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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2-2

Religion 2-2

동서교회 대분열 2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2

로마 교황의 수위권 주장
Claim of Papal Supremacy


목차

  1. 로마 제국의 혼란과 교황의 영향력 강화
  2. 알렉산드레이아 학파와 안티오케이아 학파의 대립
  3. 교황 레오 1세의 활약
  4. 참고 사이트 및 출처

로마 제국의 혼란과 교황의 영향력 강화

로마 제국은 3세기에 들어서면서 혼란의 시기를 맞았다. 이 시기 로마 제국 전역은 이민족의 침입, 내전, 역병, 그리고 경제 불황으로 고통을 겪었는데 이러한 환난의 가장 큰 원인은 235년부터 284년까지 이어진 불안한 정치 상황이었다. 이 시기는 ‘군인 황제(soldier emperor) 시대’ 혹은 ‘병영 황제(barracks emperor) 시대’라고 불리는 혼란기였다. 귀족층의 선출 및 옹립을 통해 황제가 세워지던 평화 시기와는 대조적으로 유력 장군이나 권세가들이 각지에 흩어져있던 사병화된 로마 군단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제위를 찬탈하던 그야말로 ‘막장’ 시대였다. 약 반 세기동안 스무명이 넘는 황제 및 공동 황제들이 난립했는데 그렇게 등극한 황제들의 재위는 대부분 길지 않았던 데다가 쿠데타, 암살 등으로 얼룩져 평안한 재위 말기를 가진 황제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러한 혼란기 속에서 로마 황제 체제에 반기를 든 팔미라 제국(Palmyrene Empire), 갈리아 제국(Gallic Empire)이 세워져 독립적인 체제를 구축하였고, 동시에 변방으로부터는 고트족, 프랑크족, 베두인족 등의 침입이 끊이지 않아 그야말로 로마 제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좌)디오클레티아누스1, (우)콘스탄티노스 1세2의 석상.

이러한 혼란기를 수습한 황제가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이다. 제국의 환난을 겨우 극복해낸 그는 전통적인 황제 중심의 제국 통치 체제를 회복하고자 했으나 돌이켜보니 그 옛날에 비해 로마 제국은 너무나도 광대해졌고, 비록 그러한 체제를 성공적으로 복구해낸다 하더라도 그가 죽은 후에 또 어떠한 일이 발생하여 나라가 뒤죽박죽이 될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황제의 귄력을 크게 두 사람에게 나누고 또 그것을 각각 둘씩 나누어 총 네 명의 황제가 나라를 사분(四分)하여 다스리는 체제를 고안했는데 이를 사두 정치 체제, 즉 테트라키아(tetrachia)라고 한다. 하지만 테트라키아는 혼란기를 수습하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했던지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살아있을 때에만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그의 사후 수립된 제2차 테트라키아는 빠르게 붕괴하였고, 제국은 다시 공동 황제들끼리의 내전에 신음하게 된다. 그 결과 서방의 정제(正帝, augustus)였던 콘스탄티노스 1세가 동방의 정제였던 리키니오스를 물리치고 로마 제국의 진정한 일인자가 된다. 그리고 그는 1장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수도를 서방 정제의 본부였던 밀라노에서 동방의 새로운 도시 비잔티온으로 옮긴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1세가 공동 황제 체제를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제국은 광대했고 문제가 많은 제국 전역을 혼자서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곤란했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콘스탄티노스 1세 이후로도 각 지역을 분할해서 다스리는 공동 황제들이 여럿 나왔고, 제국의 동방과 서방을 동시에 관장한 황제는 테오도시오스 1세(θεοδὀσιος Α΄)가 마지막이었다. 재위 말기에 테오도시오스 1세는 제국을 동서로 완전히 양분하기로 결정하고 첫째 아들인 아르카디오스(Αρκἀδιος)에게는 동방을, 둘째 아들인 호노리우스(Honorius)에게는 서방을 맡겼다. 그러나 서로마 지역에는 로마인들이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훈(Hun)족이 이미 제국 깊숙히 밀려 들어와 있었다. 황제는 로마인이었으나 실권은 게르만족이 쥐고 있었고, 땅에 떨어진 황제의 권위 너머로 서로마 제국의 국운은 기울어가고 있었다. 410년에 서고트족의 왕인 알라리쿠스 1세(Alaricus I)가 로마를 약탈하였고, 455년에는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왕국을 세운 반달(Vandal)족이 로마로 쳐들어와 조직적으로 로마의 재물을 약탈하는 등 서로마 제국은 멸망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로마를 약탈하는 게이세리쿠스. 이 때 반달족들은 로마의 문화예술품을 훼손하고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야만적인 소행으로 악명을 떨쳤으며 이로인해 반달리즘(vandalism)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카를 브률로프(Карл Брюллов)의 작품.3

이러한 정치적인 혼란과 강력한 전제 군주의 부재 속에서 로마 교황의 영향력은 오히려 확대되고 있었다. 황제의 지원을 받으며 권위를 세워 온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와는 달리 혼란스러운 서로마 제국의 현실에 휘말린 로마 교회는 외면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로로부터 계승된 정통 교회의 가르침을 이어온 유일한 교회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로마 교회는 이러한 혼란의 시기를 기회로 삼아 교리적으로는 교황이 보편 교회의 수위권을 가진 우두머리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라는 논리를 독자적으로 체계화하고 있었고, 정치외교적으로도 뛰어난 감각을 발휘하여 서로마에 난입한 게르만 민족들을 훌륭하게 포섭하기 시작했다. 로마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동로마 제국(이하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세속적 압제로부터 독립하고, 로마 교회가 가진 강력한 종교 권위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가 교회에 분부한 소명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방 교회에서는 세속 권력에 대해 이처럼 전투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경우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가 종교적 재치권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도 여전히 전제 군주인 비잔티움 황제의 신하일 뿐이었다. 황제에 의해 임명이 허가되는 자리였고, 또 황제의 뜻에 의해 빈번히 폐위될 수 있는 직책이었다. 또한 종교에 대한 황제의 영향력이 제국 내에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기에 주교의 종교적 권위는 황제에 의해 상당 부분 제한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방 교회의 성직자들이 황제의 세속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서로마의 경우 종교의 우두머리는 형편 없는 세속 정치 세력과는 완전히 무관한,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무조건 로마 교황이었다. 게다가 황제의 권위가 사라져 가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로마 교황의 종교적 권위뿐이었으므로 점차 세속 권력도 교황의 권위 앞에 복종하는 것이 종교적으로 옳은 태도라는 사상이 서방 지역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상은 382년 서방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Gratianus)가 당시 황제들이 물려받아 쓰던 칭호인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를4 자진 폐기함에 따라 더욱 확고한 사실이 되어 갔다. 이것은 로마의 황제가 가지고 있던 상징적인 종교 권력의 철폐 또는 반환을 의미하며, 황제 스스로 로마의 교황을 황제보다 종교적으로 훨씬 우위에 서 있는 존재로서 인정해 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후 로마 교황의 영향력은 지리적으로 광범위해지기 시작했다. 교황 시리치오(Siricius: 384-399)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의 관할 하에 있던 일리리쿰(Illyricum) 지역에 대리자를 보내었고, 교령을 담은 편지를 각지에 보내 교회 행정 및 교리에 관한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교황의 이름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1세(Innocentius I: 401-417)는 교황의 수위권을 발휘하여 펠라기우스(Pelagius)주의 이단으로 인한 아프리카 교회의 분쟁을 해결하였는데,5 당시 히포(Hippo)의 주교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설교 중에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두 공의회 결과를 사도좌에 전달했고, 답변이 왔으니 이제 문제는 해결됩니다. (iam enim de hac causa duo concilia missa sunt ad sedem apostolicam, inde etiam rescripta venerunt, causa finita est)

인노첸시오 1세는 410년 서고트의 왕 알라리쿠스 1세가 로마를 포위했을 때 라벤나 행궁으로 도피한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를 대신하여 평화를 중재하는 정치적 역량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또한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위대한 총대주교 중 하나였던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모스, 곧 요안네스 1세(Ιωάννης Α΄: 398-404)가 정치적인 압력을 받아 폐위될 위기에 빠졌을 때 이 사건에 개입하기 위해 사절단을 콘스탄티누폴리스로 보내기도 하였다. 한편, 교황 조시모(Zosimus: 417-418)는 현재의 프랑스 지방인 갈리아 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아를(Arles)의 주교로 선출된 파트로클루스(Patroclus)를 교황 대리로 임명하여 그 지방을 직접 치리할 것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교황의 영향력을 신장시키고 수위권 확립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1장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교황 레오 1세였다. 레오 1세의 활약을 언급하기 전에 그 배경을 잠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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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레이아 학파와 안티오케이아 학파의 대립

1장에서는 펜타르키아의 성립에 초점을 맞추어 세계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을 간략하게 짚었다. 하지만 세계 공의회가 교계 구조만을 논하기 위해 개최된 것은 아니었다. 공의회에서 다룬 더 중요한 사안은 바로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에 관한 교리 논쟁이었다. 325년의 제1차 니카이아 공의회는 예수는 피조물일 뿐이며 성부에게 종속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며 예수의 신성 및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부인한 아레이오스(Άρειος)를 단죄하였다.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누폴리스 공의회는 비록 예수가 인간의 몸과 마음을 가졌으나 영은 하느님의 말씀인 로고스(λόγος)라고 주장하여 아레이오스와는 반대로 예수의 인성(人性)을 부인한 아폴리나리오스(Απολλινάριος)의 주장을 배격하였다. 이 두 공의회의 결론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한 위(位)인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겸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인 예수에게 신성이 있다면 도대체 그의 인성과 신성은 어떤 방식으로 한 실체 안에서 존재하는가?

알렉산드레이아 학파의 대표적인 교부 중 한 사람인 클레멘스(Κλήμης)6

이러한 질문에 대해 알렉산드레이아의 학자들은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결합을 근거로 두 성질의 존재를 설명하였다. 알렉산드레이아 학파는 고전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연구하는데 많은 열정을 기울였으며 성경에 쓰여 있는 글들의 이면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파헤치는 학풍을 가졌다. 그들은 예수를 통한 인류의 구원은 오직 예수가 신과 동일할 때에라야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로고스가 어떻게 인간의 몸을 입게 되었는가에 집중하였고 이는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합일을 주장하는 그리스도론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비해 안티오케이아의 학자들은 역사적인 예수에 주목하였고 유대교적인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여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어떻게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가 로고스와 합일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주목하였고, 이는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만남을 주장하는 그리스도론을 전개하였다.

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알렉산드레이아 학파 사람들은 신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가졌고, 이에 비해 안티오케이아 학파 사람들은 인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지만 알렉산드레이아 학자들은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고 표현했고, 안티오케이아 학자들은 각자 완전한 신성과 인성이 합쳐졌다고 표현했을 뿐 두 성질이 하나가 되었다는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리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안티오케이아 학파 사람들은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올바른 행위’를 통해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던 팔레스타인 지방의 유대교의 영향을 짙게 받았고, 이에 반해 알렉산드레이아 학파 사람들은 당시 융성하던 인간 이성 중심의 그리스 문화와 철학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에 분명하다.

이러한 신학적 견해 차이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가 지리적으로 훨씬 가까운 안티오케이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임명되면서 교회 내의 정치 문제로까지 불거지게 된다. 알렉산드레이아 입장에서는 분명 로마 다음의 지위를 누려야 하는 역사적, 종교적 정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로마가 된 콘스탄티누폴리스가 수도로서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누폴리스 아래의 지위에 만족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그런데다가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는 신학적 견해가 다른 안티오케이아 학파 사람이니 도저히 곱게 보일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제1차 콘스탄티누폴리스 공의회 이후인 4세기 말부터 알렉산드레이아 총대주교와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 사이에는 불꽃 튀는 신경전이 오갔다. 단적인 예로 동방 교회의 교부이자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요안네스 1세가 정치적인 압력으로 사퇴를 종용받은 일의 배경에는 당시 알렉산드레이아 총대주교였던 테오필로스(Θεόφιλος: 384-412)와의 불화가 있었을 정도였다.

두 총대주교들의 분쟁은 431년 에페소스(Έφεσος) 공의회에서 정점에 다다랐다.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였던 네스토리오스는 사람들이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신격화하고 예수의 인성에 대한 모호한 이해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마리아를 부르는 호칭으로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의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7 이에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 키릴로스 1세(Κύριλλος Α΄, 412-444)는 서한을 보내 네스토리오스의 주장이 이단적인 것이라며 강력하게 비난했으며 「12개의 저주문(Twelve Anathemas)」을 첨부하여 네스토리오스를 신랄하게 규탄하였다. 키릴로스 1세는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첼레스티노 1세(Celestinus I: 422-432)와 연대하여 네스토리오스를 압박하였고, 결국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오스를 지지하는 안티오케이아 학파 주교들이 회의장에 도착하기 전에 그를 이단으로 단죄하여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성공하였다.

네스토리오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제국에서 추방당한 뒤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교회를 세워 오리엔탈 정교회로 독립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중국에까지 건너가 선교활동을 벌였다. 사진은 중국의 고도인 뤄양(落陽) 부근에서 발견된 네스토리오스파 교회 관련 유물.8

그그런데 일부 알렉산드레이아 학파 사람들은 신성을 강조하는 것도 모자라 점차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성보다 우위에 두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예수는 오직 하나의 성질인 신성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과격한 기독론(基督論, christology)을 발전시켰다. 이를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ism)이라고 부르는데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수도사였던 에우티케스(Εὐτυχής)가 바로 대표적인 단성론자였다. 그는 포도주가 바다에 빠지면 즉시 바닷물에 모두 흡수되어 포도주는 흔적도 없어진다는 것에 비유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완벽히 흡수되어 결합되었다고 주장했다.9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였던 플라비아노스(Φλαβιανὀς: 446-449)는 주교 회의를 열어 그를 도시에서 추방하였는데, 쫓겨난 에우티케스를 받아들이고 그의 신학적 입장을 지원해 준 사람은 알렉산드레이아 총대주교 디오스코로스 1세(Διόσκο̣ρος Α΄: 444-451)였다. 알렉산드레이아 신학자들은 에우티케스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는 단성론을 둘러싸고 두 교회간의 논쟁이 격화되었고, 449년에 비잔티움 황제 테오도시오스 2세(Θεοδόσιος Β΄)의 주재 하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에페소스에서 또다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놀랍게도 이 공의회는 에우티케스를 비롯한 알렉산드레이아 교회의 손을 들어주고 반대로 플라비아노스를 파문하는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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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세의 활약

그러나 알렉산드레이아 학파의 참석자 수가 우세하여 이들의 입김이 지배적이었던 449년의 에페소스 공의회는 훗날 ‘강도 공의회’라는 뜻의 라트로치니움(latrocinium)이라고 불릴 정도로 편협하게 진행된 파행 공의회였다.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이 공의회에 로마 교황의 사절단 및 서방 주교들이 단 한명도 초대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의회의 결정 사항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이 로마에 당도했을 때 교황 레오 1세는 강하게 반발하며 모든 결정 사항들이 무효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그는 플라비아노스의 입장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글을 썼으며,10 동시에 에우티케스의 개심을 촉구했다.

레오 1세는 교황권을 확립하고 수위권을 강조한 공로로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대교황 레오 1세로 불린다.11

마침 450년 테오도시오스 2세가 죽고 마르키아노스(Μαρκιανός)가 비잔티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레오 1세는 공의회를 새로 열 것을 제안했으며 황제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계 공의회를 적법한 절차를 따라 정당하게 개최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것이 앞에서 소개한 칼케돈 세계 공의회이다. 이 회의에서 플라비아노스에게 보낸 레오 1세의 글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여 공의회가 단성론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주장의 양성론(兩性論, Dyophysitism)을 정통 교리로 채택하는 데 매우 큰 기여를 하였다. 공의회 결과 알렉산드레이아 총대주교 디오스코로스 1세는 이단으로 단죄되어 주교좌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 자리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파견한 그리스인 프로테리오스(Προτέριος, 451-457)가 차지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레오 1세의 신학적 주장이 동방 교회의 이단 논쟁을 잠재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기에 전체 기독교 사회에서 로마 교황의 권위는 크게 신장되었다. 반면 총대주교를 잃은 알렉산드레이아 교회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어 로마 교회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원래 레오 1세가 품었던 뜻이기도 했다. 그는 알렉산드레이아 사도좌를 설립한 사도 마르코가 로마 사도좌의 설립자인 사도 베드로의 제자였으므로 알렉산드레이아 총대주교가 로마 교황의 감독과 훈수 하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또한 레오 1세의 교통 정리 덕분에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의 영향력 역시 교황보다 한 수 아래임이 만천하에 드러내게 되었다.

레오 1세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교황은 당시 아를의 주교 힐라리우스(Hilarius)가 교황 대리로서 갈리아 지방에 대한 권한을 자기 멋대로 행사하는 것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았고, 당시 서로마 황제였던 발렌티누스 3세(Valentinus III)를 움직여 그가 445년 칙령을 반포하게 하는 데 성공한다. 이 칙령은 사도 베드로의 권위에 기반을 둔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명시한 사상 첫 번째 칙령으로, 교황이 세속 권력의 우두머리인 황제를 움직여 칙령의 작성과 반포에 영향을 준 유명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레오는 뿐만 아니라 450년 관구장 주교직을 아를 뿐 아니라 비엔(Viens)에도 나눠주어 아를의 주교가 가지는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약화시키면서 갈리아 지방의 주교 권력을 교황 아래에 단단히 묶어 두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제국의 동방 지역에 교황 대리 주교를 임명하여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의 권한의 약화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황 레오 1세의 권위는 452년 훈족의 대왕 아틸라(Atilla)가 서로마로 쳐들어 왔던 그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을 발했다. 당시 훈족은 라인강에서 카스피해에 이르는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틸라는 당시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에서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를 몰아내고 로마를 깨뜨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로마 황제의 부탁을 받은 레오 1세는 친히 아틸라와 직접 회담을 벌여 화평을 약속받고 군대를 퇴각시켰다. 뿐만 아니라 레오 1세는 455년 바다를 건너 로마를 약탈하기 위해 쳐들어 온 북아프리카 반달족의 왕 게이세리쿠스(Geisericus)와도 담판을 벌여 로마가 잿더미로 변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교황이 기독교 세계의 우두머리일 뿐 아니라 세속 정치에서도 위대한 황제와 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만천하에 알린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이렇듯 교황의 수위권을 재임 기간동안 끊임없이 주창하고 실제로 그것을 실행하였으며 그 결과 서로마 제국 영내의 실질적인 영도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레오 1세는 대교황(大敎皇) 레오(Leo the Great)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바티칸에 그려져 있는 프레스코화. 좌측에 삼층관을 쓰고 오는 교황 레오 1세 위로 검을 들고 날아오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있다. 우측에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아틸라와 그의 군사들이 그려져 있다.12

한편 서로마 제국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원래 제국의 영토였던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게르마니아(Germania), 북아프리카 지역은 각각 앵글로색슨(Anglo-Saxon)족, 프랑크(Frank)족, 서(西)고트(Goth)족, 반달족 등에 의해 이미 유린당해 실질적인 관할이 불가능한 지경에 빠졌고, 황제의 자리가 비잔티움 황제에 의해 지명될 정도로 서로마 정치 체제는 빈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10대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Romulus Augustus)가 서로마 제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그는 얼마 되지 않아 헤룰리족의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폐위되고 만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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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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