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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21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종교 개혁
Counter-Reformation of Roman Catholic Church


목차

  1. 종교 개혁의 시작
  2.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격
  3. 트리엔트 공의회
  4. 참고 사이트 및 출처

종교 개혁의 시작

유럽 세계의 사실상 유일한 기독교로 남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콘스탄티노스 대제의 천도 이후 천 년 이상 고도로 발전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교황제와 계층적 관료제로 유럽 세계를 경영하였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교황, 그리고 그 교황에게 순명(順命)하기를 서약하는 전 세계의 주교들의 관계는 절대 왕정의 군주와 종신 충성 계약을 맺는 지방 영주들의 그것과 흡사했다. 교황 권력은 교황령의 성립과 함께 급상승했고,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으나 교황의 수위권은 바젤(Basel) 공의회로 대표되는 공의회 수위설의 공격을 견뎌내고 온전히 지켜질 수 있었다.

그러나 공의회 수위설이 그리도 매섭게 교황의 권력을 위협했던 것이 과연 사람들이 교황 한 사람만을 싫어했기 때문이었을까? 기실 그것은 초대 교회가 설립된 지 1,500여년이 지나면서 교회 내부에 쌓인 온갖 모순들에 대한 항거였고, 교회의 대안을 요구하는 하나의 거대한 개혁 운동의 한 부분이었다. 서구 대이교와 대립 교황들간의 대결, 그리고 십자군 전쟁의 실패 등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신의 이름으로 진행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교회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교황의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신자들에게 강요된 그 모든 교의와 의식, 아니 로마 가톨릭 자체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 변화와 기술의 발전이 큰 영향을 끼쳤다.1 유럽 사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 봉건 사회가 아닌 절대 왕정 하의 '국가' 개념이 충실한 사회에 진입하고 있었고, 상업과 기술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신흥 계급이 형성되었다. 르네상스 시기의 수많은 인문학자들은 과거 그리스 사상의 재발견을 통해 기존의 관념과 교회를 통렬히 비판했고, 잘못된 교회의 관행과 전통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종교 개혁 시기의 가장 큰 인물, 말틴 루터 2

종교 개혁의 선구자로는 이미 앞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얀 후스(Jan Hus),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격정적인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발도파 교회를 창시한 프랑스의 상인 피에르 발데(Pierre Valdès) 등이 있으나 아무래도 가장 유명하고 또 의미 있는 종교 개혁의 상징 인물로는 독일의 수도 사제였던 말틴 루터(Martin Luther)를 들 수 밖에 없다. 그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당 북쪽 문에 게시한 95개조의 반박문은 활자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유럽 전역에서 읽히게 되었고, 교황의 압제와 가톨릭 교회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이에 맞서려던 지식인들과 독일 제후들에게 큰 지지를 받게 되었다. 말틴 루터는 원래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교회를 창시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으나 잦은 논쟁과 반박을 거치면서 점차 과격성을 띠게 되었고, 점차 가톨릭과는 타협 불가능한 수준의 주장을 정립하는 데 이르게 되었는데 결국 이로부터 루터의 가르침을 받드는 루터교회(Lutheran Church)가 탄생하게 된다. 그의 신앙은 필리프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의 도움으로 작성되어 1530년 카를 5세(Karl V)에게 정식으로 올려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Augusburger Konfession)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말틴 루터가 당긴 종교 개혁의 불길은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 보다 자유로웠던 스위스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장 칼뱅(Jean Calvin)의 엄격한 종교 개혁이 진행되었다. 특히 기독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라는 책을 통해 개혁주의 사상을 집대성한 칼뱅의 영향은 지대했으며 각지에 칼뱅의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를 주창하는 개혁 교회(Reformed Church)가 세워지게 된다. 그리고 스위스에서 개혁주의로 무장하여 스코틀랜드로 건너한 존 녹스(John Knox)는 본국에서 장로교(Presbyterian Church)를 창시하였다. 칼뱅을 따르는 개혁주의 사상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er Katechismus), 벨직 신앙고백 혹은 네덜란드 신앙고백(Nederlandse Geloofsbelijdenis), 도르트 신경(Dordtse Leerregels)에 잘 나타나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는 현대 장로교의 표준 신앙고백 문서로 손꼽히고 있다.

잉글랜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와 겹쳐지면서 '재혼을 위해 종교를 바꾼 것에 불과한' 종교 개혁이라는 비아냥을 사긴 했으나 당시 영국 성직자들의 교회 개혁을 향한 열망은 분명하였다.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교회의 수장을 영국의 왕으로 삼은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는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였던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영도 하에 교회의 예전을 개혁하였고 라틴어로만 시행되던 모든 기도와 전례 언어를 영어로 바꾸는 혁신을 단행하였다. 비록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리는 메리 1세(Mary I) 재위 시절에 잉글랜드 교회는 엄청난 탄압을 받았으나 뒤이어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때 국교회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 안정된 발전을 이룩하기에 이르렀다. 잉글랜드 교회의 사상은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매슈 파커(Matthew Parker)에 의해 저술된 종교에 관한 39개조(Thirty-Nine Articles of Religion)에 집약되어 있다. 잉글랜드 교회는 대영 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동아시아권에는 거룩하고(聖) 공번된(公) 교회라는 뜻에서 성공회(聖公會, Anglican Church)라고 불리게 되었다.

국가 및 세속 정권들의 비호 아래 안정되게 세력을 구축한 이들 신교(新敎) 곧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 이외에도 다양한 개혁 운동이 벌어졌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재세례파(再洗禮派, Anabaptists)였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였고, 사람의 평등을 강조하였으며, 국가의 개념조차 부정할 정도로 다소 극단적이고 과격한 개혁세력이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뿐 아니라 같은 개신교도들도 이들의 신앙에 비판을 가할 정도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개혁 운동이 과거에도 늘 있었던, 잠깐 나타났다가 곧 사라질 열정적 구호만 가득찬 떠벌이들의 모임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리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지역에서 말틴 루터에 호응하는 유력한 제후 세력이 점차 많아지게 되자 이에 적잖이 당황하게 되었다. 결국 로마 교회는 팔을 걷어붙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결 방법이랄 것이 별로 새로울 게 없었다. 그때까지 가톨릭 교회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품는 자를 종교 재판소에 세워 이단으로 낙인찍은 뒤 화형시키는 식의 단순한 처결에 익숙했다. 이러한 대응 방식은 세속 군주들과 학자들은 물론 교회 내부의 사람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는데, 그 중에는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와 같이 화형당한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종교가 결정할 수 없는 자연과학적 사실과 사상에 대해서조차 이러한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 가톨릭 교회가 다른 신학적인 생각에 대해 관용을 베풀리 없었다. 이미 알비파와 후스파를 상대로 한 십자군을 일으킬 정도로 이단 싹쓸이에 열을 올렸던 교황청은 결국 말틴 루터를 최종적으로 파문에 처하고 정죄하였다.

그러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모순점은 교회 내부적으로 뿐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너무나도 심각하게 드러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당시 교황청의 파탄난 재정이었다. 보르자(Borgia) 가문 출신으로서 교회의 영적 지도자라고 불리기에는 차라리 유능한 세속 행정가가 더 어울리는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 1492-1503)는 이제까지 사람들이 지상 어느 정권에서도 미처 보지 못했던 족벌주의(族閥主義)의 끝을 보여줬으며, 율리오 2세(Iulius II: 1503-1513)는 전사 교황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군사력을 일으켜 주변 도시들을 정복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리고 메디치(Medici) 가문 출신인 레오 10세(Leo X: 1513-1521)에 이르러 이 족벌주의와 전쟁은 교묘히 결합되었고, 안 그래도 자선 활동이 많았던 레오 10세 치세에 결국 교황청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미국 드라마 '보르자(The Borgias)'의 스틸컷. 가운데 교황이 바로 알렉센데르 6세이며 그의 자녀들 중 유명한 체사레 보르자, 루크레치아 보르자 역시 사진에 등장한다. 3

이런 교황청의 상태를 완전하게 파멸시킨 사건이 1527년에 벌어진 로마 약탈(Saco di Roma) 사건이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1523-1534)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는 신성 로마 제국에 반대하는 외교 정책을 펼치다가 카를 5세의 분노를 샀고, 결국 황제가 이끄는 군대가 로마를 함락시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황제군의 상당수는 루터교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 세력을 심판해야 할 상대로 여겼고, 그들의 성지인 로마를 결코 가만히 두지 않았다. 온 지역에서 학살이 일어났고, 르네상스 시기 화려했던 건물들은 파괴되었으며 도무지 재건될 수 없으리라 여겨질 정도로 도시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카를 5세가 가톨릭 국가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음에도 교황청에 대해서는 때로는 협력하면서도 때로는 로마 약탈에서 보여주듯 교황에 대적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다. 그는 종교 개혁가들에게도 기회를 주었으며, 나라의 분열과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 종교 정책을 극단적인 형태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물론 후반기에 가서는 카를 5세도 가톨릭 측에 서서 개신교도들을 핍박하는 데 열을 올렸지만, 카를 5세의 세속적인 군주로서의 면모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이제 예전과 같은 중세 시절의 가톨릭 교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한 목자의 지도 아래 움직이는 양떼와 같은 그 옛날 이상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교황청은 너무 부패해 있었고, 이러한 부패의 정점에 서 있는 교황의 치리를 분명하게 반대하는 종교 개혁자들의 부르짖음은 알프스 산맥 너머에 있는 나라들로 하여금 가톨릭 교회에서 이탈하게 만들었으며, 교황 역시 그러한 불손한 움직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개혁을 요구했던 종교 개혁이 '분립'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세속 국가의 영토와도 어느 정도 연계가 되자 가톨릭 교회의 입지는 (예전에 비해) 좁아지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수세(守勢)에 몰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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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격

어떤 세력이 수세에 처하게 되면 서로 다른 두 가지의 태도를 가지고 맞대응할 수 있다. 먼저,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상황을 직시하고 그 탓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인정한 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양보하고 타협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현실도피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도 있는데, 마치 나는 옳고 괜찮고 잘 나가야 하는데 주변 상황들이 이상해서, 세상이 악하고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발생했노라고 선언하며 칼끝을 더욱 매섭게 갈 수도 있다.

살라망카 대학(Universidad de Salamanca) 정문에 있는 가톨릭 양왕의 부조 4

궁지에 몰린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후자의 태도를 택했다. 그들의 대응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15세기 말 이베리아(Iberia) 반도로 눈을 돌려보자. 당시 카스티야(Castilla) 왕국의 여왕 이사벨라(Isabela)와 아라곤(Aragón) 왕국의 왕 페르디난드(Ferdinand)가 결혼함으로써 형성된 통일 에스파냐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한동안 융성했던 이슬람 왕국을 차례로 격파하였고 1492년 마지막으로 남았던 그라나다(Granada) 왕국마저 몰아냄으로써 이베리아 반도를 모두 기독교도들의 영토로 재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를 재정복이라는 뜻에서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불렀는데, 당시 두 왕은 가톨릭 양왕(Los Reyes Católicos)이라고 불리며 교황청의 큰 신임을 받았다. 이 시기와 대항해시대가 맞물리게 되면서 스페인의 영향력은 유럽에서 거대해졌고, 카를로스 1세(Carlos I)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하게 되면서 ㅡ 그가 바로 앞에서 소개한 카를 5세 ㅡ 스페인은 전 유럽을 호령하는 거대 제국이 되었다.

심대하게 커진 정치적 영향력은 곧 종교적 영향력으로도 이어졌다. 이베리아 반도에는 유명한 지도자들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도원들이 각지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에스파냐 왕국의 섭정이자 유력한 지도자였던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Jimenez de Cisneros)는 성직자들의 독신을 강조하고 주거를 교구로 한정 짓는 등의 성직자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대학을 세우고 각종 강좌를 열었으며 성서를 번역하는 등 큰 일을 해냈다. 아빌라(Avila)에서는 테레사와 요한 등의 걸출한 수도원 지도자들이 배출되어 로마 가톨릭의 영성 개혁 운동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아쉽게도 이들은 당시 종교 개혁가들의 주장에 필적할 만큼의 논리성과 철학적 사유를 가지지 못했고, 따라서 당시 유럽에 들불처럼 번져대던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효과적으로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 운동은 신자 개개인의 내적 자정 운동, 곧 신비주의적 영성 체험 위주로 되어 있어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때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모순점을 해결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종교 개혁이 요구하는 것은 신앙의 섭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뿐 아니라 교회의 구조와 세속적인 문제점의 해결이었다는 것을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한계 상황에서 가톨릭 개혁의 주자로서 수도원주의자들이 아닌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와 그가 세운 예수회(Societas Iesu)가 역사 전반에 등장하게 된다. 예수회에서는 청빈생활과 독신, 선교활동, 그리고 상급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은 철저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수사 집단으로서 마치 군대와 같은 엄격한 질서를 이루면서 당시 위기에 처한 로마 가톨릭의 교리를 강하게 옹호하였다. 특히 예수회는 유럽 각 지역의 궁정 및 상류층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여 정치적으로도 깊게 연계가 되었고, 이러한 강력한 영향력을 토대로 개신교도들의 종교 개혁의 불길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아내기에 이른다. 또한 유럽 열강들의 세력이 뻗치기 시작한 식민지 지역에도 활발한 선교 사업을 벌여 유럽에서 잃은 가톨릭의 치리 영토를 배나 더 확장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우기도 하였다.5 이러한 예수회의 활동 역량은 종교 개혁에 대항하는 교황청에 큰 힘이 되어 주었으며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 1769-1774)가 해산령을 발하기까지 예수회는 로마 가톨릭의 해병대 역할을 자처하였다. 즉, 예수회의 개혁 운동은 교회 내부의 개혁이라기보다는 교회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개혁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예수회의 회원들은 보수적으로 교황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기존 교리 및 관습들을 옹호하였으며, 이러한 사상에 대해 대적하는 신교도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재세례파 교인이었던 안네켄 헨드릭스(Anneken Hendriks)의 화형 장면을 그린 판화 6

그런데 이 시기에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에스파냐 왕국에서 악명을 떨친 것이 바로 종교재판소(Inquisición)였다. 이단 심문을 위한 종교재판소는 옛날에도 있었으나 에스파냐 왕국은 정권을 안정시키고 국내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 종교재판소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처음에 스페인 종교재판소 심문 대상은 주로 유대인이었고 잔존하는 무슬림이었다. 특히 유대인은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와 더불어 당시 경제력을 쥐고 있던 유대인들의 이권을 박탈시키려는 시도와도 결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천년 만년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많은 이들이 처형당하거나 추방당하거나 개종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나니 이제는 개신교도들도 종교재판소의 처결 대상에 포함되었다. 카를 5세의 뒤를 이은 에스파냐 최전성기의 왕이었던 펠리페 2세(Felipe II)는 자신의 통치에 반발하는 신교도들로 구성된 플랑드르(Flandre), 네덜란드 지역에 매우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여기에 종교재판소를 설치, 가혹한 탄압 정책을 펼쳤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신교 탄압을 위한 종교재판소가 설치되었다고 전한다.

에스파냐 왕국으로부터 발흥한 일련의 상황들은 종교 개혁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분명히 루터가 종교 개혁의 불씨를 당기기 전과 그 직후만 해도 로마 가톨릭 교회 내부에는 교회의 모순과 문제점을 지적하며 철저한 회개와 개혁을 부르짖은 개혁의 선각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고, 이러한 움직임을 모두 불경하고 신성 모독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와중에 에스파냐 왕국이 황금시대를 열며 유럽의 최강국으로 성장하고 이러한 권력을 바탕으로 극렬히 보수적인 종교 정책을 펼치게 되자 로마 가톨릭 측은 이에 호응하였고, 교황의 수위권과 교회의 지상권을 옹호하기 위해 한 쪽에는 에스파냐 왕국을, 다른 한 쪽에는 예수회를 끼고 종교 개혁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팽창주의적이고 적대적인 자세를 취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결국 교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논의는 잊어버린 채 '저들이 틀린 것이다'라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고, 교회 내부의 문제를 문제가 아닌 실체로 인정하여 버리고 종교 개혁가들과 대결 구도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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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엔트 공의회

종교 개혁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적대적인 대응, 그리고 그 냉소적인 답변은 16세기 중반에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도시 트리엔트[Trient, 현재의 트렌토(trento)]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매우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실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때 진작 공의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했어야 했을테지만, 1414년부터 1418년동안 진행되었던 콘스탄츠(Konstanz) 공의회에서 장엄하게 선언된 공의회 수위설이 당시 교황들에게는 트라우마였던지라 종교 개혁 붐이 한창 일어날 당시에도 교황들은 공의회를 여는 것을 무척 꺼려했었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축소시킬까봐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가 1520년에 레오 10세의 교황 칙서를 불태워 버리며 이 모순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선 공의회 개최가 필요하다고 공식적으로 호소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독일의 제국 의회와 심지어 황제 카를 5세까지도 공의회에 대한 소망을 내비치자 교황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졌다.

그러니 언제까지나 공의회 개최를 회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 1534-1549)는 황제 카를 5세에게 종교 개혁으로 인한 분열상을 치유하고자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건의하였고, 카를 5세는 이를 받아들여 공의회 개최를 승인한다. 원래 공의회는 1537년에 이탈리아의 만투아(Mantua)에서 열릴 참이었다. 그러나 소위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 하에 있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성직자들을 공의회로 보내길 거부한데다가 당시 카를 5세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François I)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성직자들의 공의회 참석 역시 불가능하였다. 자연히 공의회 개최는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트리엔트 공의회 모습을 그린 그림 7

결국 공의회는 그로부터 8년이나 지난 1545년에서야 개회되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공의회의 진행은 순탄치 않았는데, 교황권을 보존하면서 교회를 자체적으로 개혁하려는 교황청의 의지와 타국의 성직자들의 전반적인 교계 개혁 의지가 충돌했기 떄문이었다. 결국 공의회는 양 방향에서의 개혁을 모두 다루는 기나긴 회의에 착수하였는데, 1547년 전염병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볼로냐(Bologna)로 회의장소가 이동한 뒤에는 논의가 급격히 위축되어 버리고 말았다. 중단된 공의회는 후임 교황인 율리오 3세(Iulius III: 1550-1555)에 의해 1551년에 다시 소집되었지만 이듬해에 작센의 선제후이자 루터교도였던 모리츠(Moritz)가 뜻밖에도 카를 5세를 격파하고 군사적 시위를 벌이게 되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참석자들이 회의에 소극적으로 임하게 되어 공의회는 중단되었다. 중단된 회의는 무려 10년이 지난 1562년에서야 교황 비오 4세(Pius IV: 1559-1565)에 의해 재개되었고, 집중적인 회의 끝에 이듬해 12월에 종료되어 결정된 교리를 확정하고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루터를 통해 촉발된 종교 개혁에 대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 떄문이다. 여러 결정 사항들이 있지만 종교 개혁가들의 주장과 완전히 배치되는 결정 사항들을 중심으로 살펴 보자.

  1. 성서의 정경(正經) 확립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과거 히에로니무스(Hieronymus)가 번역한 라틴어 성경, 곧 불가타(Vulgata)를 정경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구약 성서에서 종교 개혁가들이 인정한 정경과 다소 차이를 보이게 된다. 곧 마소라 본문에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는 구약 성서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보다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한 프로테스탄트와는 달리 로마 가톨릭은 소위 '외경(Apocrypha)'이라는 문서들도 제2경전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속하는 것은 에스더(에스텔) 추가 부분, 토빗, 유딧, 지혜서, 집회서, 바룩, 예레미야의 편지, 다니엘 추가 부분, 그리고 마카베오 상권/하권이다.8

  2. 의화(義化, justification) 교리의 확립 (1547년):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놓고 벌어진 당시 교리 논쟁에 대한 답이다. 의화 교리에 따르는 법령 1조에 따르면 하느님의 은혜 없이도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 마치 종교 개혁가들의 주장과 같아 보이지만 몇 가지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법령 17조에서는 의롭게 될 사람들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을 배격하는데 이는 예정설(豫定說)을 주장한 칼뱅과 반대되는 내용이다. 마찬가지로 법령 23조에서는 의화가 영원 무궁히 지속되므로 사람이 불의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자를 저주하는데 이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가 끝까지 그 의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칼뱅주의 원리와 배치되는 부분이다. 법령 29조는 고해성사 없이 믿음만으로 자범죄(自犯罪)가 사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고해성사 자체를 성사로 인정하지 않는 종교 개혁가들의 주장과는 다르다.

  3. 일곱 가지 성사(sacrament) 확립 (1547년): 관련 법령 1조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온 교회의 성사는 총 일곱 가지로 곧 세례, 견진,9 성찬,10 고해, 종부,11 신품, 그리고 혼배 성사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세례와 성찬만이 예수 그리스도가 정한 성사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나머지는 후대의 전통에 따른 예식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4.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의 확립 (1551년): 성찬식에 등장하는 면병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을 통해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화체설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확정되었다. 한편 종교 개혁가들은 저마다 이러한 성변화에 대한 입장이 모두 달랐는데 말틴 루터는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을, 울리히 츠빙글리는 기념설(memorialism), 장 칼뱅은 영적 임재설(pneumatic presence)을 주장하여 로마 가톨릭과는 다른 주장을 펼쳤다.12

  5. 단형 영성체 시행 (1562년): 단형 영성체란 일반 신자들에게 성찬을 거행할 때 면병만 주는 것을 말하며, 단형 영성체의 신학적 정당성을 확립하는 것은 성찬을 거행하는 사제들이 겪는 난처한 문제를 해소해 줄 수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웨이퍼 형태의 얇은 빵을 받아 먹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잔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경우 바닥이나 옷에 흘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모양이다. 이 경우 그리스도의 참된 피라고 선언된 포도주가 덧없이 뿌려지는 것이어서 매우 불경한 일들로 간주되었다.13 결국 서방 교회에서는 점차 성직자들에게는 양형 영성체를, 평신도에게는 단형 영성체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관습을 트리엔트 공의회에 와서야 비록 예수 그리스도가 지정한 성찬은 면병과 포도주로 행해졌음에도 그리스도는 온전하고 충만하시므로 둘 중 하나만으로도 유효한 참된 성사라는 교리를 확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얀 후스의 추종자로부터 꽤 오랜 기간동안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양형 영성체의 시행을 주장했고, 실제로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양형 영성체를 시행하고 있다.

  6. 미사에 희생 제사의 의미 확립 (1562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미사란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단에서 실제로 바쳐지는 희생 제사이며 이를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가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려 인간의 죄를 단 한번에 사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희생 제사는 무의미하며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29장에서는 희생 제사로서의 가톨릭 미사를 다음과 같은 어조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성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아버지께 바쳐지시는 것이 아니며,산 자들과 죽은 자들의 죄사함을 위해 결코 어떤 실제적 제사가 드려지는 것도 아니고,단지 단번에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자신을 바치신 그 한 사건을 기념하고,그 일 때문에 하나님께 모든 가능한 찬송을 영적으로 드리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에서의 소위 미사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 즉 택함받은 자들의 모든 죄들을 위한 유일한 속죄 제사에 대해 지 극히 가증스럽게 유해하다.14
    또다른 개혁 교회의 신앙 고백서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er Katechismus)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와 고난을 부인하는 것이며 저주받을 우상 숭배입니다.15

  7. 7품 확립과 독신 강조 (1563년): 로마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7개의 성직품을 확립하였는데, 성서에 등장하는 사제품, 부제품을 정했고 그 아래로 차부제품, 시종품, 구마품, 강경품, 수문품을 두었다. 이 중 사제 중에서 사도 전승을 받은 자들을 주교로 세워 구별되게 하였으며 특별한 상위 지위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만인제사장설을 신봉하는 프로테스탄트 분파는 이런 식으로 성직을 구분하지도 않고, 오히려 주교-사제-부제로 구성되는 삼중 성직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표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직에 오르는 사람들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하였는데 이러한 성직자의 독신 강조는 교회 안팎의 추문과 악질적인 풍습을 막고 교회의 도덕적인 기틀을 세우고자 하는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이는 성서에서 확립한 전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개신 교회들은 성직자의 독신을 강제하지 않았고, 마틴 루터 역시 로마 가톨릭 사제직을 내려놓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수녀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8. 성인 통공, 연옥, 성물 및 성화상 공경, 대사(大赦, indulgence) 교리 확립 (1563년): 마지막으로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 개혁가들이 성서적 진실성에 기반하여 근거가 없거나 비그리스도적인 일이라고 공박했던 가톨릭 전통적인 사상과 행동 양식들을 모두 확정적인 교리로 인정하였다.

결정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주로 '개혁 사항'이라고 쓰인 조항은 폐단이 지적되던 교회 내의 관습을 정리하고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오히려 대부분의 결정 사항들은 가톨릭의 전통적인 교리를 재확인하고 더 체계적으로 다듬어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트리엔트 공의회가 처음 개최된 이유, 곧 종교 개혁으로 인한 종교의 분열상을 해소하고 합의점과 개혁 방안을 찾아보자는 것에서 한참 멀어진 모습이었다. 오히려 모든 추인된 법령마다 프로테스탄트 운동가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라고 말하는 자는 저주받을 지어다(Anathema Sit)'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 개혁에 대한 반격이라는 의미에서 반종교 개혁(counter-reformation) 그 자체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결과적으로 종교 개혁을 불러 일으킨 당시 교회 내의 잘못된 구습들은 타파되었으나 정작 교계 구조의 모순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 특히 교리 문제의 경우 종교 개혁가들이 제기한 의문점이 전혀 고려되지 못한 채 기존의 관습이 이전보다 오히려 더 굳건하고 믿을 만한 교의로 선포되었는데 여기에는 공의회 말기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진 예수회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었다.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는 수구적인 태도가 공의회 전반을 휩쓸었고, 결과적으로 교리는 변한 게 없는, 그래서 변하는 세상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욱 보수화된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한편, 세상의 변화에 보수적으로 대응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태도는 300여년이 지난 뒤에도 되풀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1869년부터 1870년까지 있었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19세기 유럽은 종교 개혁가들의 프로테스탄트 운동보다도 훨씬 더 거대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상들의 등장으로 일대 변혁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그 때까지 유지되던 봉건적인 정치 체제가 허물어졌고, 산업 혁명을 통해 사회 환경은 급변하였다. 이 때 퍼진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물질주의는 기독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를 완전히 다르게 바꾸어버렸으며 1848년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집필한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은 로마 가톨릭이 수호해 왔고 전통적으로 가치를 두었던 그 모든 사회 이념과 생각에 대한 전복을 꾀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가 300년만에 연 공의회에서 내놓은 대답은 성모 평생 동정 교리와 교황 무류성(papal infalliability) 교리였다.16 이것은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인,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로마 가톨릭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24편에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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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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