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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2-27

Religion 2-27

동서교회 대분열 27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27

에큐메니컬 운동
Ecumenical Movements


목차

  1. 세계교회협의회의 창설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3. 에큐메니컬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
  4. 진전되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열매
  5. 동서교회의 연합을 향한 길
  6. 참고 사이트 및 출처

세계교회협의회의 창설

분열된 교회상을 치유하고자 한 기독교 신자들의 운동은 아무래도 더 작은 분파로 많이 갈라져있던 복음주의 개신 교회에서 먼저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1844년에 약자 YMCA로 더 유명한 기독교청년회(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이게 되는데 유럽과 미주의 YMCA 관계자들 99명은 1855년 프랑스 파리에서 소위 '파리 선언'이라고 불리우는 기념비적인 활동 이념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이들은 요한복음서 17장의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를 모토로 삼았다. 파리 선언의 핵심 강령은 다음과 같다.

YMCA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과 구세주로 여기고 신앙과 삶 속에서 그 분의 제자가 되길 원하는 젊은이들을 연합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젊은이들 사이에서 확장시켜나고자 하는 노력에 연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YMCA는 분명히 초교파적이었으며 연합을 뚜렷하게 활동 이념으로 명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만성들로 구성된 YMCA의 자매단체로서 YWCA, 곧 기독교여자청년회(Yo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이 발족하여 세계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활동들은 젊은 세대로부터의 단결과 연합을 촉진하였으며 기독교 연합 운동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어느 교단에서나 다 중요시하게 여기던 선교라는 사명 하에 함께 교회 일치 운동을 진행하기에 이른다. 관계자들은 단결을 위한 단체 모임의 필요성을 느꼈고, 1900년에 뉴욕(New York)의 카네기 홀(Carnegie Hall)에서 세계선교대회를 개최했다. 그런데 여기에 무려 5만 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다. 선교와 교회의 화합을 향한 사람들의 열기가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대서양 건너편에서도 10년 후에 세계선교대회를 개최할 것을 주장하였고, 그리하여 1910년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딘버러(Edinburgh)에서 세계선교회의(World Missionary Conference)가 개최되었다. 비록 이것이 교회 일치를 위한 근본적인 논의들, 이를테면 교리의 심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는 오직 선교만을 위한 연합 대회였지만, 적어도 개신 교회 내에서의 초교파적인 움직임은 교회 일치를 바라는 사람들을 충분히 자극시켜 개신 교회가 아닌 다른 교단들과의 대화와 일치 운동도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세계선교회의 모습 1

그 희망은 1921년 세계선교협의회(IMC,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의 창립이라는 결실을 낳았다. 세계선교협의회는 각종 출판물과 회의를 통해 각 교파간의 신학 교류와 토론의 장을 제공하였으며 범세계적인 선교대회를 10년마다 세계 각지에서 개최했는데 첫번째 대회는 예루살렘(1928)에서, 그리고 두번째 대회는 인도의 마드라스(1938)2에서 개최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휘트비(Whitby)에서 1947년에 세번째 대회가 개최되었고, 긴급한 상황 속에서 5년에 한 번씩 대회가 개최되어 4차는 독일의 빌링겐(Willingen)에서, 5차 대회는 가나(Ghana)에서 개최되었다. 그런데 해가 지날수록 세계선교협의회 내에서 선교 분야에서 뿐 아니라 교회 전 분야에서의 협력과 일치를 도모해야 한다는 의견이 확대되었다. 선교의 사명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려 준 지상 과제이며, 모든 교단과 교파가 신학적인 내용에 대해서 서로 잘 알고 단결해야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느꼈기 때문이다.

한편 세계선교협의회 외에도 유럽에서 주요한 초교파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1925년 스웨덴의 스톡홀름(Stockholm)에서 개최된 '생활과 일에 관한 세계 그리스도인 회의'는 학자이자 스웨덴 교회 웁살라(Uppsala)의 대주교였던 나탄 셰데르블롬(Nathan Söderblom)에 의해 주도되었다. 복잡한 교리의 문제보다는 실질적인 행동과 사회 정의를 기반으로 한 단결을 부르짖은 셰데르블롬은 세계 37개국의 대표들을 한 자리에 초청하였는데 여기에는 개신교 뿐 아니라 동방 정교회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교회의 일치에 관한 심층적인 토론을 가졌고,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로 번역된 총 14개조로 구성된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결의문은 이번 회의가 일회성 만남이 되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고 그 결정대로 이듬해부터 5년간 위원회 회의가 지속되었고, 1930년에 정식으로 조직을 수립한 뒤 1937년에 영국 옥스포드(Oxford)에서 두 번째 모임을 갖기에 이르렀다.

또다른 흐름은 1927년에 로잔에서 신앙과 직제에 관한 세계대회(World Conference on Faith and Order)에서 나타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대회는 교회의 교계 구조에 주목하여 기구로서의 각 교회들이 어떻게 연합할 수 있는지 탐색하는 것을 주된 성격으로 하였다. 여기에는 개신교 뿐 아니라 동방 정교회, 그리고 구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 400명 가량이 참석하였다.3 신앙과 직제에 관한 세계대회는 천편일률적인 확고한 결정 사항을 내리려는 입장을 버리고, 대신 열린 태도로서 서로의 의견을 수용하고 최대한 많은 의견과 소수 의견을 함께 진지하게 고려하는 진일보한 연합의 자세를 보였다. 당시 요크(York)의 영국 교회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이 회의체의 후속 모임을 이끌었으며, 1937년에 에딘버러에서 두 번째 대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교계 구조에서 드러나는 기독교의 모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따라서 1937년에는 '생활과 일에 관한 세계 그리스도인 회의'와 '신앙과 직제에 관한 세계대회'는 연합을 모색하기에 이르렀고, 런던의 웨스트필드(Westfield) 대학에서 모인 작은 위원회는 최종적으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라는 교회 일치 운동의 선도적 회의체를 창설하기로 결의한다. 1938년 위트레흐트(Utrecht)에서는 독립 위원회가 구성되어 세계교회협의회의 헌장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들은 그 해 가까운 시일 내에 협의회를 발족하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전쟁이 문제였다. 세계를 휩쓴 2차 세계 대전, 특히 나치 독일은 네덜란드를 결코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WCC 창설은 유야무야 없던 일이 되었다가 전후 복구가 겨우 완료되고 난 1948년에야 겨우 실행될 수 있었다. 1948년 8월 2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Amsterdam)에 모인 147명의 교회 대표들은 '생활과 일에 관한 세계 그리스도인 회의'와 '신앙과 직제에 관한 세계대회'는 연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으며 1950년 스웨덴의 룬드(Lund)에서의 회의를 통해 협의회의 성격을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WCC에 세계선교협의회가 정식으로 연합함으로써 WCC는 명실 상부한 교회 일치를 위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합체가 되었다. 그러나 WCC는 어떠한 회원 교회들 위에 권위를 세우려 하지도 않았고 그 영향력을 통해 새로운 교리나 지도안을 만들어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열린 태도는 수많은 교회들을 회원으로 두게 되었고 특별히 정교회와 성공회, 개신교가 주축이 되었다. WCC는 헌장 1조에서 스스로를 성경에서 말하는 바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구세주로 고백하고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의 공동 소명을 함께 이루려고 노력하는 교회들의 교제라고 소개하고 있다.4

대한민국 부산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 10차 총회 개막식 모습. 여러 교파의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5

WCC는 매 7-8년마다 전세계 각 곳에서 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아래에서 그 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

  1.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1948년.
  2. 미국 에반스톤(Evanstone). 1954년.
  3. 인도 뉴델리 (नई दिल्ली). 1961년.
  4. 스웨덴 웁살라. 1968년.
  5. 케냐 나이로비(Nairobi). 1975년.
  6. 캐나다 밴쿠버(Vancouver). 1983년.
  7. 호주 캔버라(Canberra). 1991년.
  8. 짐바브웨 하라레(Harare). 1998년.
  9.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Porto Alegre). 2006년.
  10. 대한민국 부산. 2013년.

이와 같이 초교파 모임을 통해 교회 연합과 일치를 도모하는 운동을 교회 연합 운동, 곧 에큐메니컬(ecumenical) 운동이라고 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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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러한 WCC를 비롯한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소극적이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교황 중심의 교회 연합만을 옳다고 인정하고 있었고, 25편에서도 숱하게 봤듯이 교회 연합을 위해 상대편이 충족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로마 교회의 수장인 교황과 상통하고 그의 수위권을 받아들일 것이며 그의 사목적 가르침에 순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사도 전승이 끊어진 성공회와 개신교는 교회가 아닌 신앙 공동체라는 것이었다.6 그리고 여전히 동방 정교회와 불편한 관계는 해소되지 못한 채 서방의 총대주교인 교황은 동방의 총대주교들과 상통하지 않고 있었다.

비오 9세(Pius IX: 1846-1878)로 대표되는 19세기부터 이어진 보수적이고 중앙집권적인 로마 교황의 이미지는 세계 대전과 사회주의의 도전에 대항했던 20세기 초중반을 거치면서 더욱 완고해졌고, 비오 12세(Pius XII: 1939-1958)는 1950년에 성모의 몽소 승천(Assumptio)을 교황 무류설에 입각하여 믿을 교리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즉, 성모 마리아가 육체와 영혼을 간직한 채 하늘나라로 들려 올라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동방 정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마리아가 평범한 사람들처럼 죽음을 맞이하였으나 나중에 무덤을 열어보니 비어있었다는 견해를 지지하며 승천을 교리로 가르치지 않고 대신 안식(κοιμησις)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정교회 입장에서는 성모 승천 교리의 경우 교회의 전통과 크게 다르다고 여겨지지는 않았기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가 또 자기들 마음대로 세계 공의회의 추인 없이 교리를 정했다는 게 아쉬웠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심을 철회한 개신교는 이러한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모를 숭배한다는 오해가 확산되었다. 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더욱 더 이질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변화의 기운은 싹트고 있었다. 비오 12세는 1943년에 회칙 '디비노 아플란테 스피리투(Divino Afflante Spiritu, 성령의 영감)'을 내려 성서의 심층적인 연구를 허락한다. 이는 50년 전 교황 레오 13세(Leo XIII: 1878-1903)가 내린 회칙 '프로비덴치시무스 데우스(Providentissimus Deus)'의 성서 비평 비난과는 사뭇 대조적인데, 그 50년동안 급속도로 발전한 고고학과 인류학, 그리고 여러 학문들의 성과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어서이기도 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에서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지난 50년 도안 성서와 제반 학문 연구 상황이 급격하게 변했다는 것을 쉽게 인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것을 떠나서 우리의 전임자가 '프로비덴치시무스 데우스' 회칙을 내리실 때만해도 팔레스타인 지방의 어느 지역이라도 적절한 발굴 작업을 통해 탐사가 시작된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와 같은 조사 작업은 실제 경험을 근거로 하여 발전된 더욱 정밀한 방법과 숙련된 기술들로 말미암아 훨씬 자주 벌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조사 작업들은 우리에게 더욱 풍부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전문가들과 이런 학문을 연구하시는 모든 이들은 성서의 명확하고 확실한 이해를 위한 이 탐사 작업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깨우침을 받게 되었는지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이런 발굴의 가치는 여러 시기에 쓰여진 기록 문서들의 발견으로 더욱 빛나게 되었는데, 이들은 오래 전 고대의 언어, 글자, 사건, 풍습, 그리고 예전 형식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들입니다. 또한 우리 구세주가 사시던 때에 쓰여진 파피루스 문서들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일진대 이들은 공적이거나 사적인 문서들과 관습에 대한 발견 및 조사의 이해를 더욱 높였습니다.

또한 당시까지는 오직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번역한 라틴역 불가타(Vulgata) 성서 원문만이 성서 해석의 요체가 된다고 밝혔지만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등의 원문들과 다른 번역을 활용해서 성서가 가진 참 뜻을 밝히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으며 어느 정도 선의 비평학적 연구와 해석 또한 장려하였다. 이 회칙의 마지막에는 성서 연구의 자유에 대한 교황의 의중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교회의 많은 자녀들, 특히 성사학 교수들과 젊은 성직자들, 그리고 설교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끊임없이 묵상하기를 강렬히 희망하며, 우리 주님의 성령이 얼마나 선하고 달콤하지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열린 태도는 후임 교황 요한 23세(Iohannes XXIII: 1958-1963)의 짧은 임기 시절에 가톨릭 교회의 대변혁의 전조였다. 베네치아(Venetia)의 총대주교였던 안젤로 론칼리(Angelo Roncalli)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이들은 이 77살의 늙은 교황은 과도적인 시기의 제한적인 교황 역할만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교황 요한 23세는 가톨릭 교회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7

그러나 이 늙은 교황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애초에 출신부터가 남달랐다. 그의 집안은 가난했으며 출신은 볼품없는 작은 마을의 소작농 집안이었다. 게다가 뛰어난 학자이거나 바티칸의 요직을 두루 겸직했던 성직자가 아니었다. 그는 교황 대사로서 터키와 불가리아에 파견되었는데 두 나라 모두 가톨릭 교세가 매우 약한 나라들이었다. 그러나 온후하게 일처리를 했다는 명성을 쌓은 론칼리 주교는 나중에 프랑스 대사가 되었고 베네치아 총대주교 자리에 등극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장 및 사목 환경은 격의 없이 소탈하게 소통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해 주었고, 그로 인해 론칼리 주교는 과도한 전통과 호교론적인 태도보다는 열린 태도와 현실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성격을 가진 성직자로 정평이 나 있었다.

요한 23세는 등극한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의 한 병원을 찾아 어린이들과 함께 성탄절을 기념했다. 그뿐 아니라 로마의 가장 큰 교도소인 레지나 코엘리(Regina Coeli)를 찾아 죄수들을 면담했는데 그 때 한 말이 압권(壓卷)이었다.

당신들이 제게 올 수 없었으므로 제가 여러분께 왔습니다… (중략) 그래서 제가 여기 왔고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도 보셨겠지만 저는 여러분께 내 시선을 고정했고, 제 마음을 당신들의 마음 곁에 두었습니다… (중략) 당신들이 집에다가 보낼 첫 편지에다가 교황이 당신과 있었고 그가 당신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소식을 꼭 적어주시길 바랍니다.

그 뿐만 아니었다. 1960년 12월 2일, 교황청을 지키는 스위스 용병들은 바티칸 사도 궁전에 찾아 온 보라색 옷을 입은 성직자를 보게 되었다. 그는 영국 교회 및 전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수장인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 지오프리 피셔(Geoffrey Fischer)였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로마를 찾는 것은 거의 600년만이었고, 헨리 8세(Henry VIII)가 로마 교황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뒤 최초로 성공회 수장이 로마 교황과 대면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게다가 요한 23세는 일본 토착 종교 신토(神道)의 신관인 신쇼쿠(神職)와 대면하였고, 공산권의 사회주의 정치가들과도 만났다. 그의 소탈한 행보는 전세계적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선하신 교황이라는 뜻의 '일 파파 부오노(il Papa buono)'라고 불렀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끼친 영향력은 단지 이러한 격의 없는 행동을 통해 교황의 권위주의를 내려놓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사상 가장 큰 변혁 중 하나가 그의 치세 중에 있었으니 그게 바로 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요한 23세는 변화하는 새 시대에 맞추어 교회가 어떠한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늘 깊이 궁구하고 있었다. 그는 '최신의 것으로 새로 고친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를 핵심 어구로 삼아 바티칸에서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1959년 추기경단과의 모임에서 공식적으로 밝혔다. 당시 개혁을 반대한 추기경들의 노력도 있기는 했으나 교황은 치밀하게 위원회를 구성하여 공의회 개최를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전 세계 주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공의회에서 다룰 주제들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 의견을 구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공의회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개신교와 동방 정교회 인물들이 천거 및 초청되었는데, 이 모든 준비과정과 공의회의 목표 자체가 파격적이다 못해 사람들에게는 급진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공의회의 개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대부분 이단을 정죄하기 위해, 교리를 확정 혹은 수정하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교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공의회가 끝나면 어느 누군가는 단죄를 받았고, 어떤 생각은 이단으로 찍히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늙은 교황이 개최하려고 하는 이 공의회는 그런 목적이 아니었다. 오직 교회의 변혁, 새 바람의 향한 소망이었던 것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참석자는 교회사상 최대 최대 규모로 2천명이 넘었다. 그 당시로서는 가장 최근의 공의회였던 1차 바티칸 공의회의 참석자가 737명이었던 것에 비춰보면 규모가 엄청났고, 이는 그간 양적으로 성장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세(敎勢)를 입증해주는 것이었다. 사실 20세기 중반에는 항공편을 이용하여 전세계 이동이 그 어느 때보다도 원활해진 시기였다. 그 덕분에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의 주교들과 학자들이 대거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장 참석자 중 46% 만이 서구권이었고, 무려 42%에 해당하는 참석자들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 교구 사람들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공의회였다. 그 덕분에 진취적이었던 외부 세계의 목소리가 많이 반영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혁신적이자 진보적인 결과물을 많이 내놓을 수 있었다.

바티칸 공의회 개막식이 열리던 성 베드로 성당에 모인 전세계 주교들. 8

바티칸 공의회는 총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그리고 3가지 선언을 이루어내었다. 방대한 2차 공의회의 결과물 중에는 당시 로마 가톨릭만을 빼고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열린 자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정교회와 개신교 인사들을 공의회에 참석시킨 것만으로도 에큐메니컬 운동 역사의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는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제 이들과의 친교를 더욱 다지고 활발하게 교회 일치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한 것이다. 그것을 하나씩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총 30개조로 구성된 동방 교회들과의 관계에 대한 교령인 오리엔탈리움 에클레시아룸(Orientalium ecclesiarum, 동방 교회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5. 동방 교회들이 보편 교회에 얼마나 많은 공헌을 하였는지는 역사와 전통과 수많은 교회 제도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거룩한 공의회는 이 교회의 영적 유산을 마땅히 존중하고 찬양할 뿐만 아니라 이를 온 그리스도 교회의 유산이라고 확언한다. 그러므로 동방 교회들도 서방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특수 규율에 따라 교회를 다스릴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공의회는 장엄하게 선언한다. 존경스러운 그 오랜 규율들은 동방 교회 신자들의 생활 관습에 더 잘 맞고, 그들의 선익을 돌보는 데 더욱 적합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9.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동방 교회의 총대주교들은 특별한 명예를 지니며 아버지와 수장으로서 자기 총대교구를 다스린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공의회는 각 교회의 옛 전통과 세계 공의회들의 교령에 따라, 총대주교들의 권리와 특전을 회복시키기로 결정하였다. 현대 상황에 어느 정도 적응되어야 하겠지만, 이 권리와 특전은 동서의 교회가 일치되어 있던 때에 널리 누렸던 것이다. 총대주교들은 자기 교회회의와 더불어 최고 권위를 이루고 총대교구의 모든 문제를 다루며, 총대교구 지역 안에서 자기 예법의 새로운 교구를 설립하고 주교를 임명할 권한을 가진다.

25. 갈라진 동방 교회의 신자들이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 가톨릭 교회와 일치하려 할 때에는 가톨릭 신앙의 단순한 선서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동방 교회에서는 사제직이 유효하게 보존되어 왔으므로, 가톨릭 교회와 일치한 동방 성직자들에게는 관할 권위가 제정한 규범에 따라 자신의 성품 사제직을 수행할 권한이 있다.

27. 위의 원칙을 전제로, 가톨릭 교회에서 갈라진 선의의 동방 교회 신자들이 스스로 요청하고 제대로 준비되어 있다면, 그들에게 고해성사, 성체성사, 병자성사를 수여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가톨릭 신자들도, 긴급한 때나 진정 영적으로 유익할 때 그리고 가톨릭 사제를 만나기가 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에는, 성사가 유효하게 거행되는 동방 교회의 비가톨릭 교역자에게 이 성사들을 요청할 수 있다.

28. 같은 원칙 아래,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가톨릭 신자들과 갈라진 동방 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거룩한 예식과 사물과 장소의 교류가 허용된다.

그리고 이 교령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거룩한 공의회는 동서 가톨릭 교회 신자들의 효과적이며 능동적인 협력에 크게 기뻐하며 선언한다. 현재의 상황을 위하여 제정한 이 모든 법률 규정은 가톨릭 교회와 동방 교회들이 완전히 일치할 때까지 유효하다. 그때까지 동서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의 도움으로 모든 이가 하나가 되도록 열렬히 꾸준히 날마다 하느님께 기도하기를 공의회는 간곡히 요청한다. 또한 어느 교회의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도의 이름을 용기 있게 고백하여 시련과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이에게 위로자이신 성령께서 용기와 위로를 풍성히 내려 주시기를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는 모두 형제애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여야 한다.

그리고 일치 운동에 대한 교령인 우니타치스 레인테그라치오(Unitatis Redintegratio)에서는 동방 정교회와 개신교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새롭게 하기에 이른다. 이들을 '주님 안의 한 형제'라고 인식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3. 하느님의 이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이미 분열이 생겨났으며, 사도는 이 분열을 단죄하여야 한다고 엄중히 책망하였다. 후세기에는 더 많은 불화가 생겨, 적지 않은 공동체들이 가톨릭 교회의 완전한 일치에서 갈라졌으며, 어떤 때에는 양쪽 사람들의 잘못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러한 공동체들 안에서 태어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 분열 죄로 비난받을 수는 없으며, 가톨릭 교회는 그들을 형제적 존경과 사랑으로 끌어안는다. 그리스도를 믿고 올바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톨릭 교회와 친교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들과 가톨릭 교회 사이에는 교리나 때로는 규율 문제에서 또는 교회의 조직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차이가 있어, 완전한 교회 일치에 적지 않은 장애가, 때로는 중대한 장애가 가로놓여 있지만, 일치 운동은 바로 그러한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세례 때에 믿음으로 의화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며, 가톨릭 교회의 자녀들은 그들을 당연히 주님 안의 형제로 인정한다. (중략) 그리스도교의 적지 않은 거룩한 행위들도 우리와 갈라진 형제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각각의 교회나 공동체의 다양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이루어지는 이 행위들은 의심 없이 은총의 생명을 실제로 낳아 줄 수 있으며, 또한 이 행위들이 구원의 친교로 들어서는 문을 열어 줄 수 있다고 말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 갈라진 교회들과 공동체들이 비록 결함은 있겠지만 구원의 신비 안에서 결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그 교회들과 공동체들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 수단의 힘이 가톨릭 교회에 맡겨진 충만한 은총과 진리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4. (상략) 일치 운동은 교회의 여러 가지 필요와 시대의 요청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증진하도록 일으키고 조직하는 활동과 사업으로 이해된다. 먼저, 갈라진 형제들의 상황을 공정하고 진실하게 반영하지 못하여 그들과 상호 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말과 판단과 행동을 삼가는 모든 노력을 말한다. 그다음에는, 여러 교회나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심으로 조직한 모임에서 적절한 지식을 갖춘 전문가들이 각각 자기 교파의 교리를 깊이 설명하고 그 특성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대화”를 말한다. 이러한 대화를 통하여 모든 이가 두 교파의 교리와 생활에 관한 더 올바른 인식과 더욱 공정한 평가를 하게 된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요구하는 대로 공동선을 위한 온갖 일에서 그 교파들이 더욱 폭넓은 협력을 추구하고 또 가능한 곳에서는 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를 바친다. 마침내 모든 이가 교회에 관한 그리스도의 뜻을 얼마나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 스스로 성찰하고, 당연히 요청되는 쇄신과 개혁 활동을 줄기차게 추진하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목자들의 감독 아래 가톨릭 신자들이 지혜롭게 또 인내로이 이행할 때에, 공정과 진리, 화합과 협력, 형제애와 일치의 선익에 이바지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조금씩 교회의 완전한 일치를 가로막는 장애들을 극복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인 성찬례를 거행하며,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의 일치 안으로 모이게 될 것이다. (중략)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 신자들은 우리와 갈라진 형제들에게서 발견되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보화들을 공동 유산에서 나온 것으로 기꺼이 인정하고 존중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피를 흘리기까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다른 이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부요와 힘찬 활동을 인정하는 것은 마땅하고 구원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놀라운 분이시고 놀라운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하략)

특별히 동방 정교회에 관해서는 추가로 다음과 같은 선언을 덧붙였다.

16. 또한 동방 교회들은 이미 초세기부터 교부들과 교회회의나 세계 공의회가 승인한 고유의 규율을 따랐다. 위에서 말한 관습과 관례의 다양성은 교회 일치에 지장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교회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그 사명을 다하는 데에 적지 않게 이바지한다. 온갖 의혹을 불식하고자, 거룩한 공의회는 동방 교회들이 온 교회에 필요한 일치를 명심하고 자기 신자들의 품성에 더 적합하고 영혼의 선익 도모에 더 적절한 고유 규율에 따라 자기 교회를 다스릴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전통적 원칙을 언제나 충실히 지켜 오지는 않았으나, 이 원칙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일치 회복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노스트라 아이타테(Nostra Aetate)' 선언을 통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타 종교와 화합 및 이해 증진을 호소했다. 특히 전통적인 충돌이 잦았던 이슬람교와 유대교에 대해선 따로 언급할 정도였다.

2. (상략) 가톨릭 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양식과 행동 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또 끊임없이 선포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은 풍요로운 종교 생활을 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당신과 화해시키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혜와 사랑으로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을 증언하는 한편, 다른 종교인들의 정신적 도덕적 자산과 사회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증진하도록 모든 자녀에게 권고한다. (하략)

비록 공의회 개최를 선언한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의 결과를 다 보지 못하고 선종했지만 그 뒤를 이은 바오로 6세(Paulus VI: 1963-1978)가 공의회를 성실하게 이끌었으며 오히려 더 긴 기간동안 공의회의 진행을 지도하며 그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1054년의 동서교회 대분열 이후 최초로 서방 교회의 수장인 로마 교황과 동방 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간의 역사적인 만남이 1964년 예루살렘에서 성사되었고, 여기서 상호 파문 취소에 합의하는 공동 선언이 발표되는 등 교회분열 해소 역사의 큰 발자취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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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

하지만 20세기 개신교-정교회 측에서 벌여온 WCC를 주축으로 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이 항상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냉전 시기에 에큐메니컬 운동은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 사이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항상 진의를 의심받았다. 특히 공산권 국가들의 통치 하에 있었던 정교회의 WCC 가입은 서구권의 자유주의 국가들의 일부 신학자 및 평신도들을 자극하였고,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yre) 와 같은 보수적인 근본주의 개신교 목사들은 사회주의 정부의 사주를 받은 성직자들, 심지어 KGB 요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합법적으로 설파하기 위해 WCC에 적극 침투하여 WCC는 더 이상 교회 협의체가 아닌 용공(用共)단체일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였다.9

이러한 주장은 WCC의 활동과 행동 방식이 점차 진보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형태를 띄면서 힘을 얻게 되었다. 이는 권위주의 정부들과 이에 대한 저항 운동, 전쟁, 그리고 냉전이라는 특수한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더욱 돋보이게 되었는데, 특히 웁살라에서 있었던 4차 총회에서부터는 이러한 성격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WCC로 하여금 사회 참여와 경제 정의 문제에만 너무 경도(傾倒)되어 있다는 비판이 내부 복음주의자들로부터 나올 정도였다. 해방신학과 흑인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 등 사회주의적인 혁명과 유물론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 같은 여러 신학적 운동이 WCC를 매개로 하여 크게 신장되었고, 심지어 짐바브웨의 해방을 위해 사회주의 무장 단체인 애국전선(Patriotic Front)에 85,000 달러의 지원을 비롯한 각종 지원을 펼치면서 이제는 WCC가 과연 교회 일치를 위한 협의체가 맞는지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또한 WCC가 다른 종파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까지 열린 자세를 취하자 이를 심각한 배교, 종교 다원주의(多原主義)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주로 보수적인 개신 교회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 논란은 대한민국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WCC 7차 총회에서 이화여자대학교 정현경 교수의 기조강연 때문이었다. 정 교수는 기조강연 때 한국 무속 신앙의 초혼제(招魂祭) 형식을 빌려 억압받고 고통받은 영의 이름을 불러내었고, 이를 본 많은 인사들이 혼합주의와 다원주의에 대한 날선 비판을 쏟아내었다.10 이 일은 두고두고 WCC의 정체성 논란에 한 몫 담당하는 최대의 트라우마가 되고 말았다. 여전히 보수적인 근본주의자들은 WCC가 해악스러운 혼합주의와 상대주의에 따르면서 기독교의 절대성이 훼손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이 강하고, 남북 분단 상황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강한 반대 의식이 살아 있는 대한민국 기독교에서 득세했다. WCC 가입을 두고 대한민국 최대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갈라지게 된 것이 1959년의 일이었다.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보수교단 측은 WCC 활동을 원색적으로 비난해 왔는데, 2013년 부산에서 열린 10차 총회를 앞두고 한국 기독교계 상황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특히 현재는 군소협의체로 전락해버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WCC가 열리는 박람회장 근처에서 반대집회를 개최하는 등 국내 기독교계는 양분이 된 상황 속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지속해야 했다.

WCC를 반대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원들의 반대 시위 장면 11

그런데 이러한 근본주의자들의 비슷한 주장은 WCC 뿐 아니라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대개혁의 위업을 이룩한 로마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그 중심에 성 비오 10세회(SSPX, Fraternitas Sacerdotalis Sancti Pii X)라는 가톨릭 단체가 있었다.12 프랑스 튈(Tulle)의 대주교였던 마르셀-프랑스와 르페브르(Marcel-François Lefebvre)가 중심이 되어 발족된 이 단체는 지극히 가톨릭 전통주의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이 1970년에 회를 설립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1969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승인한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 때문이었다. 새로운 미사 경본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담고 있었으며 예전의 미사와 상당히 많이 달라졌다. 이제 모든 가톨릭 교인들은 자국어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고, 벽에 붙은 제대를 바라보며 진행되던 미사는 이제 사제와 평신도들이 식탁과 같은 제대를 마주보고 둘러 서서 드리는 미사로 바뀌게 되었다.13 이러한 미사의 급진적인 변화는 가톨릭 전통주의자들로 하여금 미사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1970년 프리부르(Fribourg)의 주교인 프랑스와 샤리에르(François Charrière)에게 접근하여 스위스의 에콘(Écône)에 신학교 설립 승인을 요청했고, 이와 더불어 SSPX의 설립을 인준받았다. 보통 로마 가톨릭 교회 내의 신앙 단체는 몇 단계의 심사와 활동 기간을 거친 뒤에 정식 단체로 인준을 받게 되었으므로 처음 몇 년간은 교회의 감독 하에서 보수적인 신앙 단체로서 활동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프랑스 성직자들조차 르페브르의 신학과 그의 지도를 따르는 신학생들의 활동을 꺼림칙하게 여겼으며 트리덴티노 미사(Missa Tridentina)14에 집착하는 자들이라는 비판을 던지곤 했다.

주교관을 쓴 르페브르 대주교 15

이 모든 상황은 1974년 에콘의 신학교를 두 명의 벨기에 사제가 방문하게 되면서 급격하게 뒤집어지게 된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들의 신학이 너무나도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며 이는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에 가져다 준 해악의 산물이라는 논지의 글을 잡지에 기고하였다. 이로 인해 교회는 발칵 뒤집어지게 되었으며 프리부그의 주교 피에르 마미(Pierre Mamie)는 SSPX의 인준을 철회할 의향을 교황청에 전했고, 르페브르는 3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소환되었다. 결국 SSPX의 인준은 1975년에 철회되었고, 르페브르는 신학생들과 자신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항의하는 뜻에서 로마로 향했다. 그러나 교황청 사법기관은 르페브르의 항소를 기각했고 공의회의 가르침을 준수하라는 명을 받았다. 심지어 1976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공개적으로 르페브르 대주교를 비난했는데, 교황이 가톨릭 성직자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근 20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모든 상황은 SSPX로 하여금 로마 교회를 설득하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이들은 순명해야 할 로마 교황에 대적하여 트리덴티노 미사와 공의회 이전의 모든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치를 지키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1976년 12명에 대한 사제서품을 진행하였다. 이것으로 인해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무집행 정지 처분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대주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일들을 진행해 나갔다. 문제는 그의 나이가 많아서 그가 죽게 되면 SSPX는 주교 없이 활동하는 빈약한 단체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교 성성을 위한 좋은 구실이 만들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Iohannes Paulus II: 1978-2005)는 1983년 사도 헌장을 발표하여 기존의 교회 법전을 수정하였다. 또한 다양한 에큐메니컬 운동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다양한 기독교 교파 지도자들 뿐 아니라 힌두교, 시크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아프리카와 북미의 정령신앙, 신토, 조로아스터교, 바하이교 지도자들까지도 함께 모여 1986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아시시(Assisi)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금식 기도회를 가진 것이었다. SSPX는 교황의 이같은 조치에 크게 반발하였고, 르페브르 대주교는 1988년에 네 명의 사제를 주교로 전격 임명하였다. 이는 사도좌로부터의 자동 파문 조치에 해당하는 중대한 교회 분리 행위였다.

아시시에서 열린 세계 기도의 날. 각 종교의 수장들이 앉아있고 그 뒤에 각국의 언어로 '평화'라는 단어가 쓰여 있다. 16

SSPX의 활동은 로마 교황청의 골칫거리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지엄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물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또 그것이 사회의 요구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 내의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그 변화를 부정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컨대 SSPX의 존재는 전통과 개혁 사이에서 적절한 위치를 잡지 못하던 교황청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SSPX는 공공연히 자유주의와 현대주의를 공박했으며 로마 교황의 에큐메니컬 운동과 진보적인 신학적 변화를 거부하였다. 또한 이들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훼손하였으며 전례의 의미가 혁파되고 사제의 기능이 축소되었으며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의 오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했다.

SSPX와의 화해를 위해 가장 노력한 사람은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시절에 신앙교리성성의 장관이었던 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 2005-2013)였는데 그는 자의 교서를 내려 트리덴티노 미사를 전면 허용하는 조치를 취해 화해의 길을 터놓았다. 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서품된 네 명의 주교에 대한 자동 파문을 철회하는 조치를 단행했고, 많은 접촉이 잇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은 SSPX가 교도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성좌공위주의자라고 판단하였고, 2012년 3월에 SSPX로 최후통첩에 해당하는 서한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2012년 7월에 SSPX는 총회를 통해 자신들의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할 것이라는 것을 재확인하고 모든 대화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심지어 그 네 주교들 중 하나인 베르나르 펠레이(Bernard Fellay) 주교는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 2013~현재)를 가리켜 '진정한 현대주의자'라고 선언하는 등 로마 사도좌와의 결별을 확정하였다. 결국 SSPX는 인준받지 못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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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되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열매

하지만 WCC의 에큐메니컬 운동 정신, 그리고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 정신은 거부할 수 없는 교회 일치를 향한 열망을 더욱 자극하였고, 50년도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 교회의 개혁 및 일치 운동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결과 몇몇 교파의 경우 분열의 역사를 극복하고 하나의 교단 아래 뭉쳐지게 되었다. 또한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는 교리에 대한 공동 합의를 이끌어낸 것도 있고, 비록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을지라도 대화와 교류 자체만으로도 파격적이었던 그런 일들도 있었다.

서방 교회 내에서의 일치 운동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자면, 우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황무류성 교리에 반발하며 갈라져 나온 구 가톨릭 교회의 활동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구 가톨릭 교회는 태생적으로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Henry VIII)에 의해 탄생된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와 여러 가지로 흡사했다. 동일하게 주교제 교회로서 사도 전승을 주장하고, 교황 중심의 체제보다는 주교의 협의체 성격이 강한 느슨한 연합 형태 역시 비슷했다. 무엇보다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립되어 나왔다는 것이 가장 큰 유대감을 갖게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구 가톨릭 교회 결성을 위한 1870년대의 여러 모임들에서는 영국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참석하였고, 특히 이그나츠 폰 될링거(Ignaz von Dollinger)가 주도하여 본(Bonn)에서 열린 연합회의에서는 신학적인 측면에서 교리 일치와 화합을 위한 14개조 합의를 이뤄내는 등 큰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내 영국 교회 성직자들의 직제를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반대 의견이 대두되었고, 영국 내에서는 구 가톨릭 교회와의 연합이 복음주의적인 저교회(low church)측과 가톨릭적인 고교회(high church)측 모두에게서 반발을 사는 바람에 보다 진전된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속된 대화와 협의 끝에 1925년 네덜란드의 구 가톨릭 교회는 영국 교회의 사도 전승에 문제가 전혀 없다는 선언을 하였고, 이는 양 교회의 통합을 가로막았던 장애물이 최종적으로 제거가 되었음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1931년 7월 2일, 독일 본에서 8명의 영국 교회 대표와 4명의 구 가톨릭 교회 대표가 만나 두 교회가 상호 이해를 이루게 되었음을 선언하는 소위 '본 협정(Bonn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신학적인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가 공교회인 것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30년이 지난 1961년에는 직제까지도 인정하는 완전한 상통 단계가 되었고 본 연합은 필리핀과 스페인, 그리고 포르투갈에 세워진 독립 교회들과의 상통을 이루는 데에도 성공했다.

한편 영국 교회는 주변 지역, 특히 북유럽의 국가 교회를 형성하는 루터교와도 지속적인 대화를 시도하였다. 이미 1938년부터 시작된 이 대화는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활발하게 교류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것을 선언하는 수준에 다다르게 된다. 당시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를 나눈 성직자들은 핀란드의 포르보(Porvoo)의 성당에서 성찬례를 드렸고, 이로 인해 연합체의 이름을 '포르보 공동체(Porvoo Communion)'라고 부르게 되었다. 포르보 공동체에 가입하게 된 교회는 유럽 각 지역의 성공회 공동체 및 루터교 교회들이었고, 크게 북유럽 국가들(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발트 해 국가들(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그리고 성공회 교회(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로 구성되어 있었다. 포르보 연합을 기념하기 위해 1996년에는 북유럽에서는 노르웨이의 도시 트론헤임(Trondheim)에서, 발트 해에서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에서, 그리고 성공회 교회에서는 런던(London)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협정에 서명하는 기념 성찬례를 개최하였다.

한자리에 모인 포르보 연합의 주교단 17

구대륙 교회의 연합 움직임은 신대륙 교회의 연합 움직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개신교계의 연합과 일치 운동은 워낙 활발하여 여기에 다 싣기에는 벅찰 정도였는데 복음주의 계열의 개신교계와 회중주의 계열의 계신교계의 협력으로 1957년에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가 탄생하게 된 것은 대표적인 미국 내 교회 연합 일치 운동의 성과였다. 1997년에는 미국 루터교 연합이 장로교,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개혁주의 교회와 상통하기로 합의하였고, 1999년에는 마침내 미국 성공회 교회와 루터교가 비슷한 수준의 상통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2001년에는 캐나다의 성공회와 루터교가 완전한 상통을 이룩하는데 성공하여 워털루 선언문(Waterloo Declaration)을 공포하였다.

성공회 교회와 개신교의 연합은 상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성취되기도 했는데 바로 남인도 지역에서의 연합이었다. 남인도 지역에는 성공회 공동체였던 남인도, 버마, 실론 교회와 감리교, 장로교, 그리고 회중주의 교단이 연합하여 남인도 교회를 창설하였다. 복음주의 성격이 강한 성공회 형태로 재탄생한 남인도 교회는 교세가 급격히 불어나면서 인도에서 두 번째로 가장 큰 기독교 교단이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도 이러한 움직임에 가세했다. 비록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Hans Küng)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치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교회 일치를 위한 움직임이 좌절된 시기로 폄훼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중요한 일치 운동의 성과가 있었으니 바로 감리교와 루터교와 함께 작성한 '의화(義化)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문'이 그것이다. 수년간의 대화와 신학적인 고찰 끝에 이 세 교단은 1999년 10월 31일에 독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공동 선언문에 서명하였고 이 가르침에 대한 교리적 동의를 선언하였다. 비록 본질적인 면에서 완전히 동일한 것을 논한 것은 아니었고 아주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내놓은 공동 선언문이었으나 적어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교회들과의 합의를 통해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얻게 되었다.

한편 동방 교회 내에서도 일치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비록 비공식적이었지만 칼케돈 공의회로 인해 서로 분리된 단성론 교회, 곧 오리엔탈 정교회와 칼케돈파 동방 정교회간의 최초의 접촉이 1964년 덴마크의 오르후스(Århus)에서 성사되었다. 쟁점은 무려 1,600여년 전의 기독론으로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칼케돈 공의회의 해석을 어떻게 이해하고 인정할 것인가인데 구체적인 지도안이 이때 바로 나오지는 못하였으나 두 교회 모두 성인으로 인정하는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 키릴로스 1세의 가르침을 존중하여 이를 바탕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로도 비공식적인 접촉은 1967년 브리스틀(Bristol), 1970년 쥬네브(Genève), 그리고 1971년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에서 이뤄져 진전된 합의를 보였다.

그러다가 1985년에 스위스 쥬네브에서 역사적인 공식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서 양 교회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합동 위원회를 설치하기에 합의했고 1989년에는 이집트의 와디 엘 나트룬(وادي النطرون)의 성 피쇼이 수도원에서 최초의 협정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양 교회는 네스토리오스와 에우티케스의 신학을 배격하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분리된다든지 혹은 흡수되어 사라진다고 명시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협정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혼돈 없이, 변화 없이, 구분 없이, 분리 없이 연합하고 있다고 기술하여 해묵은 기독론 논쟁의 해결을 시도하였다.

이어 1990년에 쥬네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두번째 협정문과 사목적 현안에 대한 의견서가 발표됨으로서 연합을 위한 발걸음은 한층 더 빨라졌다. 최종적으로 1993년 상호 파문을 철회하기 위한 제안서가 결의되면서 양 교회의 갈등도 최종적으로 정리될 날이 머지 않게 되었다. 물론 현재까지 양 교회가 완전한 상통을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단성론'과 '황제파'라는 낙인을 찍어온 과거와의 단절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큰 진일보라고 여길 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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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회의 연합을 향한 길

장구(長久)한 동서교회 분열사의 마지막 장에서 드디어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 사이의 일치를 위한 대화를 다룬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전향적인 열린 자세를 취하게 되었고, 교황 요한 23세가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 평의회(Pontificium Consilium ad Unitatem christianorum Fovendam)을 설치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교회 일치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회 일치의 대상으로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한 중요한 상대방은 바로 동방 정교회였다. 이런 맥락에서 교황 바오로 6세는 예루살렘에서 세계총대주교 아티나고라스 1세(Αθηναγόρας Α': 1946-1972)를 만났으며 1965년에 1054년에 내려진 상호 파문을 철회하는 기념비적인 선언을 해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회성 쇼에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 1세(Δημήτριος Α': 1972-1991)와 함께 신학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2015년 현재까지 총 13번의 본회의가 세계 각처에서 아래와 같은 주제로 열렸다.

  1. 그리스 파트모스 및 로도스 섬. 1980년.
  2. 독일 뮌헨. 1982년.
  3. 그리스 크레타 섬. 1984년.
  4. 이탈리아 바리(Bari). 1987년.
  5. 핀란드 발라모 수도원(Valamon luostari). 1988년.
  6. 독일 프라이징(Freising). 1990년.
  7. 레바논 발라만드(Balamand). 1993년.
  8. 미국 에밋츠버그(Emmitsburg). 2000년.
  9.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2006년.
  10.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 2007년.
  11. 키프로스 파포스. 2009년.
  12. 스트리아 빈(Wien). 2010년.
  13. 요르단 암만(Amman). 2014년.

이 중에서 눈여겨 봐야 할 가장 중요한 합의가 우선 7차 회의였던 발라만드에서 이루어졌다. 발라만드 회의에서는 동방 정교회의 심기를 가장 많이 건드렸던 동방 가톨릭 교회의 활동에 관한 내용이 집중적으로 다뤄져 공동 합의문이 채택되었는데 12항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이 다소 완화되고 동방 정교회를 향한 존중을 나타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가 교회의 성사 가운데 맺는 관계를 고려하고 또한 자매 교회로서 서로를 인정하는 태도로 비추어볼 때 이런식의 '사도 선교구(使徒宣敎區)'를 설정함으로써 동방 가톨릭 교회를 세워나가는 방법은 교회의 연합 방식이나 혹은 모델로서 더 이상 추구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합의가 바로 10차 회의였던 라벤나에서 이뤄졌는데 교회 일치의 최대 쟁점이자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교회 일치의 필수 요건으로 삼았던 로마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합의 내용이었다. 46항으로 구성된 이 합의문의 41조부터는 교황 수위권에 대한 전향적인 동방 정교회의 자세를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41. 양측은 적법한 성직 서열이 분열이 없었던 교회 시대 전반에 인정되었음에 동의한다. 그리고 양측은 안티오케이아의 성 이그나티우스가 서간 '로마인들에게'의 서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로마가 사랑 안에서 치리하는 교회로서 이 서열의 첫 자리에 있었음에 동의한다. 또한 그러므로 로마의 주교가 총대주교들 사이에서 먼저(protos, πρωτος)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으뜸된 자로서의 로마 주교가 가진 특권에 대해 지난 첫 천년동안과는 달리 이해되어 온 역사적인 증거에 대한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42. 세계 공의회의 결정에 따르는 범 세계적인 공의회의 수위권은 주요 주교좌들의 수장이 되는 로마 주교가 그 자리에 모인 주교들과의 합의 하에서 수행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암시한다. 비록 로마의 주교는 초기 세계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그것을 개최한 적도 없었으나 그럼에도 공의회의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매우 긴밀히 관여하였다.

43. 교황과 공의회의 수위권은 상호 의존적이다. 따라서 각기 다른 교회의 삶의 수준들, 곧 동네, 지역, 세계 수준에서의 교황의 수위권이 공의회의 권위라는 맥락에서 항상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고 공의회의 수위권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수준에서의 수위권에 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자 한다.

  • 동네, 지역, 세계에서의 수위권은 교회의 적법한 전통에 확고하게 기초한 것이다.
  • 전세계적인 수준에서의 수위권이 동방과 서방에서 모두 받아들여질 때 거기에는 수위권이 어떻게 적용되는가, 그리고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기초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해는 서로 다르다.

44. 동서방 역사에서 최소한 9세기까지는 공의회의 맥락에서 시대적 특성에 따라 교계 구조 내에서 수장들이 가지는 여러 특권들이 인정되었다. 촌락의 수준에서 살펴보면 주교가 그의 교구 내에서 그의 밑에 있는 장로들과 평신도들에 대해서, 지역의 수준에서 살펴보면 수도대주교가 그의 관구에 속한 다른 주교들에 대해서, 또 다섯 총대주교들이 자신의 관할 하에 있는 수도대주교들에 대해서 특권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범 세계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로마의 주교가 총대주교들 사이에서 으뜸으로서 특권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모든 주교들의 성사적 동등성과 지역 교회들의 보편성을 훼손시키는 것이 아니다.

비록 동서교회의 교리와 전통이 많이 달라 이질적인 점이 많지만 완전한 상통에는 항상 교황의 수위권이 문제시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의 돌파구가 마련된 셈이었다. 10차 회의 이후로 현재까지 진행된 3차례의 본회의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합의를 중점적인 목표로 삼았으며 많은 상호 이해와 조정이 쌓여나가는 중에 있다. 비단 합동 위원회 뿐 아니라 다양한 방향에서의 협력과 방문,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한 친교가 동서교회 사이에서 날로 증대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교황 프란치스코의 즉위식에 세계총대주교인 바르톨로메오스 1세(Βαρθολομαίος Α': 1991-현재)가 참석한 것이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로 세계총대주교가 이스탄불(Istanbul)로 돌아가기 전에 가진 인터뷰에서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바람을 표현하려는 제스처'라고 밝히면서 동서교회의 우호 증진에 대한 기대감이 전에 없이 더욱 커졌다. 이에 화답하기로 하듯 교황 프란치스코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에 찾아가 자신과 로마 가톨릭 교회를 위한 축복을 청원하는가 하면 세계총대주교가 집전한 비잔티움 전례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2014년 12월에는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의 화합을 담은 공동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천 년도 훨씬 넘은 갈등을 종식시키자는 소망을 더욱 구체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교황 프란치스코에 입맞추는 세계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 18

바야흐로 현재는 동서교회의 화해무드가 역사상 그 어느때보다도 더 진하게 느껴지는 시기이다. 여기에는 열린 태도를 가진 로마 가톨릭 교황과 콘스탄티누폴리스 세계총대주교의 개인적 역량에도 관계하는 바가 깊으나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다툼과 폭력으로 얼룩진 분열의 역사를 치유하고 새로운 화합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희망과 비전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교회는 여전히 분열의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고 세상에 평화와 사랑을 증거해야 할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반목과 분란을 초래한다는 오명을 뒤집어 썼을 것이다.

그렇기에 에큐메니컬 운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더 활발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고, 아울러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온 기독교의 두 어른 격에 해당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새 천년기에 돌입한 이 시대에 바른 믿음(orthodox)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불의와 악습에 항거하여(protestant)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catholic) 사도적인 교회를 이루어나가는 데 앞장서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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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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