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uorF's Laboratory

go to the main page

웹사이트 소개

Introduction of the website

fluorF 소개

Introduction of fluorF

새로운 소식

News

하루 이야기

Daily essay

Articles

사진첩

Album

방명록

Guestbook

facebook_fluorF twitter_fluorF google+_fluorF linkedin_fluorF pinterest_fluorF

Articles

종교 2-24

Religion 2-24

동서교회 대분열 24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24

교황 비오 9세
Pope Pius IX


목차

  1. 구체제 복귀, 그리고 비오 9세
  2.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 선포
  3. 제1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황 무류성 교리 선포
  4. 다른 교단들의 반응과 구 가톨릭 교회의 형성
  5. 참고 사이트 및 출처

구체제 복귀, 그리고 비오 9세

루터의 종교 개혁을 시발점으로 하여 전유럽을 국제 전쟁의 무대로 만들어 버린 30년 전쟁 이후 유럽의 체제는 급격하게 변하게 되었다. 종교는 더 이상 국가의 정체와 동일시되는 개념이 아니었고, 제국들의 세속화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종교의 자유는 허용되었고, 서유럽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가지는 권능 역시 이전에 비하면 크게 감소하였다. 이제 엄숙한 종교의 영향력은 사라졌고, 그 자리를 위대한 철학자들과 혁명가들의 다양한 사상들이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유럽 세계를 가장 완벽하게 바꿔놓은 것은 뭐니뭐니해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필요없겠지만, 종교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프랑스 내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교황에게 순명해야 할 성직자들에게 공민 헌장 준수가 요구되었고, 혁명정부에 의한 교회 통제가 강화되었다. 성직자들에 대한 반감은 교회가 소유한 막대한 재산과 토지 때문만이 아니었고 신앙 그 자체에 대한 적개심도 불러일으켰다. 혁명정부는 신의 존재를 인정했으나 그것은 기독교의 신이 아니었고 이성(理性)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이 시기에 갖은 고초를 겪었으며 성모 마리아상은 끌어내려지고 자유의 여신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1793년부터 혁명정부에 의해 채택된 혁명력은 7일을 1주로 삼아 전례를 행하는 기독교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하는 그야말로 말 그대로 혁명적인 10진법 달력이었다. 교회는 문을 닫았고, 미사는 공공연히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신부들의 환속(還俗)이 장려되었다.

혁명으로 성립된 프랑스 제1공화국 당시 튈르리 궁(Palais des Tuileries)에서 열린 최고 존재의 제전(Culte de l'Être suprême) 1

로마 가톨릭 교회의 비극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으로 잠시 끝난 것처럼 보였다. 나폴레옹은 어수선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로마 교황과 타협한다. 1801년에 교황 비오 7세(Pius VII: 1800-1823)와 맺은 정교협약(政敎協約)에 따라 로마 가톨릭 교회는 프랑스 국민 다수가 믿는 종교의 지위를 회복했고, 교황의 주교 임명 및 폐위 권한도 어느 정도 복귀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교황과 가톨릭 교회에 혁명 이전에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권리와 특혜를 베풀 의도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이러한 협약의 부속 조치들을 통해 교묘하게 프랑스 교회를 국가의 통제 안에 넣으려고 했다.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성대한 대관식에 초청되었고, 이를 통해 과거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수여하던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길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와 같지 않았다. 우선 나폴레옹은 제관을 자기가 들어 스스로 썼다. 그리고 교황에게 로마가 아닌 아비뇽(Avignon)에 거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아비뇽이 어떤 도시인가. 지난날 교황들이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주저 앉았던 포로의 도시 아니었던가. 결국 교황과 새 프랑스 황제간의 관계는 다시 험악해졌고, 1808년 프랑스군은 교황령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교황의 군대는 한창 사기가 오른 프랑스 군대를 상대하기 역부족이었고 교황령은 모두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교황령은 일시적으로 폐지되었고, 교황은 사로잡혀 유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을 그린 그림. 샤를마뉴 대제 때와는 달리 교황은 대관식의 들러리로 그려져 있다. 2

그러나 나폴레옹 황제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고, 워털루 전쟁에서 패한 뒤 세인트 헬레나(St. Helena) 섬으로 영원히 유배를 떠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프랑스 제국은 해체되었고,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Metternich)가 활약한 1814년 빈(Wien) 회의는 나폴레옹 이전의 상태로의 회귀를 천명했다. 결국 구체제가 복귀됨에 따라 교황령은 복구되었고, 나폴레옹 치세 기간 동안에 온갖 수욕(受辱)을 경험한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부흥을 위해 힘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정치외교가들의 회의 결정사항만을 가지고 유럽을 몇십년 전으로 단순히 돌려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폴레옹 시기에 전 유럽에 퍼진 프랑스 혁명의 정신, 곧 유럽 열강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새로운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갈망은 점점 커져만 갔고, 노련한 빈 체제의 인물들이 하나둘씩 역사의 무대에서 은퇴하자 유럽 각국은 자유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대변혁을 맞이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운데에서 구체제를 대변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자유주의와 타협하며 개혁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에 맞서서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할 것인가. 가톨릭 교회의 순수성을 보수적으로 옹호하였던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 1831-1846)의 회칙 '미라리 워스(Mirari Vos)'를 보면, 당시 가톨릭 세계를 위협하였던 당대의 사조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전략) 지금 우리는 현재 교회가 마주한 또다른 악의 근원을 고려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무관심주의(indifferentism)입니다. 이 참람한 의견은 '도덕성만 유지된다면 어떠한 종교라도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특한 무리들에 의해 어느 곳에서나 확산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라고 한 증거는 구원의 안전한 피난처가 어느 종교인 누구에게나 열려있다고 꾸며내는 사람들을 두렵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며 그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 곧 불행히도 헤치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교회가 분열로 인해 셋으로 갈려졌던 당시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회유하는 집단에 대해 항상 목청껏 외쳤던 말을 들려주십시오.3 그는 "베드로좌를 위하는 편이 곧 내 편이다."… 이렇듯 부끄러운 무관심주의의 결과 '양심의 자유(liberty of conscience)는 모두에게 해당되어야 한다'라는 비정상적이고 오류투성이인 입장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인간이 진리의 좁은 길을 따르기 위해 필요한 그 모든 제한 조건들을 제거해 버린다면, 인간의 심성은 본디 악을 향해 기울어있는지라 사람을 더욱 망하게 부채질할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이 본 해를 가릴 정도로 연기가 올라온 무저갱이 열린 것이며 거기로부터 황충들이 나와 세상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게 되고 젊은이들은 타락하게 될 것이며 성스러운 것들과 거룩한 법을 경시하게 될 것인데 이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치명적인 역병과도 같습니다. 초기 역사의 경험으로 보아도 부와 권세, 그리고 영광으로 이름을 떨쳤던 도시들은 단 한 가지의 악으로 인해 멸망당했으니 그것은 바로 과도한 사상의 자유요, 자유 발언의 허가요,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와는 달리 그 다음 교황으로 선출된 비오 9세(Pius IX: 1846-1878)는 교황령을 보다 민주적으로 통치하는 자유주의의 선구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비오 9세는 당시 교황령에서 자유주의 운동을 기도하다가 연행된 많은 정치범들을 석방하는 대범합을 보이면서 여러 유럽 제국 군주들을 경악시켰는데, 석방된 이들이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재개하면서 탄압받던 자유주의 운동이 되살아 나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반도에 불어닥친 통일의 열망, 곧 리소르지멘토(Resorgimento) 운동이 고조되던 1848년, 통일 및 공화주의자들이 공포한 헌법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비오 9세의 적당한 수준에서의 타협은 그 해에 종말을 고하게 된다.

교황 비오 9세의 사진. 그는 당시 사람으로는 드물게 사진 촬영을 즐겼다고 한다. 4

본래 이탈리아 통일 운동은 다분히 민족주의적이었으며 또한 자유주의적이었다. 이들은 교황령 및 교황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교황령은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수복해야 할 땅이었다. 가톨릭 교회와 신앙심은 이 전쟁에서 아무런 가치를 갖거나 혹은 제공하지 않았고, 오직 오스트리아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강력한 통일 왕국을 만들겠다는 일념만이 반도를 휩쓸었다. 비오 9세도 이걸 몰랐던 바보는 아니었다. 비오 9세가 처음 교황좌에 올랐을 때 내린 회칙 '퀴 플루리비스(Qui Pluribis)'를 보면 전임 교황과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략) 친애하는 형제분들, 모두들 아시다시피 가톨릭 세계 전체를 향한 매우 힘겹고 두려운 전쟁이 무법자들의 연합에 의해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올바른 교의를 지키지도 않고 진실을 듣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둠으로부터 온갖 대단한 믿음들을 만들어내려고 그토록 노력하며 이를 통해 그들의 힘을 배가시키면서 보통 사람들에게 이러한 주장을 담은 출판물들을 뿌려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저리치면서 동시에 그들의 말도 안되는 오류와 해로운 방식, 계획에 우리를 비춰보며 아주 씁쓸한 아픔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진실과 빛에 대한 증오를 퍼뜨리기 위해 이같은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말로 속이기에 아주 능통한 이들은 신실한 신앙과 정의, 그리고 덕을 향한 사람들의 열정을 꺼뜨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으며 이를 통해 도덕을 타락시키고 모든 교회 및 세속의 법을 혼란 속에 빠뜨리려고 하며 심지어 가톨릭 교회와 시민 사회를 약화시키고 전복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종교의 성사들을 인간이 만들어 낸 거짓이라고 가르치며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 사회의 좋음과 특혜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습니다. 특별히 신실하지 못하고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오도하여 오류를 저지르게 하기 쉽게 하려고 그들은 자신들만이 번영으로 이끄는 일을 알고 있는 체 합니다. 그들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철학자의 이름을 내세웁니다. 그들은 마치 철학이라는 것은 자연계의 진실을 탐구하는 것으로서 자연의 최고로 자비로운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특별한 선물로서 인간에게 단순한 형태로 짜맞춰주신 그 진리들을 거부해야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오직 이러한 진리로서만이 인간은 행복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명백히 말도 안 되는 이런 극단적인 그럴듯한 주장들로써 이 원수들은 인간 이성의 힘과 우월성에 대해 호소하는 것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 이성을 그리스도의 거룩한 믿음을 대적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하며, 무모하게도 신앙이 인간 이성에 반하는 것이라고 떠들어댑니다.

교황 비오 9세는 리소르지멘토의 끝이 자신이 세속적으로 다스리는 교황령과 성좌가 위치한 사도 베드로의 도시, 곧 로마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교황은 무분별한 전쟁을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이탈리아인들의 전쟁에서 발을 빼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이는 급진적인 운동가들로 하여금 교황이 반민족적인 해악거리로 여기게 하기에 충분했다.

비오 9세가 결정적으로 자유주의자들에게서 등을 돌린 사건은 1848년 11월 15일에 발생했다. 교황령 통치 개혁을 위해 임명한 내무부 장관 펠레그리노 롯시(Pellegrino Rossi)가 의회가 처음 여는 날에 불의의 습격으로 암살당한 것이다. 당시 온건한 자유주의적 개혁을 꾀했던 이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없었다.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들은 이튿날 교황령을 지키는 스위스 용병들을 무장 해제시켜 로마를 접수할 야욕을 드러냈고, 이에 비오 9세는 로마를 탈출하여 양(兩)시칠리아 왕국의 영토였던 가에타(Gaeta)로 피신한다. 결국 자유주의자들은 1850년, 로마 공화국을 선포하고 이에 교황은 이들을 전부 파문 조치함으로 응수했다.

이때부터 교황 비오 9세의 입장은 완고한 보수주의로 선회하게 되었다. 교황은 펠레그리노 롯시가 사망한지 보름 정도 지난 뒤에 피신 상태에서 국무원장으로 부제급 추기경이었던 지아코모 안토넬리(Giacomo Antonelli)를 앉혔다. 이탈리아의 리슐리외(Richelieu)라고도 불린 그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군대를 설득하여 로마를 탈취한 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하게 하였으며, 로마를 되찾자 민주적인 정치 형태를 구현하겠다던 열강과의 약속과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약속을 내팽겨치고 교황 중심의 절대군주적 정치 체제를 복구해내는데 성공하였다.

▲ 목차로 돌아가기...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 선포

비오 9세는 신학적으로도 더욱 대담한 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1852년에 교황은 '인에페블레스 디오스(Ineffebles Dios,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라는 제하의 칙서를 내리는데 여기서 그는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린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를 믿을 만한 교의로 선포한다. '무염시태(無染始胎)'라고도 불리는 이 교의는 예수를 낳은 마리아가 태어날 때부터 원죄의 영향 없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믿음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지만, 19세기에 생뚱맞게 나온 것이 아니고 실은 동서교회 전역에서 오래 전부터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믿음이었다.

서방 교회에서는 원죄(original sin)가 생식을 통해 대를 이어 유전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원죄에 관한 죄론을 최초로 집대성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로, 그는 특히 성행위를 영이 육을 제어하지 못해 생겨난 충동에 의한 결과이며 이로 인해 생명이 태어났으므로 이것인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지은 죄가 이어지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은 이단으로 낙인찍힌 펠라기우스(Pelagius)와의 대결을 통해 더욱 대담해졌고, 이는 서방 교회의 뿌리깊은 교의로 굳어졌다. 서방 교회에서는 모든 인류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번식으로 태어난 그 모든 인간들은 연대적인 책임을 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거룩함과 정의로움을 잃어버리고 보편적인 혼란상태에 빠져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경우 참 신이자 참 인간인 예수를 낳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비록 마리아가 성령의 은총을 받아 예수를 잉태하긴 했지만 어쨌든 사람의 방식인 모태로서의 출생을 통해 예수가 태어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예수는 10달동안 마리아의 태중에 있었으며, 서방 교회의 '원죄와 번식'의 관계에 따라 예수 역시 마리아의 원죄를 이어받았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예수는 원칙적으로 죄가 없는 하느님이신데 여기서 발생하는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전통적으로 교회 교부들에서부터 종교개혁을 주장한 말틴 루터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학자들은 성모가 가지는 특수한 위치에 주목하였고 그가 특별한 은총을 받았음을 주장해 왔다. 인류를 대표하여 죄를 지은 아담에 대응하는 자가 인류를 대속한 예수 그리스도이듯, 그 아담의 배필로서 타락의 원흉이 되었던 하와에 대응하는 자가 바로 예수를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라는 주장은 이미 순교자로 칭송받은 성인 유스티누스(Iustinus)로부터 적어도 2세기부터 나왔다. 그리고 3세기에 이르러서는 마리아가 아예 죄가 없는 자로 여겨졌는데 로마의 신학자인 히폴리투스(Hippolytus)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기도 했다.

예수님은 썩지 않을 나무로 만들어진 방주이셨다. 이는 그의 장막(성모 마리아)이 오염과 부패로부터 구제되어있음을 말해 준다.

결국 마리아가 원죄 없이 태어난 생명이라면 그로부터 태어난 예수 역시 번식에 의한 죄를 타고나지 않을 것이므로 원죄 없이 태어나신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구세주의 탄생에 전혀 모순되지 않을 터였다. 사람들은 점차 마리아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게 죄 없이 태어나는 은총을 누렸다고 믿기 시작했고 그것을 교리처럼 믿고 따르게 되었다. 여기서 수도회의 하나인 프란치스코회의 설명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그들의 주장인즉 예수의 수태가 미리 결정되어 있는 은혜로 말미암아 마리아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죄사함의 권능이 선행적으로 마리아에게 임했다고 하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모든 서방 교회 신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옹호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와 아퀴노의 토마소(Tommaso) 등은 만일 마리아가 원죄 없이 태어났다고 해버리면 세상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예수의 구속 사역의 의미가 퇴색될 것이라고 보았다. 양측의 논란이 점차 거세지고 2월 28일에 있는 성모의 잉태 축일에 대한 명칭 논란이 확산되자 교황 식스토 4세(Sixtus IV: 1471-1484)는 어떠한 것도 로마 교화와 사도좌에 의해 결정된 것이 없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이에 관하여 논쟁하는 것을 엄금하였고, 이러한 유보적인 태도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문에서도 나타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신심은 더욱 깊어갔다.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 1700-1721)는 급기야 성모 탄생 축일을 모든 성도들이 반드시 미사에 참석해야 할 날로 승격시키기에 이른다.

가톨릭 교인들의 원죄 없는 잉태인 성모 마리아 공경은 종교 개혁 시기에 더욱 더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왜냐하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주장하는 종교 개혁자들은 그리스도교에서 공경 받아온 마리아의 위치를 일반 평신도와 같은 정도로 격하시켰기 때문이었다.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마리아는 우리들과 똑같은 인간이었지만 오직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를 잉태하여 낳았고, 이는 마리아의 원죄와는 상관 없는 신의 주권적인 권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더욱이 종교 개혁 신학자들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부정하였고,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형제들은 전승대로 예수의 친척 혹은 배다른 형제들이 아니라 예수 탄생 후 요셉과 마리아에 부부관계를 통해 낳은 친형제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종교 개혁자들의 마리아 부정은 신실한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와 신도들을 크게 자극하였으며 반대 급부로 마리아에 대한 공경심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페인의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가 그린 원죄 없는 마리아의 잉태 5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8세기 이후는 보수적인 가톨릭 전통에 반발하는 사상이 판을 치고 있던 시기였다. 이에 많은 가톨릭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이 위기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가톨릭만의 확고한 신학적인 토대를 확립하여 이를 강조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고, 그 근원을 하느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에게서 찾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16세 재위 시절부터 각국의 주교들로부터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교의로 채택해달라는 탄원이 빗발치기 시작했고 1839년에 신학 교수인 마리아노 스파다(Mariano Spada)는 이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토마소의 의견을 해석하는 논집을 출판함으로서 원죄 없는 잉태를 인정하는 것이 천사적인 교회박사로 칭송받는 토마소의 의견과 배치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논리적으로 설파했다.

어렸을 때부터 성모에 대한 신심이 탁월했다고 알려진 교황 비오 9세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원회를 설치하여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해 자세하게 연구할 것을 명했으며, 결국 1854년에는 칙서를 내려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가톨릭 신자들이 믿어야 할 정식 교의로 장엄하게 선언하였다.

성령의 감동하심에 의해 거룩하고 나뉘어지지 않을 삼위일체의 영광과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동정녀의 영광, 보편된 신앙의 존귀, 보편 교회의 확장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복된 사도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우리의 권위에 따라 다음과 같은 교리를 선포하고 공언하며 정의하노니, 곧 가장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그녀가 잉태되었을 가장 첫 시점에서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각별한 은총과 특권에 힘입어 우리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원죄의 그 모든 오점으로부터 보호받으셨다는 것으로, 이 교의는 하느님에 의해 계시되었고 모든 성도들에 의해 굳건하고 지속적으로 신봉되어온 것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하느님께서 금지하시는바 우리가 정의한 것과는 달리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정죄받았다는 것을 알게 해 줄 것이다. 곧 그는 신앙의 표류로 인해 고통받을 것이며 일치된 교회로부터 분리될 것이며, 더 나아가 만일 그 마음에 품은바 오류를 말이나 저작으로 바깥에 표현해내게 된다면 그 행동으로 인해 그는 법에 의해 정해진 처벌을 받게될 것이다.

원죄 없는 잉태 교리의 선언은 당시까지의 교리 정립 형태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권위 있는 주교가 회칙이나 의견 개진을 통해 믿을 만한 사항들을 주장하고 이에 대한 논의 끝에 다수의 결정에 의해 내재적인 규칙을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전체 신도들이 지켜야 할 교리에 관한 보편적 사항에 관한 문제라면 응당 공의회를 개최해서 논의에 부쳤을 것이었다. 그러나 원죄 없는 잉태 교리는 비록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의 치열한 연구가 뒷받침되긴 하였지만, 교황 한 사람의 칙서로 인해 직권적으로 장엄하게 선포된 교리였다. 물론 대다수의 로마 가톨릭 주교들은 이에 동의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위원회의 활동 때부터 교황의 관련 교리 선포는 기정사실이었고, 이미 서방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원죄 없는 잉태를 믿어 왔으며 오래전부터 기려왔기 때문이었다.

어이 없다는 반응은 동방 교회와 종교 개혁으로 탄생한 개신 교회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선 개신교의 경우 교황의 수위권과 전승을 전혀 믿지 않고 특히 성모 마리아의 지위를 특별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죄 없는 잉태는 말도 안 되는 억지요 이단적인 주장이라고 일축하였다. 동방 교회의 경우 원죄의 개념이 서방 교회와는 달라서 '번식'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동방 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원죄를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본죄, 곧 살면서 짓는 자범죄(自犯罪)를 가지지는 않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원죄 없는 잉태 교리에서 주장하는 마리아의 성별 시점은 그의 어머니 모태에서 수태되던 때가 아니라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고지를 받았을 때로 여겼다. 이 논리에 따르면 원죄 없는 잉태는 불필요한 교리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의미를 떨어뜨리는 해악한 설명이었다. 저명한 동방 교회 신학자인 블라디미르 로스키(Владимир Лосский)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그의 잉태와 탄생이 모두 교회의 축일이 되는 성인 세례자 요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정녀 마리아 역시 원죄의 법 아래 태어나셨으며 모든 인류와 함께 타락에 대한 연대 책무를 지고 계신다.

결국 원죄 없는 잉태 교리 선포는 로마 가톨릭 입장에서 보면 성모에 대한 공경심을 강화하는 한편 가톨릭의 정체성을 세우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반면, 교황에 의해 선포된 그리스도교 전체가 인정하지 않는 교리의 창시였기 때문에 다른 교회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비오 9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큰 한방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 목차로 돌아가기...

제1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황 무류성 교리 선포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교황의 입장은 1864년 원죄 없는 잉태 축일에 내린 회칙 실라부스 에로룸(Syllabus Errorum)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가톨릭 신앙에 반하는 사상가들의 주장들을 인용의 형식으로 몇 구절씩 따와 80개의 목록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에는 범신론(凡神論), 합리주의, 무차별주의, 관용주의와 같은 다른 신학적 관점 외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있었으며 이를 통해 교회와 교권, 그리스도교 도덕관념 전반에 대한 고전적인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비오 9세는 가톨릭 교회가 세속적 죄악이 일으킨 이 전쟁에서 무너지지 말아야한다고 강력하게 믿고 있었다.

비오 9세가 주도한 보수적인 분위기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추기경단 및 주교단들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들 주교들은 위축되어가는 교세를 바라보며 위기의식을 느꼈고, 이런 상황에서 결국 의지할 것은 모든 양떼를 돌보는 목자,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믿고 있던 교황의 권위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보수적인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이 한뜻으로 뭉치면서 점차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인식은 한층 강화 혹은 과격해졌고, 이 와중에 교황무류성(敎皇無謬性)에 대한 논의가 생겨나기 시작헸다. 교황무류성이란 교황이 신앙에 관하여 선언할 때에는 오류가 없다는 특권을 말한다.

이러한 흐름은 소위 울트라몬타니즘(ultramontanism)6이라고 불리운 교황중심주의(敎皇中心主義)의 정점에 해당하는 주장이었다. 사실 교황무류성이 대한 논의는 이미 13세기부터 제기되어오고 있었지만 19세기의 이 위기의 시대에 맞물려 교황중심주의자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프랑스 신학자들은 갈리아주의(Gallicanism)에 어느정도 뜻을 두고 있었고, 독일 신학자들은 비오 9세의 회칙들마저 못마땅하게 여길 정도로 보수적인 그런 주장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은 혹여나 교황무류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공적으로 다뤄질까봐 노심초사했는데, 비록 인구는 적더라도 남유럽 지역의 주교 숫자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교황 중심의 보수적인 의견이 정론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무척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1868년에 비오 9세가 교서를 내려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했을때 교황무류성에 대한 논의만큼은 여기서 다루지 말아달라고 간청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869년, 바티칸에서 열린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 교황무류성은 정식 의제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원래 바티칸 공의회는 시대적 흐름에 반격하기 위해 교회 내부 및 외부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트리엔트 공의회로부터 무려 300여년이나 지난 뒤에 열린 최대규모의 가톨릭 세계 공의회였으나 교황무류성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공의회가 다루는 논제들의 범위는 급격히 축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교항무류성에 관한 논의는 교황중심주의자들의 논리대로 흘러가게 되었다.

교황중심주의자들의 최대 적수는 알프스 이북 지역에 있는 유력한 신학자들이었다. 이미 17세기 프랑스 신학자였던 아베 프랑수아-필리프 메젱기(Abbé François-Philip Mesenguy)나 독일의 마인츠 대학 교수였던 펠릭스 브라우(Felix Brau) 등은 교황무류성에 대한 반대를 일찌감치 표명했단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던 뛰어난 교회사가이자 로텐부르크(Rottenburg)의 주교였던 카를 요세프 폰 헤펠레(Karl Josef von Hefele)나 오를레앙(Orléans)의 주교였던 펠릭스 뒤팡루(Félix Dupanloup), 파리의 대주교였던 조르주 다르봐(Georges Darvoy) 등도 교황 무류성에 대해 논박하고 반대표를 던진 대표적인 독일, 프랑스 성직자들이었다. 그러나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던 당시 수많은 공개서한 등을 통해 격렬하게 교황무류성을 반대한 신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독일의 요한 요제프 이그나츠 폰 될링거(Johann Joseph Ignaz von Döllinger)였다.

가톨릭 사제이자 교회사 교수였던 될링거는 원래 기존 교황제에 대해 긍정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비오 9세와 주변 성직자단의 일사불란한 영도 하에 진행되는 지나친 교황중심주의에 대해 경계하는 입장을 가지게 되었고, 과연 현실과 이상이 다르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었다. 더욱이 비오 9세가 칙서를 내려 '원죄 없는 잉태'를 믿어야 할 교리로 선포하는 것을 보면서 교황중심주의 위주의 교황제 교회 구조에는 문제가 있다는 확신을 굳게 가지게 되었고 1864년에 내린 회칙을 읽어보면서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그는 '야누스(Janus)'라는 가명으로 '교황과 공의회(Der Papst und das Konzil)'이라는 책을 출판하는데 바티칸이 이를 금서 목록으로 재빨리 지정할 정도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엄중한 비판을 가하는 책이었다. 그럼에도 바티칸에서 열린 공의회가 교황 무류성을 인준하는 절차를 밟게 될 것을 내다보았던 될링거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신학자들과 함께 익명의 편지 형태의 출판물을 제작하여 자신의 생각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처음에는 야누스였던 가명은 이제 퀴리누스(Quirinus)로 바뀌었으며 교황 무류성이 현대의 사상과는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교리라는 것을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될링거의 사진 7

하지만 교황중심주의자들의 노력은 끈질겼다. 결국 1870년 7월 13일 중간 표결에서 주교들 중 451명이 찬성, 88명이 반대, 그리고 62명이 조건부 찬성에 표를 던졌다. 압도적인 표 차이는 반대파로 하여금 결국 비오 9세와 그 무리들이 어떻게 해서든 이 교황무류성 교리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게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낳게 해 주었다. 교황 무류성을 반대하는 주교들 중 일부는 어차피 여기에 있어봐야 교황무류성 교리를 승인하는 거수기 역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크게 좌절하였고, 그러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것인지 60여명 정도가 교황의 허락을 받고 바티칸에서 빠져 나갔다. 모든 회의가 마치고 닷새 뒤 열린 마지막 표결에서 총 435명의 주교들 중 단 2명의 주교 ㅡ 알로시오 리치오(Alosio Riccio)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Edward Fitzgerald) ㅡ 만이 반대표를 던지고 나머지 433명은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반대한 두 명의 주교들도 표결 결과에 승복함에 따라 교황무류성 교리는 정식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가 되었다. 공의회의 결과로 나온 사도 헌장 '파스토르 아이테르누스(Pastor Aeternus)'에 따르면 교황 무류성 교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로마 교황이 교좌에서 선언할 때,8 즉 모든 신자들의 목자요 교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사도적 최고 권위로써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전체 교회가 지킬 것으로 정의할 때, 하느님이 베드로에게 허락하신 대로 무류성을 가지며 교황의 이런 결정은 교회의 동의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 자체로써 변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로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보편 교회에 대한 사목권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 변개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의 교의 자체까지도 자신의 권위를 통해 확정할 수 있는 권리를 보증받게 되었다.

▲ 목차로 돌아가기...

다른 교단들의 반응과 구 가톨릭 교회의 형성

교황무류성 교리의 선포는 로마 가톨릭을 제외한 전 교단에서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개신교의 경우 교황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교황무류성 교리는 그야말로 터무니 없는 발악으로 여겨졌으며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참람된 언사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종교개혁 시기에 나온 수많은 신앙고백서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심지어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할 정도로 다음과 같이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교회의 다른 머리가 없다. 로마의 교황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것의 머리가 될 수 없고,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또 하나님이라 불리는 모든 것을 대항하여 교회 안에서 자신을 높이는 저 적그리스도요 죄의 사람과 멸망의 아들이다. (25장 6조)

영국 교회의 신앙 고백서인 39개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교황의 무류성을 일체 배제한다.

그리스도의 가시적(可視的) 교회는 신실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순수한 말씀이 선포되며 성사들은 이에 필요한 것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바에 따라 성사가 올바르게 집행된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오키아 교회가 오류를 범했듯이 로마 교회도 행위와 예배 의식의 방법에서 만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에서도 오류를 범하였다.

한편 로마 가톨릭과 가장 유사한 계서제(階序制)를 채택하고 있는 동방 정교회 역시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인식이 달랐기에 여기에서 극단적으로 파생된 것이나 다름없는 교황무류성 교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방 정교회는 오직 오류가 없는 것이라고는 초기의 일곱 세계 공의회만을 인정했기 때문에 교황무류성은 그 자체로 이단적인 주장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반대 분위기는 로마 가톨릭 외부 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불거졌다. 특히 알프스 이북의 독일 지역에서 반발이 거셌다. 카를 헤펠레 주교마저 결국 교황 무류성 교리를 조건부로 승복하게 되면서 주요 주교단의 거부 움직임은 사그라드는 듯 했지만 신학자들과 일부 성직자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이미 콘스탄츠(Konstanz) 교구의 총대리였던 신학자이자 차부제였던 이그나츠 하인리히 폰 베센베르크(Ignaz Heinrich von Wessenberg)는 독일 국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전에 많은 일들을 이룩해 놓았고, 이러한 사상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 본(Bonn) 대학의 신학 교수들은 수많은 반대 모임과 책자 발행을 통해 로마 교회의 부당한 처사를 성토하였다. 1871년 봄에 뮌헨(München)에서는 영국 교회와 개신교회 신학자들까지 모인 대규모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서 교황무류성 및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구 가톨릭 교회(Old Catholic Church)'를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여기서 이들이 '구(舊, old)'를 붙인 것은 교황 무류성 교리를 비롯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정통적인 옛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새로운 것이라는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들은 7개의 초대 세계 공의회와 초대 교부들 및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특히 11세기 이후, 곧 동서교회가 분열된 이후에 서방 교회에서 독자적으로 구축해 온 교리들 중 상당수 ㅡ 예를 들면 니케아 신경에 필리오케(filioque) 삽입 ㅡ 를 거부하였다. 특히 로마 가톨릭 교황과의 통교를 단절했으며, 당시에 당연하다고 여겨진 라틴어 미사 및 성직자 독신제를 폐지했는데 이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종교 개혁 운동이 강하게 불어 신교도들의 입지가 강했던 네덜란드, 독일 등지에서는 그렇게 파격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Utrecht)에 있는 성 헤르트루디스 성당(Sint-Gertrudiskathedraal). 이곳에 위트레흐트 대주교좌가 있다. 9

이들 구 가톨릭 교회는 위트레흐트 대주교를 수장으로 삼았고, 사도 전승에 문제 없이 주교를 삼으며 직제를 편성하여 독자적인 가톨릭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구 가톨릭 교회 운동은 네덜란드와 독일, 폴란드,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지에서 출발하여 각 유럽과 신대륙 각지로 확산되었다.

▲ 목차로 돌아가기...

참고 사이트 및 출처

▲ 목차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