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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회 대분열 17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17

피렌체 공의회
Council of Florence


목차

  1. 바젤 공의회
  2. 페라라-피렌체 공의회
  3. 동방 교회의 반발
  4. 참고 사이트 및 출처

바젤 공의회

다시 이야기는 콘스탄츠(Konstanz) 공의회에서 공의회 수위설을 등에 업고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된 마르티노 5세(Martinus V: 1417-1431) 때로 돌아간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교령을 통해 오직 공의회만이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참된 도구라고 선언하였고, 콘스탄츠 공의회 폐회 이후 5년 뒤에, 그리고 7년 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매 10년마다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마르티노 5세는 그러한 콘스탄츠 공의회 결정을 존중하여 폐회 후 5년째가 되는 1423년 공의회를 개최한다. 개최 장소는 이탈리아 북부의 파비아(Pavia)였다. 그런데 당시 유행하던 흑사병 때문에 유럽 온 도시에는 위험천만한 역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파비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공의회 장소를 부득이하게 옮길 수밖에 없었고, 이에 교황은 좀 더 남쪽에 위치한 시에나(Siena)에서 공의회를 속개하기로 결정했다.

성공회(Anglican Church) 교단은 매 10년마다 전세계 주교들이 모두 모여 교회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램버스 회의(Lambeth Conferences)를 가진다. 범세계적 회의의 반복적인 개최라는 점이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의를 생각나게 한다. 1

하지만 시에나는 교황령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당시 공의회 수위설을 주장하는 신학자들 입장에서는 교황의 영향력이 큰 곳에서 교회 개혁을 논한다는 것이 자못 위험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만일 시에나에서 공의회가 열린다면 공의회의 소임을 다 해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아니나다를까, 시에나 공의회는 후스(Hus)와 위클리프(Wycliffe)를 단죄하는 수준의 내용을 다룬 안전한 교서를 내리는 데 합의하는데 그쳤고, 동방 교회와의 협상을 잠시 미루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적극적인 교회 개혁의 의지는 없어 보였다. 마르티노 5세는 콘스탄츠 공의회와는 대조적으로 약화된 공의회의 모습에 쾌재를 불렀으며, 별다른 진전이 없자 서둘러 공의회의 폐회를 선언하고자 했다. 당시 프랑스 신학자들은 교황으로부터 프랑스 교회의 폭넓은 자유를 얻어내고자 하였으나 시에나 공의회가 졸속으로 끝나면서 실패하였다. 오직 공의회 수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걷은 수확이라고는 7년 뒤에 공의회가 열릴 장소로 교황의 영향력에서 꽤 벗어난 스위스의 도시 바젤(Basel)로 정한 것이 유일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르티노 5세는 공의회에 대해 점차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공의회 수위설은 분명히 교황권을 옭아매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교황이 스스로를 제한시키는 회의를 적극적으로 열 필요가 없었다. 여러 변명과 상황논리 속에서 1430년이 지나갈 때까지 공의회 개최는 차일피일 미뤄지게 되었다. 그러자 유럽 각 세력과 개혁을 요구하는 신학자, 성직자들이 반발하기 시작했고, 특히 콘스탄츠 공의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공의회의 신성한 교령에 교황이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였다. 결국 마르티노 5세는 죽기 전인 1431년에야 바젤에서 공의회 개최를 선언하였고, 추기경 줄리아노 카에사리니(Giuliano Caesarini)를 의장으로 삼아 바젤로 보냈다. 마르티노는 공의회 시작을 알린 뒤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뒤를 이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Eugenius IV: 1431-1447)가 공의회의 책임을 계속 지게 되었지만 그도 역시 별로 공의회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에우제니오 4세는 바젤 공의회가 후스파를 징벌하는 십자군 창설을 결의하는 정도에서 마무리되어 교회 개혁 관련 내용을 성가시게 다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신학자들로 구성된 바젤 공의회 참석자들은 로마 가톨릭이 적으로 규정한 후스파의 대표자들과 양형영성체(兩形領聖體)2와 교회 재산 및 전례시 설교와 관련된 주제를 놓고 협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은 에우제니오를 비롯한 보수적인 가톨릭 성직자들의 큰 반발을 샀다. 공의회의 협상 태도는 후스파를 단죄한 이전 콘스탄츠, 시에나 공의회의 결과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이를 호기로 여긴 에우제니오 4세는 1432년, 공의회 해산을 명령하고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에서 속회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칙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에우제니오 4세의 초상화 3

하지만 에우제니오 4세의 결정은 곧 심각한 반발을 사게 된다. 우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로부터 바젤 공의회의 보호를 위임받은 바이에른(Bayern)의 공작 빌헬름 3세(Wilhelm III)는 은근히 바젤 공의회를 통해 자신의 영지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후스파 문제가 깔끔하게 매듭지어지길 원했다. 공의회의 성공은 자신의 성과로 비춰질 수 있었고, 이는 훗날 지기스문트 황제가 죽거나 퇴위하게 된 이후 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때 여러 후보들 중에서 자신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데 일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듯 하다. 그래서 빌헬름 3세는 바젤 공의회가 지속되기를 원했다.

다른 나라들 또한 사정은 달라도 바젤 공의회를 지지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사보이(Savoy) 공국과 프랑스, 잉글랜드 등에서는 만일 공의회가 교황의 의도대로 바젤이 아닌 지역에서 공의회가 열리게 되면 교회 개혁이 수포로 돌아가는 동시에 지기스문트의 뜻대로 모든 결정이 이뤄질 거라는 불안감이 확산되었다.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이들 나라에서는 바젤 공의회에 힘을 실어주자는 뜻에서 주교와 신학자들을 바젤에 더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교황의 정적들 역시 바젤 공의회에 지지를 보내면서 공의회의 정당성에 힘을 보태어주었다. 이에 탄력을 받은 바젤 공의회는 회기를 지속하여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확인했던 공의회 수위설을 재확인하는 교서를 반포하면서 교황을 압박하였고, 에우제니오 4세는 이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공의회 수위설의 승리였다.

그러나 그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바젤 공의회에 모인 사람들이 교황에 대한 승리감에 너무 도취되었던 모양이었는지 적당한 수준에서 그만두었어야 했는데 너무 나간게 그만 화를 부르고 말아다. 불행히도 바젤 공의회는 회기를 거듭할수록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었고 교황청 재원 마련을 위해 유럽 각국에 부과했던 세금을 철폐시키고 콘클라베와 추기경단에 대한 문제까지 논하기에 이르렀다. 에우제니오 4세는 바젤 공의회가 이러다간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교황권을 전복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공의회는 정말이지 점차 과격해져갔다. 처음 의도와는 달리 몇 번의 회기를 거듭되며 추인된 결정이라고는 교황권을 약화시키는 공의회 수위설을 재확인하는 내용 뿐이었다. 교황은 자기를 적대시하고 도저히 협상의 틈을 내어주지 않는 공의회와 화해하는 전략을 아예 접어버렸고, 대신 공의회주의자들에게 빼앗긴 주도권을 시급히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되도록이면 바젤보다는 교황령에 가까운 도시에서 대립 공의회를 개최하는 것이 필요했는다. 이때 기가 막히게 제대로 먹잇감이 걸려들었으니 바로 비잔티움 제국이 교황에게 SOS를 요청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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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라-피렌체 공의회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요안니스 8세(Ίωάννης Η')였다. 그의 앞선 시대까지 벌어진 권력 투쟁 와중에 비잔티움 제국은 발칸반도의 모든 영토를 오스만 제국에 헌납했으며,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오직 콘스탄티누폴리스와 일부 섬에만 통치력이 미치는 동방의 소(小)도시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의 부황인 마누일 2세(Μανουήλ Β')는 오스만 제국의 분열 사태를 이용하여 위기를 넘기려고 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 콘스탄티누폴리스가 포위공격을 받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도무지 독자적으로는 대제국인 오스만 제국을 상대할 수 없었던 절망적인 상황 속에 빠져버렸고, 마누일 2세는 제국이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서방 기독교 세계의 원조를 받아야한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실제로 그는 1396년에 프랑스 파리(Paris)에서 2년여간 머물면서 서방 국가들의 원조를 적극 호소하기도 한 전력이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요안니스 8세는 서방 세계의 정신적 수장인 교황과 연결해야한다는 비잔티움 제국의 고전적인 외교 전략을 실행하기로 결정했고, 교황청에 동서교회 일치 및 군사적 원조를 주요 의제로 한 공의회를 요청했다.

이탈리아의 화가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가 그린 동방박사의 행렬 중 일부. 백마를 타고 돌아가는 동방박사의 모습이 사실 요안니스 8세의 초상이라고 한다. 4

에우제니오 4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요청을 일종의 지렛대로 사용하였다. 원래 동방 교회와의 화해는 바젤 공의회의 의제 중 하나였으며 이미 동방 교회의 사절단과 함께 회기를 진행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다만 회의 장소에서 큰 의견차를 보여 진전이 전혀 없던 중이었다. 프랑스 추기경 루이 달레망(Louis d'Allemand)을 비롯한 바젤 공의회 서방측 참석자 다수는 바젤, 혹은 사보이 공국의 영토, 아니면 아비뇽(Avignon)에서 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 정부는 그 먼 곳에서 회의를 진행시킬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을 틈타 교회 일치 문제에 보다 더 적극적이었던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에서 공의회를 여는 것이 어떻느냐는 의견을 제시했고, 비잔티움 제국 정부는 교황의 뜻을 받드는 공의회 내 소수파의 의견에 호응하여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공의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관계를 파악한 바젤 공의회 참석자들은 교황이 교회 일치에 관한 문제를 악용해서 공의회 진행을 어지럽혀 놓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바젤 공의회는 1437년 10월 1일, 교황에게 60일 내에 바젤로 출석할 것을 강요하는 소환 서신을 보내는 초강수를 둔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양보와 타협을 모르는 공의회의 고압적인 태도와 공의회 수위설만 매일 되뇌이는 모습에 지친 사람들이 급증하게 된다. 교회 개혁을 처리하라고 공의회를 소집했더니 이제는 공의회가 모든 이들 위에 서려고만 하고 제대로 된 의견 조율이나 실효상 있는 교령은 내놓지도 못하는 상황에 사람들이 적잖이 실망했던 것이다. 에우제니오 4세는 공의회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5년 전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에 그는 공의회의 소환 서신에 의기양양하게 공의회 해산을 명령하는 칙서로 맞대응했다. 칙서 '독토리스 젠티움(Doctoris Gentium: 이방인의 사도)'에서 교황은 바젤 공의회가 짧은 기간 안에 후스파 처리 문제만을 논하고 폐회될 것이며 동방 교회와의 일치를 비롯한 기타 논의는 이탈리아의 도시 페라라(Ferrara)에서 이어질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칙서가 전해지자 극단적인 공의회주의자들을 제외한 수많은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일거에 바젤을 떠나 페라라로 옮겨갔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교황이 공의회의 폐회를 선언할 수 없다고 선언했음에도 사실상 교황의 폐회 선언이 유효하게 먹혀 들어간 것이다. 바젤 공의회는 그 정통성에 큰 상처를 입게 되어 위기 상황에 빠졌고 결국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고자 더욱 과격한 결정들을 내리기 시작한다. 우선 에우제니오 4세를 폐위하고, 사보이의 공작 아마데오(Amadeo)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펠릭스 5세(Felix V: 1439-1449)로 삼았다. 그러나 바젤 공의회는 1438년 이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주도권은 완전히 에우제니오 4세가 주재한 페라라 공의회로 넘어가게 된다. 교황이 공의회 수위설을 단숨에 눌러버린 셈이다. 자신감을 되찾은 에우제니오 4세는 교황의 명을 따르지 않고 바젤에 남아 공의회를 계속 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파문에 처했다. 이제 교황은 원하는 대로 공의회를 주도하여 우선 동서교회 분열 문제를 다루는 데 열의를 쏟을 수 있기 되었다.

펠릭스 5세의 초상화. 그는 로마 가톨릭 역사상 현재까지 있었던 대립교황 중 가장 마지막 대립교황이다. 5

페라라의 회의에는 동방 교회에서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왔고 거기에는 황제 요안니스 8세와 세계총대주교 요시프 2세(Ιωσήφ Β΄: 1419-1439)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금난과 흑사병으로 인해 공의회 장소로서 페라라가 부적절하게 되었고, 당시 유력 가문이었던 메디치(Medici) 가의 호의와 후원을 통해 공의회 장소는 피렌체(Firenze)로 옮겨졌다. 여기서 교회 일치에 관한 토론이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그 결과 1439년 7월 6일, 여섯번째 회기에서 아주 중요한 일치 교령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이 교령은 크게 네 가지를 핵심적인 결정 사항으로 다룬다.

연옥 교리는 교황 베네딕토 12세(Benedictus XII, 1334-1342) 때 확립되다. 로마 가톨릭의 내세관에 따르면, 연옥에서는 정화의 불(ignis purgatorius)이 천국에 들어가기 합당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고 한다. 7
  1. 필리오케(filioque) 문제: 가장 큰 쟁점이었다. 서방 교회는 니카이아-콘스탄티누폴리스 신경에 '또한 성자에게서(et filioque)'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성령의 이중발출설을 지지하였으나 동방 교회는 신경의 변개는 그릇된 일이라며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성령이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ex filio) 발출된다는 절충안, 곧 과거 다마키노스의 요안니스가 주장해온 것이 대안으로서 큰 호응을 얻었다. 칙령은 라틴인들의 필리오케 문구가 두 개의 원리로부터의 발출이 아니라는 것을 명시하면서 오직 하나의 원리만이 성령 발출의 근원임을 강조하였고 최종적으로 성자를 통한 발출을 정식 신앙으로 공포하였다. 이에 덧붙여 여태까지 양쪽 교회는 성령의 발출에 대해 다른 표현으로 고백을 해 왔을 뿐 실상은 동일한 신앙을 가졌던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서 필리오케 문제를 매듭지었다.
  2. 성사에 쓰이는 성체 형태: 서방 교회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얇은 빵인 웨이퍼(wafer)를, 동방 교회는 누룩이 들어간 빵을 사용했는데 사제는 속한 지역의 전통에 따라 어느 것이나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3. 연옥(燃獄, purgatory) 교리: 서방 교회는 연옥의 존재를 인정하여 모든 이들이 연옥을 거쳤다가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된다고 믿었지만 ,동방 교회는 애초부터 그러한 전통이 없었으므로 연옥이 순 거짓말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도 절충안이 마련되어, 어떤 이들은 삶 속에서 베푼 선행이나 악행으로 인해 죽어서 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되지만 애매한 상황에 놓은 사람들은 연옥에서 정화과정을 통해 영혼의 순수성을 회복한 뒤에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서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4. 교황의 수위권 논쟁: 로마의 주교이자 펜타르키아의 총대주교 중 하나인 로마 교황이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지상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는 서방 교회의 믿음에 대해 동방 교회는 줄곧 '동일한 것 중에 먼저된 것일 뿐 수위권을 갖지 않는다'라는 의견을 굽히지 않아 왔다. 그러나 동방 교회는 피렌체에서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사실상 인정하여 서방 교회와의 상통에 가장 큰 걸림돌을 치워버렸다. 대신 교령 마지막에 총대주교의 서열을 로마, 콘스탄티누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으로 명시하여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의 입지를 확고하게 확인받기는 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페라라-피렌체 공의회가 '교리가 같다면 전례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달라도 용인될 수 있다'는 규범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방침을 따라 로마 가톨릭 교회는 단성론 교회였던 아르메니아 교회, 콥트 교회, 시리아 교회, 마론파 교회8 등과 상통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비록 교리는 서방의 것을 많이 따르게 된 모양새인지라 서방 교회의 승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당시 동방 교회와 세속 국가의 세력은 절대적인 약세였으므로 이전처럼 동등한 위치에서 서방 교회에 자신들의 뜻을 강력하게 관철시킬 수 없었던 상황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동서교회 대분열이 일어난지 약 400여년만에 양 교회의 일치 교령이 공포되었다! 당시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온 수많은 성직자, 정치가들이 이 일치 교령을 받아들일 것을 서명하였고 여기에는 세속 황권을 가진 요안니스 8세와 종교적 수장이었던 세계총대주교 요시프 2세의 압력도 크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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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교회의 반발

그런데 교회 일치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세계총대주교 요시프 2세가 피렌체에서 이틀 뒤 선종하고 만다. 동방측 대표로서 가장 유력한 인물이 갑자기 숨을 거두자 동방 대표단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동방 주교들은 한발 물러서 세계총대주교의 의견은 단지 개인의 의견일 뿐이며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의견이 아니기에 만일 이러한 결정 사항이 올바른 것으로 인정되려면 개별적인 주교 회의를 통해 각 지역의 주교로부터 만장일치를 얻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마침 여기에 공의회에 참석했던 동방 주교 한 사람이 이 교령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면서 로마 교회가 이단적이며 절대로 변개된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바로 정교 신앙의 기둥들9 중 하나로 불리게 에페소스(Έφεσος)의 주교 마르코스(Μάρκος)였다. 마르코스는 자신에게 일치 교령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 아니 사실상 협박하는 교황과의 대담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한다.

교회의 공의회는 어떤 교의를 어긴 자, 그런 것들에 대해 설파하고 싸운 자들을 반역자로 비난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그랬던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또한 초대 교회 시절부터 교회는 이단 그 자체와 이단 세력을 이끄는 사람, 그리고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떠한 것으로도 저만의 가르침을 설파한 적이 없었고, 교회에 새로운 것을 들여오지도 않았으며, 다른 혹은 거짓된 교리를 수호한 적도 없습니다. 오직 저는 교회가 우리 구세주로부터 완전한 형태로 받았던, 오늘 이날까지도 굳건히 서 있는 그 가르침을 붙들고 있을 뿐입니다. 그 가르침은 곧 분열이 있기 전에 동방 교회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던 거룩한 로마 교회의 가르침이요, 교황께서 과거에 늘 칭송해마지 않으셨고 바로 이 공의회에서 자주 존경과 경의를 다해 언급하셨던 그 거룩한 가르침이며, 어느 누구도 반박하거나 논쟁할 수 없는 그 가르침입니다. 만일 제가 그 가르침을 붙들고 거기서 떠나지 않게끔 스스로를 다스린다면 대체 어떤 공의회가 저를 이단처럼 단죄하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대체 어떤 참되고 독실한 마음이 저를 그렇게 단죄하겠습니까? 그리 하시려면 우선 제가 붙들고 있는 가르침을 비난해야 할 터, 교황께서도 이 가르침이 독실하며 바른 신앙임을 인정하고 계실진대 어째서 제가 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성인 마르코스의 이콘 10

일치 교령이 반포된 다음해인 1440년 2월에 요안니스 8세를 비롯한 비잔티움 제국의 모든 정부요인들 및 성직자들이 콘스탄티누폴리스로 귀환한다. 어수선한 정국을 바로잡고 일치에 대해 딴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요안니스 8세는 빈 자리로 두었던 세계총대주교 자리에 미트로파니스 2세(Μητροφάνης Β΄: 1440-1443)를 세워 상황을 개선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마르코스 주교의 입장은 아주 단호하고 완고하였다. 그는 1444년에 죽을 때까지 연합에 반대하는 의견을 꺾지 않았으며, 일치 교령에 서명했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이들 중 상당수가 서방 교회와의 연합에 반대하는 세력이 되게 하는 데 헌신했다.

하지만 문제는 성직자들만이 아니었다. 일치 교령 소식이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전해지자 수많은 수도사들과 일반 민중들이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많은 동방 교회 신자들에게 반(反)서방 감정은 여전히 뿌리 깊었으며 도무지 회복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결국 성난 시민들은 세계총대주교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어머니를 죽인자라는 뜻의 미트로포노스(μητροφόνος)라는 경멸적인 별명으로써 총대주교를 멸시했다. 미트로파니스 2세는 압력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사임한 뒤 로마로 도망갔다. 그의 후임이었던 그리고리오스 3세(Γρηγόριος Γ΄, 1453-1450) 역시 바젤 공의회 때부터 동서교회 일치에 호의적이었던 사람이었는지라 시민들로부터 엄한 질타를 받았고, 1450년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추방당해 로마로 망명해야 했다. 이 과정 중에서 피렌체 공의회의 일치 교령은 제국 내에서 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의회의 결정이 사실상 무효화되고 만 것이다.

결국 페라라와 피렌체까지 가서 제국의 명운을 건 일대의 협상의 자리에 섰던 비잔티움 황제 요안니스 8세는 일치 교령의 효과도 보지 못한 채 1448년에 세상을 떠난다. 그 뒤를 아들 콘스탄티노스 11세(Κωνσταντῖνος ΙΑ')가 이었으니 그가 바로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즉위 초기부터 대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다. 서방 세력의 도움이 절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 내에서는 라틴인들에 반대하는 여론이 항상 들끓었다. 그리고 당시 비잔티움 제국을 도울 만한 서방 국가들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백년전쟁 중이었고, 신성 로마 제국은 황제 권력 투쟁과 연방국들 사이의 갈등을 처리하느라 원조에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있던 마지막 아랍 왕조인 그라나다 왕국을 몰아내는 영토 수복 전쟁, 곧 레콩키스타(Reconquista) 수행 중이었고, 헝가리와 폴란드는 1444년에 이미 오스만 제국군에 바르나(Varna)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 군사를 일으킬 여력이 없었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 발칸 반도를 집어삼킨 지 오랜 오스만 제국의 젊은 술탄 메메드 2세는 기어이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는 1452년, 보스포로스 해협 맞은 편에 요새 루멜리히사르(Rumelihisarı)를 세워 콘스탄티누폴리스 공략의 교두보로 삼았다. 포위는 기정사실이 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사면초가였다.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이때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가장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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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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