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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2-18

Religion 2-18

동서교회 대분열 18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18

콘스탄티누폴리스의 함락
Fall of Constantinople


목차

  1. 키예프의 수도대주교 이시도로스
  2. 동서교회 일치 선언
  3. 참고 사이트 및 출처

키예프의 수도대주교 이시도로스

비잔티움 최후의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Κωνσταντῖνος ΙΑ')는 젊은 술탄 메메드 2세(Mehmet II)가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고 대비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천혜(天惠)의 요새였으므로 방비를 잘한다면 오스만 제국군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이 과거 여러번의 침략을 통해 입증된 사실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보스포로스 해협 건너편에 세워진 요새 루멜리히사르(Rumelihisarı)는 해상을 통한 경제적 및 군사적 지원과 보급을 통째로 봉쇄시키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베네치아의 한 상선이 통행료를 지불하지 않고 해협을 지나가다가 요새의 포격을 받아 침몰하였고 선원 전원이 사형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질 정도로 오스만 제국의 해상 통제권은 막강하였다.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최대한 많은 자원을 쌓아두고 농성에 돌입하려고 했지만 자금이 달렸고, 서방 세계의 도움의 손길도 영 시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도시 내의 거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힌 정책이 서방 교회와의 재연합이었다. 서방 교회와 연합하게 되면 군사력과 재정적 원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던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피렌체 공의회의 연합 칙령을 받들기로 결심했다. 당시 교황 니콜라오 5세(Nicholaus V: 14457-1455)는 교회 일치에 반대하는 세력의 항의로 인해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추방당하듯 도망쳐 망명해 온 세계총대주교 그리고리오스 3세(Γρηγόριος Γ΄: 1453-1450)의 일로 매우 언짢은 상태였다. 그는 그리고리오스가 다시 세계총대주교좌에 복위해야하며 일치 교령이 정식으로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반포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주장했다. 황제의 호의적인 응답에 마음이 누그러진 교황은 콘스탄티누폴리스 지원 및 교회 일치 확인을 위해 추기경 이시도로스(Ἰσίδωρος)를 파견한다. 여기 등장하는 이시도로스 추기경에 대해서 잠깐 먼저 살펴보자.

이시도로스는 동방 정교회에서 '배교자'로 비난받는다. 2

이시도로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제2도시였던 테살로니키(Θεσσαλονίκη) 출신으로 콘스탄티누폴리스데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매우 유능한 설교자이자 신학자로서 명성을 떨친다. 라틴어에 능통했던 그는 동서교회의 연합을 찬성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동방 교회 대표자로서 이미 바젤 공의회에 참석하여 교회 연합을 위한 협상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세계총대주교였던 요시프 2세(Ιωσήφ Β΄, 1419-1439)는 바젤에서 돌아온 이시도로스를 키예프(Киев)1의 수도대주교로 임명하였는데, 당시 동방 정교회 국가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모스크바 대공국을 교회 연합의 축에 끼우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모스크바 대공국의 군주였던 대공 바실리 2세(Василий II)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세계대주교청이 로마 교황과 일치를 위한 여러가지 행동을 취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전편에서 소개된 것처럼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페라라(Ferrara)로, 그리고 뒤이어 피렌체(Firenze)로 공의회 장소를 옮겨 동서 교회 일치를 위한 논의를 진행한다. 요시프 2세는 이시도로스 역시 이 공의회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고, 이시도로스는 대공 바실리 2세의 자금 원조를 받아 리가(Liga), 뤼벡(Lübeck)을 거쳐 페라라에 도착한다. 거기서 그는 바실리오스 베사리온(Βασίλειος Βησσαρίων)과 더불어 교회 일치에 찬동하는 연설로 유명해졌으며 공의회의 일치 교령을 이끌어내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 공로로 교황 에우제니오 4세(Eugenius IV, 1431-1447)는 이시도로스가 동방 교회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제급 추기경으로 삼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대우였다. 또한 그를 리투아니아 및 러시아 지역으로 보내는 교황 특사로 삼았는데 교황의 호의에 보답하듯 이시도로스는 1440년 3월 헝가리 제국의 수도인 부다(Buda)에서 일치 교령을 반포하여 모든 러시아 성직자들이 일치 교령을 받들 것을 선언했다.

추기경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 있는 독특한 지위로 교황을 선출할 수 있는 콘클라베(Conclave)는 오직 추기경으로만 구성된다. 위 사진은 가장 최근에 추기경 서임을 받은 대한민국 3대 추기경인 염수정 안드레아 대주교. 3

한술 더 떠 그는 라틴 전례에서 쓰이는 십자가를 들고 모스크바로 귀환하였고, 1441년 유월절 전례 때 상통하는 주교의 이름들 중 로마의 교황인 에우제니오 4세의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나서 그는 담대하게 모스크바의 교회에서 일치 교령을 반포하였다. 이 일은 당시 모스크바 대공과 성직자들, 그리고 시민들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사흘 뒤 러시아의 여섯 주교들은 주교 회의를 열어 친서방적인 이시도로스 수도대주교를 폐위하는 결의를 채택했고, 바실리 2세의 군사들이 이시도로스를 체포하여 수도원에 유폐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시도로스는 2년 뒤 수도원을 탈출하여 로마로 귀환하였고, 거기서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바로 그 이시도로스 추기경이 이제는 교황의 명에 따라 교회 일치 및 비잔티움 제국 구원을 위한 지원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누폴리스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같이 딸려보낸 군사는 나폴리(Napoli)에서 데려온 궁수 200명에 불과했다. 이미 전편 후반부에 언급했지만, 유럽 각국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만한 군대를 파견할 여력이 못 되었다. 오직 교황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만이 약간의 여유가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이들 도시 국가들은 종교적 사명보다는 지중해 상권과 그로부터 들어오는 이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지중해 상권의 핵심적인 도시 중 하나였고 중요한 상업 요충지였지만, 비잔티움 제국이 쇠퇴하면서 상권이 이미 오래 전부터 매우 약해졌고, 또한 그 주변 영토를 석권한 오스만 투르크가 에디르네(Edirne) 등의 주요 도시에서 폭넓은 무역 특혜를 선사함으로써 콘스탄티누폴리스가 가지는 이점이 크게 사라졌다. 따라서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채무를 변제하지도 못할 정도로 빈약해진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위해 통 큰 원조를 해줄리 만무했다.

그나마 비잔티움 제국을 돕기 위해 제노바(Genova)와 히오스(Χιος) 섬에서 용병 700명을 이끌고 온 장군 조반니 주스티니아니(Giovanni Giustiniani), 레스보스(Λέσβος) 섬의 주교 레오나르도(Leonardo), 베네치아(Venetia)의 군사들, 그리고 성벽 방어를 위해 고용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기술자 존 그랜트(John Grant) 정도였고 이들 군사와 비잔티움 제국의 군사를 모두 합쳐 약 10,000명의 군사들이 콘스탄티누폴리스 수비군의 전부였다. 오스만 제국군의 수가 약 16~20만명이라고 했으니 이에 비하면 중과부적이었다.

그럼에도 서방의 실질적인 원조를 갈구해왔던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온 이시도로스를 환대했다. 반대로 교회 일치를 반대하는 많은 성직자들과 시민들은 우려를 금치 못했다. 그들의 걱정대로 이시도로스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오자마자 교회 일치를 위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직접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황제는 성직자들을 소집하였으나 1452년 11월 15일, 일치 교령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은 일치 교령이 아닌 항의 문서에 서명을 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으로 인한 위기는 더욱 커져만 갔다.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시민과 성직자들 사이의 갈등은 증폭되었다. 이에 반대파들도 언제까지나 황제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게 되었다.

결국 1달 뒤인 12월 12일,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성 소피아 성당, 곧 동방 정교회의 심장에서 역사적인 전례가 행해진다. 바로 서방 라틴 전례와 동방 비잔티움 전례가 함께 거행된 것이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 지금은 쫓겨나 있던 세계총대주교 그리고리오스 3세의 이름이 기념되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피렌체 공의회의 일치 교령이 낭독되었다. 이로써 1054년 상호 파문으로 시작된 동서교회의 대분열은 1452년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성 소피아 성당에서 비로소 해소되었다. 물론 리옹 공의회와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 문서상 교회 통합은 이뤄졌으나 동방 교회의 반발로 인해 로마와 새로운 로마의 상통은 이뤄지지 못했으며 현실적으로 부정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 소피아 성당에서 라틴 전례가 행해지며 두 교회의 상통을 기념한 것은 비잔티움 제국이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수복한 뒤 처음 있는 일이었고 이것인 상징적인 교회 일치의 모습, 그 자체였다.

황제와 황실 가문이 모두 참석한 이 자리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많은 사람들은 쓰디쓴 패배감을 느끼며 크게 낙담했다. 사람들은 동방 교회와 비잔티움 제국이 서방 가톨릭 교회와 교황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그 굴욕감에 매우 격노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성인 마르코스의 제자이자 교회 일치에 대해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던 수도사 옌나디오스(Γεννάδιος)는 스스로 은둔을 택하면서 자기 집 문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써붙였다고 한다.

오 불행한 로마인들이여,4 어찌하여 진리를 버리는가? 어찌하여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이탈리아인들을 믿는 것인가? 믿음을 잃게 되면 곧 도시5를 잃게 될 것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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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폴리스의 함락

그리고 옌나디오스의 말대로였다.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항복을 권하는 최후통첩에 불응하자 총공격을 감행한다.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포격에 무너진 성곽을 메우는데 동원되었고, 군사와 용병들은 용맹하게 오스만 제국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결국 1453년 5월 29일, 성은 함락된다.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분전 중에 사망하였고, 오스만 제국군은 그의 시체라고 생각되는 시체의 목을 베어 가두행진을 벌였다. 메메드 2세는 삼일간의 약탈을 허락했고 이 과정 중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노예로 팔려나갔으며, 도시는 파괴되었고. 동방 정교회의 상징인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모스크로 개축되었다.

이탈리아의 화가 파우스토 초나로(Fausto Zonaro)가 그린 콘스탄티누폴리스의 함락 상상도. 전쟁에서 승리한 술탄 메메드 2세와 그의 가신들이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성문에 들어서고 있다. 6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 속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탈출했고, 그 가운데에 추기경 이시도로스가 있었다. 그는 추기경의 상징인 붉은 옷을 다른 이의 시체에 입힌 뒤 일반 시민으로 가장하였고, 곧 포로가 되어 소아시아 지역으로 옮겨졌으나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인이 되어 로마로 갔다. 이미 서방 세계는 콘스탄티누폴리스의 함락을 충격으로 받아들였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니콜라오 5세는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주창하였으나 이에 호응하는 서방 왕국은 없었다. 니콜라오 5세가 선종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향한 십자군 창설은 없던 일이 되었으며, 오히려 오스만 제국은 훗날 유럽 동부 지역과 이탈리아에서 위세를 떨치며 오스트리아의 빈(Wien)을 포위공격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콘스탄티누폴리스가 함락되자 동서 교회의 일치는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우선 메메드 2세는 구(舊) 비잔티움 제국 시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공석이 된 세계총대주교좌를 다시 세우고 그 자리에 수도사 옌나디오스를 앉혔다. 아마도 메메드 2세는 남아 있는 비잔티움 사람들이 서방과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키면 이를 처리하기 매우 껄끄러을 것이라고 우려했던 듯 싶다. 그래서 메메드 2세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연합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교회 일치에 극력 반대했던 반서방 인물인 옌나디오스를 불러들였다. 그토록 서방 교회를 싫어하는 자가 과연 교황과 연락하여 십자군을 요청할 것인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이에 술탄의 뜻에 따라 옌나디오스 2세(Γεννάδιος Β': 1454-1456, 1463, 1464-1465)의 이름으로 세계총대주교가 된 옌나디오스는 제국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비잔티움 세력을 일컫는 소수민족 룸 밀렛(Rum millet)의 종교적, 정치적 수장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 술탄 메메드 2세와 접견한 세계총대주교 옌나디오스 2세를 나타낸 그림 7

그러나 옌나디오스 2세는 두 번이나 사임을 작정할 정도로 고뇌에 휩싸였다. 왜냐하면 술탄 메메드 2세가 처음에는 제국 신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다고 분명히 약속했으나 현실에서는 기독교인들은 제국 내에서 2등 시민으로 분류되어 차별을 받았고, 술탄 역시 매우 혹독하게 기독교인들을 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완전히 사임하여 수도사로써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옌나디오스 2세 이후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는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총대주교는 술탄과 정치인들의 입김에 의해 쉽게 폐위되었고 심지어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종교적인 권력을 잡아서 권세를 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오스만 제국의 권력에 기대면서 돈으로 그 자리를 사는 상황도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런 막장 상황에서 신학의 발전은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15세기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에 발맞춰 식민지에 적극적으로 포교함으로써 그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동안, 오스만 제국의 영토 내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와 동방 고대 총대주교좌는 유럽 세계와 단절된 상태에서 정체되어 그야말로 급속도로 보수화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모스크바가 '세번째 로마'로써 그 입지가 급부상하게 되었다. 사실 정교회 국가 중 가장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는 오직 모스크바 대공국 뿐이었다.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현재의 루마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의해 붕괴되었고, 그 외의 지역은 이미 세력이 약화되거나 로마 가톨릭의 영향이 우세한 지역이었다. 당시 모스크바 대공이었던 이반 3세(Иван III)의 아내는 비잔티움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이었다. 종교적 영향력으로서나 혈통으로서나 모스크바가 콘스탄티누폴리스의 계승 도시라고 외칠만한 명분은 있었다.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의 초상화. 8

모스크바의 수도대주교였던 이시도로스가 쫓겨난 뒤 1448년 이오나(Иона, 1448-1461)가 수도대주교 자리에 앉았는데, 이는 러시아 교회를 관할하던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의 승인 없이 이뤄진 것으로 이로써 러시아 교회는 사실상 자치교회가 되었다. 모스크바 수도대주교는 러시아 교회와 새롭게 떠오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정신적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요나의 뒤를 이어 수도대주교좌에 오른 페오도시(Феодосий, 1461-1464)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를 대신한 케사리아 필리피아(Καισαρεία Φιλίππεια, 성경에 나오는 가이사랴 빌립보)의 수도대주교의 축복을 받음으로서 사실상 동방 정교회에서 인정받는 참된 모스크바 수도대주교가 되었고, 수도대주교의 관할은 전 러시아 지역으로 인정되었다. 종교적으로 인정받는 상황속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은 군사적으로도 점차 그 세력을 확장하여 킵차크 칸국(Улус Джучи)의 간섭을 뿌리칠 수 있었고, 로마 가톨릭 국가인 리투아니아 공국과 동맹을 맺었던 노브고로드(Новгород) 공화국과 트베리(Тверь) 대공국을 합병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서 로마 제국 시대에 형성되었던 고대 5대 총대주교 관구를 이르는 펜타르키아는 크게 2번에 걸쳐 와해되었다. 먼저 아랍인들의 정복 전쟁에 의해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가 차례로 무슬림의 손에 넘어갔다. 이것이 첫번째 와해였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로마-콘스탄티누폴리스의 양두 체제는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해체되었고, 안 그래도 서방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로마 교회는 이제 유럽 세계 전체9의 유일한 총대주교요, 교황이요, 정신적 수장이 되었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이 '공번된', 즉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처럼, 로마 교회는 그야말로 서구권 질서를 따르는 그 모든 세계, 곧 유럽과 유럽의 식민지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인식되는 기독교 중심 그 자체가 되었다.

그렇다고 동방교회가 모두 망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구도가 바뀐 것일 뿐이었다. 여기서 잠시 정리하자면, 15세기경의 세계 기독교계는 크게 네 교회 집단으로 재편되었다.

  1. 로마 교회를 어머니 교회로 여기고 그 수장인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여기는 로마 가톨릭 교회 및 그와 상통하는 동방 교회들
  2. 오스만 제국 영토 내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상통을 거부하고 정교회 신앙을 따르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교회 및 그와 상통하는 교회들
  3. 오스만 제국 영토 밖에서 (특히 모스크바 대공국 내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상통을 거부하고 정교회 신앙을 따르는 모스크바 교회와 그와 상통하는 교회들
  4. 로마 가톨릭과 통교하지 않는 비칼케돈파, 즉 단성론 교회들로 아르메니아 교회, 시리아 교회, 콥트 교회 등

이중 1번 로마 가톨릭 교회 세력이 가장 압도적으로 컸다. 로마 가톨릭을 믿는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이탈리아 국가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등은 유럽 전역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막대한 부를 창출하면서 동시에 가톨릭 교회를 전세계에 퍼뜨리고 있었다. 2번 동방 정교회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벌어지는 핍박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대적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오직 3번 러시아 정교회만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적수가 될만했으나, 1547년 모스크바 대공 이반 4세(Иван IV)가 차르로 즉위하면서 루스 차르국(Царство Русcкое)을 선언할 때에도 서방 세력은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을 정도로 모스크바의 세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4번 단성론 교회들의 중심지는 지리적으로 유럽에서 먼 지역이었고, 많은 교회들이 오스만 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 독자적인 세력을 갖춘 세속 권력과 연계되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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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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