의 반포는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입증받았던 서방 교회의 교리를 깡끄리 뭉개버리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통 신앙의 수정이라는 중대한 일이 사도 베드로로부터 내려오는 천국 열쇠를 계승했다는 긍지가 있는 로마 교회의 주교들은 모두 배제된 채, 세속의 황제와 로마보다 한참 권위가 떨어지는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가 모의하여 칙령 따위를 반포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서방 교회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처사였다. 게다가 칼케돈 신앙 고백이 나오는 데 가장 큰 권위를 행사했던 것이 무엇이었나? 바로 대교황 레오 1세의 글이었다. 일개 황제가 교황의 이 신령한 진리의 글을 정통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교황을 통해 말씀하시는 사도 베드로의 말을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이는 이단이라고밖에 여길 수 없는 반기독교적인 태도였다.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예상대로 교황 심플리치오는 헤노티콘을 거부하였으며, 한발 더 나아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로마로 망명해 온 요안네스를 놀라(Nola) 지역의 주교로 삼아 헤노티콘에 반대하는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심플리치오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이듬해 선종(善終)하게 된다.

교황 펠릭스 3세의 초상화13

심플리치오의 뒤를 이은 펠릭스 3세(Felix III: 483-492)는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교황 선출 이후 그는 가장 먼저 로마 교구의 성직자였던 비탈리스(Vitalis)와 미세누스(Misenus)를 콘스탄티누폴리스로 보내 황제와 아카키오스에게 헤노티콘과 관련된 진의를 따져 묻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좌에 앉은 페트로스 3세를 폐위시킬 것을 강력히 촉구하게 하였다. 그러나 아카키오스는 교묘하게 술수를 부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황의 특사들이 콘스탄티누폴리스를 문책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카키오스 및 페트로스의 사절들과 공적으로 함께 교제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특사들은 교황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오히려 교황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펠릭스 3세는 결국 484년에 로마에서 주교 회의를 소집하여 강경한 결정을 내리고 만다. 우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특사 두 사람을 로마 교회에서 직위 해제시켰다. 또한 요안네스를 밀어내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된 페트로스 3세를 단죄하고 파문하였다. 그리고 헤노티콘과 관련하여 로마 교회의 숙적이었던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 아카키오스를 단죄하고 파문하는 엄숙한 결정을 내렸다. 그날 이후로 교황과 통교(通交)하는 모든 성직자들은 교황으로부터 단죄받은 아카키오스와 페트로스 3세의 사절과 절대 교류할 수 없었다. 교황의 행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펠릭스 3세는 아카키오스를 출교(黜敎)시킨다는 내용을 담은 파문장을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보내면서 동시에 황제가 교회를 가르치려 들지 말 것을 경고하는 서한을 첨부하여 전에 없던 강경한 태도로 비잔티움 제국과 맞섰다. 그리고 파문장은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전례를 봉헌하고 있던 아카키오스의 외투에 붙여졌다.

나중에 자신의 옷에서 파문장을 발견한 아카키오스는 분을 발하며 역으로 교황을 파문하고 단죄하였다. 그는 제단 이면화에서 펠릭스 3세의 이름을 지웠는데 이것은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가 서로 교제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이를 소위 아카키오스 분열(Acacian schism)이라고 한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서로의 교회와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 대한 단죄와 파문을 선언한 사상 첫 분열이었다. 아카키오스는 489년에 죽었는데 죽을 때까지 로마 교회와 화해하지 않았고, 뒤를 이은 플라비타스(Φραβίτας: 489)는 펠릭스 3세와의 갈등을 풀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빨리 서거해 버리고 말았다. 또한 헤노티콘을 반포한 황제 제논 역시 491년에 죽었다. 이렇듯 동방 교회에서 헤노티콘과 관련된 숙제를 풀 수 있는 주요한 인물들이 일거에 다 세상을 떠나 아카키오스 분열은 분쟁의 당사자들끼리의 화해로 해결되지 못한 채 그대로 남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동방 교회는 콘스탄티누폴리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를 중심으로 일시적으로 연합하여 서방의 로마 교회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 단성론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단성론을 둘러싼 심각한 분열과 논쟁은 여전히 동방 교회를 괴롭히고 있었다. 제국 내, 특히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에는 헤노티콘이 거부한 칼케돈 신앙 고백을 여전히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반면 극단적인 단성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황제의 정책이 미온적이라며 반발하고 있었다. 결국 헤노티콘은 ‘통합’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제국의 교회를 분열하게 만든 초유의 문제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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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빨리 회복되지 못한 분열

우선 짧은 재위를 뒤로한 채 선종한 플라비타스의 뒤를 이은 에우페미오스(Ευφήμιος: 489-495)는 화해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는 칼케돈 공의회를 인정하고 교황 펠릭스 3세의 이름을 다시 제단 이면화에 올렸다. 또한 제논의 뒤를 이어 비잔티움 황제로 선출된 아나스타시오스 1세(Αναστάσιος Α΄)가 황제로 등극할 때 정통 신앙을 지키겠다는 서약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던 알렉산드리아의 단성론자 총대주교인 페트로스 3세와의 교제를 끊어버려 로마 교회에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에우페미오스에게 전임자인 아카키오스와 플라비타스 또한 제단 이면화에서 제거하고 단죄하여야 서로 화해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단호한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요구는 아무리 전임자들이 분열을 초래한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서 세례를 받고, 그들로부터 총대주교좌를 물려 받은 후임자인 에우페미오스에겐 매우 어려운 요구였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에우페미오스는 총대주교에서 파면당하고 만다. 황제였던 아나스타시오스가 점차 단성론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공의회를 소집해 그를 추방한 것이다.14

로마 교회의 단호한 입장은 당시 교황 젤라시오 1세(Gelasius I: 492-496)가 로마에서 소집한 공의회를 잠시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일전에 펠릭스 3세의 특사로 콘스탄티누폴리스에 갔다가 직위 해제되었던 미세누스는 이 공의회에서 아래와 같이 선언하기에 이른다.

특히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따르는 모든 이들과 디오스코로스의 추종자들, 그리고 이 사람들과 통교하는 티모테오스 2세, 알렉산드리아의 페트로스 3세,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아카키오스, 안티오키아의 페트로스 2세 및 이들과 교류하는 모든 사람들을 이단으로 여기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을 모두 거부하고, 비난하며, 영원히 저주하며 또한 그들과 같은 자들 역시 저주받기를 빕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과는 아무런 친교를 맺지 않을 것이며 후일 완전히 분리될 것을 약속합니다.

젤라시오 1세는 이러한 자아 비판과도 같은 공개 회개를 마친 미세누스의 직위를 회복시켜 쿠마에(Cumae)의 주교로 다시 임명한다. 동방 교회가 미세누스처럼 통렬하게 회개하지 않는다면 서방 교회와 화해하는 일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엄포를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젤라시오 1세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대차게 강조한 사람으로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를 비롯한 동방 교회 성직자들이 상대하기에는 매우 곤란한 사람이었다. 그는 황제 아니스타시오스에 보낸 유명한 서한인 「두오 순트(Duo Sunt)」라는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황제여, 두 개의 권력이 세상을 다스리는데 하나는 주교의 신성한 권력(auctoritas sacrata pontificum)이요, 다른 하나는 군주의 권력(regalis potestas)입니다. 이 중에서 교황의 권력이 훨씬 더 중요한데 이는 사람인 왕들에게도 신성하고 공의로운 판단을 내려줄 수 있는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비록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위엄을 가진 윗 자리에 있는 분이지만 신성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신실하게 복종해야 하며, 구원을 얻기 위해 그들에게 전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또한 성사(聖事) 예식의 집전과 관련된 일들을 다스리는 것보다는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뜻대로 일을 만들어 나가려 하지 마시고, 오히려 그런 일들은 교회의 판단에 맡기십시오.
교황 젤라시오 1세의 초상화15

이 문서는 교황이 가지는 교회 권력이 황제가 가지는 세속 권력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우위를 가진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아주 중요한 교황 문서 중 하나이다. 이런 성격을 가진 젤라시오 1세가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젤라시오 1세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들과 동방 교회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태도를 종종 보였다. 일례로 그는 아카키오스를 에우티케스보다 더 중한 죄인이라고 평했는데 왜냐하면 아카키오스가 진실을 알면서도 진실을 대적하는 자와 손을 잡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좌를 매우 얕잡아 보아 콘스탄티누폴리스 주교좌는 본래 헤라클레이아(Hράκλεια)의 주교좌보다도 열등하다고 여겼으며, 일리리쿰의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리스에는 이단들이 너무 많다는 식의 표현으로 동방 교회를 폄훼했다. 그는 서방 교회의 요구에 우물쭈물하던 태도를 취했던 에우페미오스를 ‘더 이상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였고, 결국 에우페미오스의 눈물겨운 화해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완고했던 젤라시오 1세의 뒤를 이은 교황 아나스타시오 2세(Anastasius II: 496-498)는 젤라시오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고, 아카키오스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친다. 우선 그는 특사를 콘스탄티누폴리스로 보내어 자신의 교황좌 등극을 알렸다. 그리고 아나스타시오는 특사를 통해 아카키오스의 이름을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제단 이면화에서 삭제한다해도 그가 생전에 행했던 모든 세례와 서품은 인정해 주겠다는 의견을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전하게 했다. 하지만 서로마를 다스리던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 왕이 콘스탄티누폴리스로 함께 보낸 사절단 중 하나였던 페스투스(Festus)가 비잔티움 황제 아나스타시오스 1세로 하여금 로마 교회가 헤노티콘을 받아들인다는 식으로 오해하게 만들어 일이 그르치게 되고 말았다.

한편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는 상황이 더 복잡하게 흘러갔다. 로마의 사절단이 도착했을 때 알렉산드레이아 총대주교의 대표들도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와서 협상을 진행했는데, 알렉산드레이아 역시 로마와 화해하기 위해 전보다 유화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한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대교황 레오 1세가 칼케돈 공의회에 보냈던 저 유명한 글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헤노티콘에 기반한 신앙 고백을 주장했는데, 알렉산드레이아의 성직자들은 헤노티콘에 노골적으로 반영되었던 키릴로스 1세의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여 그 믿음을 지켜나간 디오스코로스 1세, 티모테오스 2세, 페트로스 3세와의 상통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로마 교회가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곤란한 요구였다. 특사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로 성인으로 칭송받는 키릴로스 1세16

대체 왜 이런 황당한 상황 속에서도 아나스타시오 2세는 왜 전임자와 같은 강경 정책을 따르지 않고 대(對)동방 유화 정책을 폈던 것일까? 당시 서방 교회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치하던 동(東)고트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으나 이 지역에는 여전히 비잔티움 황제를 섬기는 보수파가 많았다. 반(反)아레이오스주의자들로 구성된 원로원은 가끔 로마 교회에 적대적인 정책을 펼쳤던 동고트 왕국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에 더욱 적극적으로 의지하기를 희망했고, 그들의 뜻에 따라 아나스타시오 역시 동방 교회에 적극적인 유화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한번은 테살로니케(Θεσσαλονίκη)의 대주교가 포티노스(Φώτινος)라는 이름을 가진 부제를 로마로 파견한 일이 있었는데, 아나스타시오는 동방 교회에 대한 화해의 뜻을 가득 담아 그를 융숭하게 대접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시오의 행동을 전임 교황들과 서방 교회의 믿음에 대한 반역으로 여긴 서방 교회의 일부 주교들은 아나스타시오와 통교하지 않기로 선언한다. 이렇듯 내부 분열까지 감수하면서 아카키오스 분열을 종식시키려 했던 아나스타시오 2세는 498년 짧은 재위 뒤 갑자기 선종하고 말았다. 서방 교회에서 그에 대한 혐오가 어찌나 컸던지, 교황들의 인명록인 『리베르 폰티피칼리스(Liber Pontificalis)』에서는 그를 변절자로 묘사하여 신의 뜻에 따라 죽음을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7 아나스타시오의 정책에 대한 찬반 논쟁은 후임 교황을 둘러싼 권력 투쟁을 낳았다. 동방 교회에 대한 유화적인 정책에 반대하고 젤라시오 1세의 강경책을 지지했던 많은 성직자들은 사르데냐(Sardegna)의 부제였던 심마코(Symmachus: 498-514)를 교황으로 선출하였으나, 동방 교회와 비잔티움 제국에 호의적이었던 아나스타시오의 지지자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대사제(archpriest, 大司祭)였던 라우렌시오(Laurentius)를 대립 교황(對立敎皇, antipope)으로 세우고 말았다. 오랜 분쟁 끝에 심마코가 라우렌시오(Laurentius)를 꺾고 로마의 적법한 교황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나 그 과정은 매우 추악했다. 약 4년에 걸쳐 심마코 지지파와 라우렌시오 지지파 사이에 지저분한 논쟁과 무력 충돌이 잇따랐는데, 이 시기에 무수한 위조 문서들이 제작되어 전단지처럼 나돌게 되었다. 그 와중에 엔노디우스(Ennodius)라는 사람이 나타나 “교황은 그 어떤 인간보다도 위에 있는 분이므로 오직 신에 의해서만 재판받을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는데, 한낱 광신적 지지자의 근거 없는 낭설이 시간이 흐르면서 심마코 지지파는 물론 이후 수백년 간 아니 천 수백년 간 로마 교황의 신성한 특권을 뒷받침해주는 명제가 되고 말았다. 아무튼 난국에서 건져 올린 이 호쾌한 주장을 기반으로 로마의 교황좌를 이어 받은 심마코가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일 리 만무했다. 결국 해묵은 조건부 수용론이 되풀이되었고, 심마코 역시 아카키오스 분열을 끝내지 못한 채 514년 선종하기에 이른다. 펠릭스 3세와 아카키오스로 인해 일어난 분열이 5세기 안에도 종식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동방 교회는 점차 단성론자들의 차지가 되어갔다. 추방당한 에우페미오스(Ευφήμιος: 489-495)의 뒤를 이어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가 된 마케도니오스 2세(Μακεδόνιος Β΄: 495-511)는 507년 회의를 소집하여 칼케돈 신앙 고백을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로 인해 전임 황제 제논의 헤노티콘을 종교 정책의 기본으로 그대로 이어 받았던 비잔티움 황제 아나스타시오스 1세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결국 단성론자들은 총대주교에게 네스토리오스파에 가담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웠고 마케도니오스는 결국 황제에 의해 파면당다. 그의 뒤를 이은 단성론자 티모테오스 1세(Τιμόθεος Α΄: 511-518)는 예전 안티오케이아의 단성론자 총대주교였던 페트로스 2세가 했던 것처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여”를 삼성송에 완전하게 재삽입하여 항상 그렇게 불리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칼케돈 신앙 고백을 따르는 많은 콘스탄티누폴리스 시민들을 자극하였고, 이로 인해 삼성송 반란이라고 불리는 폭동이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도시의 관공서와 황제의 석상이 파괴되었으며, 한동안 도시의 기능이 마비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황제의 제위가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삼위일체를 표현한 러시아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Андрей Рублёв)가 그린 이콘. 삼성송(trisagion)의 tri-는 셋을, hagios는 '신성한'을 뜻하는 말로 성삼위(trinity)를 높이는 찬양이다. 18

한편, 안티오케이아가 아카키오스 분열 후반부에 논란의 핵으로 급부상하기에 이른다. 안티오케이아의 칼케돈파 총대주교였던 플라비아노스 2세(Φλαβιανός Β΄: 498-512)는 헤노티콘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역시 필록세노스(Φιλoξενoς)라는 사람으로부터 네스토리오스파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플라비아노스는 필록세노스의 참소에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이런 어중간한 태도를 호기로 여긴 안티오케이아의 단성론자 수도사들이 기회를 틈타 폭동을 일으켰다. 결국 그는 시돈(Σιδών)에서 열린 주교 회의의 결정에 따라 황제에 의해 파면당했다. 플라비아노스의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유명한 단성론자인 세베로스(Σεβερος: 512-518)이다.19 그는 단성론자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과 통교하지 않기로 결의한 칼케돈파인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헬리아스 1세(Ηλιας Α΄: 494-516)를 총대주교좌에서 내쫓는 공작을 성공시켰다. 이처럼 단성론은 각지에서 칼케돈파를 쓰러뜨렸고 승리했다. 이제 비잔티움 제국의 총대주교좌는 모두 단성론자들의 차지가 된 듯 보였다.

그러나 이때 트라키아 지방의 고트족 수장이었던 비탈리아누스(Vitalianus)가 비잔티움 제국에 반기를 들고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비탈리아누스의 대부(代父)가 단성론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플라비아노스 2세였던 것이다. 비탈리아누스는 이 어지러운 상황을 바로 잡는다는 구실로 반역을 일으켰다. 골치 아픈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고트족을 군사적으로 제압할 여력이 없었던 황제 아나스타시오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칼케돈 공의회에서 확립한 정통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는 비탈리아누스의 주장을 못내 따르게 되었다. 비탈리아누스는 동방 교회의 주교들이 함부로 그 뜻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어떤 제동 장치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당시 로마에서 새로 선출된 교황 호르미스다(Hormisdas: 514-523)의 참가를 전제로 한 공의회 개최를 부르짖었다. 별 뾰족한 수가 없었던 아나스타시오스 1세는 515년에 세계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선언하였다. 만일 비탈리아누스의 뜻대로 서방 교회의 수장인 호르미스다가 공의회에 참여하게 되면 칼케돈 신앙이 정통으로서 인정되고 단성론자들은 죄다 이단으로 단죄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었다. 이것은 아나스타시오스 1세가 추진하고 있던 헤노티콘에 기반한 종교 정책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교황 호르미스다의 초상화. 호르미스다는 아카키오스 분열을 능숙하게 종결시켰다. 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스타시오스 1세는 비탈리아누스의 뜻을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는데, 사실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위협하는 고트족의 봉기가 자신의 제위를 불안하게 하였기에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아나스타시오스 1세는 호르미스다와 함께 공의회 개최에 관하여 의논하기로 한다. 호르미스다는 이전에 망신만 당하고 교황의 위신을 실추시킨 펠릭스 3세의 특사들을 떠올렸다. 그는 그와 같은 비극적인 전철을 밟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특사들을 전보다 철저하게 교육시켜 콘스탄티누폴리스로 보냈다. 그 덕분에 특사들은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협의 결과를 원활하게 도출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515년에 접어들면서 고트족의 반란이 소강 상태가 되자 아나스타시오스의 제위는 전보다 훨씬 안전해졌다. 여유로워진 황제는 이내 마음을 바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세계 공의회 개최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동시에 호르미스다가 콘스탄티누폴리스로 보낸 특사를 푸대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로는 로마의 원로원을 충동질하여 호르미스다의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결국 호르미스다가 보낸 특사들은 협의 결과는 얻었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한 채 로마로 돌아와야 했다. 이에 분노한 호르미스다는 강경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대교황 레오 1세의 저작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핵심 교리를 담고 있으며 아카키오스 뿐 아니라 에우페미오스, 마케도니오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단성론자들은 모두 저주받아야 한다고 편지에 적었다. 아나스타시오스 1세는 결국 호르미스다와의 협상을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협상의 결렬로 인해 기뻐한 것은 비잔티움 제국 내의 단성론자들로,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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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키오스 분열의 종식

그러나 단성론자들의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늙은 황제였던 아나스타시오스 1세가 517년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단성론자들에게 들려온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은 그 뒤를 이은 황제인 유스티노스 1세(Ιουστίνος Α΄)가 칼케돈 신앙 고백 옹호론자라는 사실이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를 따라 콘스탄티누폴리스로 함께 온 그의 조카인 유스티니아노스(Ιουστινιανός, 훗날의 유스티니아노스 1세)가 열렬한 칼케돈 신앙 고백 옹호론자였다. 황제가 신권까지 쥐고 있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정치 체제로 말미암아 황제가 신봉하는 신앙이 바뀌게 되면서 동방 교회의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단성론의 성지와도 같았던 알렉산드레이아를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에서 칼케돈 신앙 고백을 옹호하는 사람의 목소리 커지기 시작했다. 티모테오스 1세의 뒤를 이어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가 된 요안네스 2세(Ιωάννης Β΄: 518-520)21는 토요일 전례 중에 대중의 빗발치는 요구를 받아들여 제단 이면화에서 안티오케이아의 총대주교인 단성론자 세베로스의 이름을 삭제하였다. 이어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 내용을 모두 인정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모두 단죄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518년에는 주교 회의를 긴급히 소집하였다. 그는 여기서 4개의 세계 공의회, 즉 니카이아, 콘스탄티누폴리스, 에페소스, 칼케돈 공의회의 결과를 진리로 인정했고, 대교황 레오 1세의 이름을 제단 이면화에 복귀시켰으며, 세베로스를 단죄한다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세베로스에 의해 파면당한 헬리아스 1세의 뒤를 이은 예루살렘 총대주교 요안네스 3세(Ιωάννης Γ΄: 516-524)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였고, 그는 예루살렘에서 칼케돈 옹호론자인 대수도원장인 사바스(Σάββας)와 팔레스타인의 주교 라우라(Λαύρα) 등을 모아 회의를 개최하여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티로스(Τύρος)의 주교였던 에피파니오스(Επιφάνιος) 역시 이러한 결정에 환영의 뜻을 밝혔다.

안티오케이아의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모두가 단성론자 세베로스를 양떼를 모는 목자가 아닌 양떼를 유혹한 늑대로 묘사하여 그를 손가락질하기 시작했으며, 갖가지 죄목을 뒤집어 씌우면서까지 총대주교좌에서 그를 끌어내리려고 했다. 제국 동부의 귀족이었던 에이레나이오스(Ειρηναἰος)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그를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압송하기 위해 안티오키아로 왔지만 세베로스는 단성론의 성지였던 알렉산드레이아로 도피하고 만다. 세베로스는 알렉산드레이아에서 당시 총대주교였던 단성론자 티모테오스 4세(Τιμόθεος Δ΄: 517-535)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는 단성론자의 괴수로 지목되어 단죄받고 저주받았다. 안티오케이아의 후임 총대주교는 파울로스(Παυλος: 518–521)22였는데 그는 굳센 칼케돈 신앙 고백 옹호론자로, 이미 에데사(Έδεσσα) 지역의 주교로 있을 때 비칼케돈파 단성론자들을 박해하기로 매우 악명이 높았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상황들이 전개되자 새 황제와 교황 호르미스다 사이의 화해를 위한 협상이 급물살을 타게 된다. 물론 유스티니아노스는 제국의 안녕을 위해 단성론자와도 화해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호르미스다는 매우 굳은 의지를 표명하며 아카키오스는 지엄하게 단죄 받은 사람이므로 교회와 연합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결국 유스티니아노스는 호르미스다의 뜻을 따라서 교황이 내건 화해 조건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에 호응하여 호르미스다는 특사 다섯을 콘스탄티누폴리스로 보냈다. 사실상 이 특사들은 로마의 화해 조건을 천명하러 간 것이지 결코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에서 유스티니아노스와 협상을 통한 추가적인 의견 조율을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특사들이 들고 간 편지 중에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네스 2세에 보내는 편지도 있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아카키오스와 같이 단죄받은 사람을 옹호하려 하지 마시오. 대신 아카키오스와 그의 추종세력을 모두 저주하여 모든 이단들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시게.

519년 3월 25일, 로마 교황의 특사들이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도착했다. 황제 유스티노스는 조카인 유스티니아노스와 원로원 의원들로 하여금 도시 외곽에서부터 이들을 정중히 맞이하게 하였다. 그는 교황의 뜻이 담긴 편지를 귀중하게 받아들고 그 뜻에 순복하기로 했다. 호르미스다가 전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주교들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고 바른 믿음을 수호하는 것이 구원의 첫걸음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그 결정을 우리는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로마의 교황좌의 돌봄 안에 있는 보편된 믿음이 언제나 신성하며 침탈되지 않았기에 그 믿음 자체로 증명된 바이다. 따라서 이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우리는 주교들의 모든 결의에 따라 모든 이단들, 그중에서 특별히 이단성이 짙은 네스토리오스와 더불어 에우티케스, 디오스코로스 1세를 저주한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단죄받은 이들을 이제 우리는 축복하며 따르기로 한다.23 살인자인 티모테오스 2세와 그의 제자들 및 추종자들을 모두 단죄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페트로스 3세, 그리고 그들과 규합하고 따랐던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주교였던 아카키오스 및 그와 통교하는 모든 이들을 저주한다. 어느 누구라도 이런 자들과 통교한다면 똑같은 단죄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같은 이유로 안티오케이아의 페트로스 2세를 단죄하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바른 믿음에 대해 기록된 로마의 교황인 축복받은 레오의 글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분께서 죽기까지 교황좌에서 선포하셨던 그 모든 것들을 이전에 전해진 대로 설파하는 바이다. 그리고 나(호르미스다)는 교황좌가 가르치는 전적으로 옳고 굳건한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통교를 원하며, 나중에 성사가 진행될 때 이 보편 교회의 상통으로부터 분리된 자들의 이름은 절대로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곧 교황좌가 말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동방 교회의 주교들은 제국 내에서 개최된 세계 공의회나 황제의 칙령에 대한 서명은 해 본 적이 있어도 로마 교황의 문서에 서명을 해 보기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문서는 지금까지 동방 교회에 전해진 그 어떤 문서들 중에서도 교황의 수위권이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드러난 글이었다. 만일 아카키오스 같은 사람이었다면 단박에 이 글을 보고 입장을 바꿔 로마 교황을 다시 단죄하거나 서명을 거부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를 비롯한 2,500여명의 주교들이 군말없이 여기에 서명했다. 서방 교회, 곧 로마 교황의 승리였던 것이다. 동방 교회가 여기에서 그나마 교황 특사들로부터 양해를 얻은 것이라고는 두루뭉술하게 추종자들이라는 표현에 그치게 하여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전임 총대주교들, 즉 화해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끝내 교황의 엄중한 가르침을 받들지 못했던 에우페미오스와 마케도니오스 2세의 이름이 단죄되는 사람들 명단에 들지 않도록 한 것 정도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네스 2세는 호르미스다만 승리하게끔 두지는 않았던 듯했다. 요안네스 2세는 이 글에 서문을 붙이기로 했다. 그 서문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제가 이 편지를 받아보았을 때, 진정으로 교황 성하의 영적인 사랑에 대해 크게 기뻐했는데 그것은 당신께서 주교들의 오랜 전통을 따라 우리 주의 거룩한 교회를 연합시키고자 애쓰시고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성적인 무리를 갈라놓는 그 모든 것들을 없애시기를 서두르셨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당신 역시 제가 평화를 사랑하며 당신에 의해 단죄받은 모든 이단들을 비난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의 거룩한 교회와 콘스탄티누폴리스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로 연합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저는 사도 베드로좌와 콘스탄티누폴리스 주교좌를 같은 주교좌로 여깁니다.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는 네 개의 세계 공의회를 신봉한다고 했으니 거기서 인정한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의 서열상, 그리고 새로운 로마로서 주어지는 특권 역시 인정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따라서 이러한 서문을 붙임으로서 로마의 교황좌가 가지는 수위권만큼이나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좌도 같은 위엄과 권위를 가진다는 것을 은근슬쩍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요안네스 2세는 최초로 자신의 총대주교 직함에 오이쿠메니코스(Οικουμενικός), 즉 ‘세계의(ecumenical)’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삽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르미스다는 이 일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훗날 이 문제는 100여년 뒤에 잠시 불거지게 된다(5장 참조). 아무튼 동서 교회는 35년 정도 이어진 아카키오스 분열을 종식시키고 다시 서로 통교하기로 합의했다. 교황의 특사들은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머물면서 동방 교회의 사절들과 서로 교제를 가졌고 가끔은 이런저런 논의와 논쟁을 거치면서 서로 간의 이해의 차이를 좁혀 나갔다. 아카키오스 분열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종식되었다.

그러나 아카키오스 분열 종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호르미스다도, 요안네스 2세도 아니었다. 그 자리는 바로 차기 황제 유스티니아노스의 자리였다. 이제 유스티니아노스 이야기를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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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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