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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회 대분열 16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16

헤시카즘 논쟁
Hesychasm Controversy


목차

  1. 바를람과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
  2. 헤시카즘 공의회
  3. 공의회의 판정
  4. 참고 사이트 및 출처

바를람과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

동방 교회는 이 서방 교회가 대이교의 혼란을 겪는 동안 철저하게 소외당하고 있었다. 교황을 둘러싼 서방 교회의 관심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프랑스 쪽으로 넘어간 틈에 어느새 오스만 제국(دَوْلَتِ عَلِیَّهِ عُثمَانِیَّه)이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모두 집어삼키고 있었다. 술탄 오르한 1세(اورخان غازی)는 프루사(Προύσα)를 점령하여 약 40년간 제국의 수도로 삼았으며 1331년에는 니케아(Νἰκαια)가, 1337년에는 니코미디아(Νικομήδεια)가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팔레올로고스 가문(Παλαιολόγος)의 요안니스 5세(Ιωάννης Ε')와 칸타쿠지노스(Καντακουζηνός) 가문의 요안니스 6세(Ιωάννης ΣΤ´)가 권력을 두고 내전에 일으켰을 때 칸타쿠지노스 쪽을 지지하면서 군사력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권력 분쟁에 개입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트라키(Θράκη) 지방의 칼리폴리스(Καλλίπολις)를 점령하였으니 이것이 1354년의 일이었다. 내전에서 승기를 잡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던 요안니스 6세는 오르한 1세에게 돈을 주면서 이제 목적을 성취했으니 칼리폴리스에서 군사를 물리라고 했으나 오르한 1세는 요구를 묵살하며 이 도시는 이슬람교의 유일신인 알라께서 자신에게 주신 땅이니 돌려줄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슬람 교도들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유럽 땅인 발칸 반도에 영토를 확보한 것이 이 때가 처음이었으며 콘스탄티누폴리스 시민들은 칼리폴리스를 점령한 이교도들이 이젠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하려고 들이닥칠 것이라며 공포에 떨었다.

오스만 제국의 확장을 나타낸 지도. 콘스탄티누폴리스가 함락되기 전에 이미 발칸 반도는 모두 오스만 제국의 손에 떨어졌던 상황이었다. 1

오스만 제국의 확장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오르한 1세의 뒤를 이은 무라트 1세(مراد الأول)는 1369년 아드리아노폴리스(Αδριανοπολις)를 손에 넣었으며, 1385년에는 불가리아 왕국의 중심도시 중 하나인 소피아(София)가 오스만 제국군에게 함락당했다. 1389년에 코소버(Kosovë)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한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었고, 이후 오스만 제국은 불가리아와 그리스 북부 지역을 모두 석권하여 직할 영토로 만들거나 속국으로 삼았다. 심지어 1394년부터 1402년까지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포위하여 위협을 가하기까지 하였다. 비록 동부에서 발흥한 티무르 제국에게 크게 패해 무라트 1세가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긴 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끊임없이 제국의 영토를 팽창시켰고, 그 결과 비잔티움 제국의 강역은 현저하게 축소되어 15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콘스탄티누폴리스 근처와 해외의 몇몇 섬들에만 간신히 통치력이 미치는 수준이었다.

발칸 반도 지역의 본토가 이러한 상황인데 해외 지역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문화적, 역사적 동질감은 국경선으로 잘려나갈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Sicilia)가 비잔티움 제국의 강역에서 제외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긴 했어도, 여전히 그 지역에는 그리스계 주민들이 대대손손 살고 있었다. 이 주민들의 신앙은 로마 가톨릭보다는 동방 정교회에 더 가까웠는데 그들은 허락된 동방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유지했고, 언어도 이탈리아화된 그리스어 방언2 을 사용했다. 이 칼라브리아의 도시 세미나라(Seminara)에서는 14세기 유명한 철학자들이 배출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편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바를람(Βαρλαάμ)이었다. 그는 학식이 뛰어난 철학자이자 신학자였고, 동시에 매우 독선적이고 날선 태도로 많은 적들을 만들기로 유명한 비잔틴 수도사였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르네상스(Renaissance)라 불리는 인문주의가 태동하는 시기였으나 여전히 안셀모(Anselmo), 토마소(Tommaso), 그리고 보나벤투라(Bonaventura) 등 쟁쟁한 철학자들에 의해 완성된 스콜라 철학이 강력하게 서방 신학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었다. 스콜라 철학은 이슬람 세계를 통해서 새롭게 들여온 아리스토텔레스(Αριστοτέλης) 철학의 재발견이었다. 당시 바를람은 서방에서 재발견되어 꽃피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정수를 제대로 알기 위해 호기롭게 1320년에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이주하여 학문을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그의 학식을 높이 산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Ανδρόνικος Γ')의 호의로 바를람은 대학 교수가 되었고, 나중에는 수도원장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의 이콘 3

동방 교회의 학자요 수도사로서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상주하던 바를람은 1333년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요한 22세(Ioannes XXII: 1316-1334)의 사절단이 교회의 일치를 논하기 위해 콘스탄티누폴리스를 방문했을 때 동방교회 협상 파트너로서 참석하였고, 여기서 그는 서방 교회의 교리, 특히 필리오케(filioque) 교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논설을 발표했다. 그가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 데에는 아마도 그의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이용해서 서방 교회 사절단들을 기죽이려는 동방 교회의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공격적인 논설문을 통해 드러난 바에 따르면, 서방 교회의 이중발출설(二重發出說)을 부정하려고 했던 그의 입장이 동방 교회의 일반 주장과 표면적으로는 같아 보였어도 세세하게 따져보자면 중심 근거가 다른 정교회 성직자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논거는 간단했다. 철학적 사유로는 물질 세계를 넘어선 영적 존재인 신에 대해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이중발출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서방 교회의 교리들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마치 신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니 지식적이든 경험적이든 그 어떠한 것들로도 신의 섭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이러한 주장은 신비주의적인 전통을 잃지 않고 보존해 온 동방 교회의 수도원 전통과는 다소 배치되는 조금 위험한 주장이었고, 이를 간파한 동방 교회 관계자는 동방 정교회의 성산인 아토스(Άθως) 산의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한 저명한 수도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 수도사가 바로 본 편의 주인공이자 승리자인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Γρηγόριος Παλαμάς)이다.

그리고리오스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꽤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이를 칭송한 어떤 이들은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 혈육을 입어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면 그리고리오스를 진심으로 찬양할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는 20살이 되던 해에 수도원으로 물러나 영적인 지혜와 지식을 얻고자 수도 생활에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비록 그는 뛰어난 학력을 갖춘 대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명성은 해가 갈수록 높아졌고 그의 깊은 영성을 따르는 무리가 점차 많아졌다.

1336년 그리고리오스는 글을 써서 교황 요한 22세가 시도하는 동서교회의 일치에 대한 반대 의견을 분명히 밝힌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동시에 바를람이 서방 교회 사절단들을 공박하기 위해 내세웠던 논거 역시 싸잡아 비판하였다. 바를람의 주장이 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해버리고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히 하느님의 본질, 곧 우시아(οὐσία)를 인간이 인지할 수는 없으나 하느님의 사역하심, 곧 에네르기아(ενέργεια)을 통해 하느님을 경험하고 알 수 있으며, 그 앎이라는 것은 신앙에서 연원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리오스의 태도는 바를람이 곧바로 써 낸 반박논설문을 접하게 되면서 더욱 완고해졌고, 두 사람을 서로 잘 알고 있던 그리고리오스 아킨디노스(Γρηγόριος Ακίνδυνος)가 중재를 해 주려고 큰 노력을 들였으나 서로 많은 서신들이 오가면서 둘은 정말로 서로를 원수같이 여기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숭상하다시피 한 바를람에게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의 입장은 불가해하다기보다는 천박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테살로니키(Θεσσαλονίκη)를 여행하는 도중, 신을 체험하기 위해 이상한 자세를 한 채 기도하는 수도사들의 무리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그들은 어떠한 형태의 기도에 동참하게 되면 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다소 허술한 지식을 가진 영성 신학 수도사 집단이었다. 바를람은 1338년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다시 들어갔고, 괴상한 형상으로 기도를 드리는 정교회 수도사들을 조롱하면서 그들을 옴팔로프시코이(ομφαλοψυχοι)라고 부르며 조롱했다.4 당시 수도사들은 정신을 집중하고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한다는 의미로 몸을 구푸려 배꼽을 응시하면서 특정한 어구를 되뇌이면서 호흡을 조절하며 기도했다. 이렇게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고요한 상태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신을 체험하고 알 수 있게 된다는 통념 및 사상을 헤시카즘(hesychasm)이라고 일컫는다. 물질 세계의 인간이 어떠한 방식을 총동원해도 비물질적, 영적인 존재인 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를람이 완고한 반(反)헤시카즘 운동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논쟁의 초점은 위(僞, pseudo-) 디오니시오스(Διονύσιος)의 저작으로 옮겨간다.5 바를람은 디오니시오스가 주장했듯이 신에 대한 앎은 인간의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신을 아예 인간의 이성(理性)과 감각(感覺)으로부터 저 멀리 떼어내 버렸으며 따라서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서는 신과의 대면, 혹은 직접적인 경험에 의한 앎이 배제되어 버리므로 오직 수사학적 삼단논법(三段論法)과 같은 방식만이 신을 논할 때 사용 가능한 방법이라고 했다. 이에 반해 그리고리오스는 신이 앎으로부터 초월하는 것 뿐만 아니라 무지로부터도 초월하는 존재라고 주장했으며 마찬가지로 명상과 기도는 신과의 합일(合一)을 추구하는 행동이지 신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 혹은 알려고 하는 것이나 모르려고 하는 행동들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합일에 동참함으로서 신에 대한 참된 깨달음과 조우가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여기서 그리고리오스는 매우 중요한 '창조되지 않은 빛(Ἄκτιστον Φῶς)'에 대해 이야기한다. 헤시카즘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창조되지 않은 빛의 영감을 받아 신적인 세계를 경험하는 것인데, 이 빛은 성경의 여러 고사를 통해 소개된 바 있으며 그 빛이 바로 예수가 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變貌)하여 모세와 엘리야와 만나 이야기를 하던 그 때 뿜여져나왔던 광채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위 디오니시오스의 이콘 6

여기서 그리고리오스를 비롯한 헤시카즘의 지지자들은 신의 본질(우시아)과 에너지(에네르기아)를 구분하여 이르곤 했다. 즉 신의 본질은 인간이 지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불가해한 초월적인 면이지만, 신이 세상에 펼치는 그 능력과 사역을 통칭하는 에너지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면이라고 설파했다. 본질과 에너지는 다른 면이기는 하지만 그 속성은 모두 신적인 것이므로 에너지에도 신의 속성이 깃들여 있기에 이는 창조되지 않은 것이며 또한 영원한 것이다. 헤시카즘 지지자들은 앞서 소개한 창조되지 않은 빛이 곧 하느님의 에너지이며 그것을 통해서만이 피조물들의 신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진다고 주장하여 자신들의 명상과 기도를 정당화했다.

바를람은 동일한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철학에 뿌리를 두었어도 어째서 이러한 상이한 결론에 이를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인간이 경험하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창조되지 않은 무언가일 수 있는가 반문하였고 결국 그리고리오스가 에너지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신의 창조행위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엔 그리고리우스의 주장은 명백하게 범신론적(凡神論的) 주장이었다. 신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분한다는 말이 신의 속성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 있다는 주장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토마소가 주장한 대로 신은 모든 그의 피조물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이자 모든 행위의 원동력 및 근원 원리인 소위 순수 현실태(actus purus)일진대 대체 무슨 구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만일 그러한 속성의 구분이 가능하다면, 성자와 성령은 신의 어떤 속성을 공유했을 것이고 또한 피조물들은 모두 신의 속성으로부터 지음받았다는 것인데 그 피조물들도 성자와 성령처럼 신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에 맞서 그리고리오스는 성자의 태어난 것과 성령의 발출은 오직 신적 본질의 유일한 원천인 성부 하느님의 본질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에너지에 의해 된 것으로 창조된 것은 본질이 관여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구분해 두었다.

라파엘로(Raffaello)가 그린 아테네 학당(Scuola di Atene) 그림 정면에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 윤리학 책을 들고 손바닥을 펴서 땅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하늘을 가리키며 이데아를 논하는 플라톤의 모습이 서로 대조된다. 7

이에 바를람은 그리고리오스를 비롯한 헤시카즘 전체를 과거 4세기 경의 에우티케스(εὐχίτης), 곧 메살리안주의(Messalianism) 신봉자들이라고 비난하는 논설을 발표한다. 메살리안주의자들은 초기 기독교 시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로 성만찬과 세례 등의 성사에 의한 은혜를 경시하고 기도와 명상을 통해 신의 은혜를 경험하려고하는 영성주의자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이들의 사상은 경건한 초기 기독교 사막 수도원 운동을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했으나,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 교회가 행사하는 성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직자들의 비판을 받았고 결국 니카이아 공의회는 메살리안주의자들이 이단임이 선포하였다. 바를람은 그리고리오스를 비롯한 헤시카즘주의자들이 이들 메살리안주의자들과 다를바 없는 주장을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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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시카즘 공의회

이제 바를람은 책과 논설로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고, 당시 세계총대주교였던 요안니스 14세(Ιωάννης ΙΔ΄: 1334-1347)에게 헤시카즘 수도사들을 엄벌해달라고 청원한다. 요안니스 14세는 헤시카즘에 반대하는 사람이었지만 교리에 관한 일로 분쟁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바를람의 탄원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하지만 점점 논란은 확산되어갔고, 뜻밖에도 황제였던 안드로니코스 3세가 자기 치세 기간 안에 이 분쟁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결국 1341년에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공의회에는 황제에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였고, 위 디오니시오스의 저작을 둘러싸고 헤시카즘에 반대하는 쪽과 지지하는 쪽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3세는 제국 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그리고리오스의 주장이 더 정교 신앙에 가깝다고 느꼈고, 공의회 말미에 헤시카즘의 승리를 선언했다. 바를람과 그의 주장은 단죄받았고, 그의 저작은 모두 문제의 저작으로 판단되었다. 바를람은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회개하기로 했지만 그길로 완전히 비잔티움 제국을 떠나 이탈리아 반도로 돌아갔고, 당시 아비뇽(Avignon)에 있던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VI, 1342-1352)는 그를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제라체(Gerace)의 주교로 삼아 동방 가톨릭 교회8를 사목하도록 배려해주었다.

바를람을 대신하여 헤시카즘 반대의 선봉에 선 사람은 놀랍게도 두 진영을 중재시키려고 노력했던 그리고리오스 아킨디노스였다. 그는 반대 세력을 규합하여 다시 황제에게 공의회를 열 것을 청원하였고, 당시 황제의 섭정으로 있던 칸타쿠지노스가 공의회 개최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칸타쿠지노스를 비롯한 보수적인 귀족가문은 수도원과 정치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었는지라 헤시카즘 지지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결국 1344년 재차 열린 공의회에서 헤시카즘은 다시 올바른 신앙으로 선포되었고 그리고리오스 아킨디노스는 단죄받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기간동안 이 장 가장 처음에 잠깐 언급한 비잔티움 제국 내전이 발발하고 말았다. 세계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는 팔레올로고스 가문을 지지하였고, 칸타쿠지노스로 대변되는 지배층과 수도사 세력의 권위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역시 팔레올로고스 가문을 지지하였다. 자연히 정치권력 싸움에 종교적 색채가 물들기 시작했고, 칸타쿠지노스파가 거의 헤시카즘 지지자와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어린 황제를 지지하는 총대주교는 종교적인 힘을 동원하여 칸타쿠지노스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반대파를 눌러버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간 황제의 권위 앞에서 펴지 못했던 총대주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1345년에 새로운 공의회를 주재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목적대로 헤시카즘 지지자들을 죄다 파문해 버리는 것에 성공한다. 그리고 헤시카즘의 선봉장이었던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를 이단의 혐의로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어 헤시카즘의 확산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바를람과 그리고리오스 아킨디노스를 비롯한 헤시카즘 반대론자들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1347년, 칸타쿠지노스 가문의 요안니스 6세가 내전 종식을 위한 협상을 벌였고 그 결과 제국의 공동 황제로 등극하게 되면서 상황이 역전되어 버린 것이다. 황제 요안니스 6세는 1347년 2월에 공의회를 열어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를 폐위시켜 쫓아내고, 1345년에 단죄받아 쫓겨났던 주교 이시도로스 1세(Ισίδωρος Α΄: 1347-1349)를 총대주교좌에 앉혔다.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의 제자였던 이시도로스 1세는 총대주교가 된 즉시 스승을 옥에서 풀어내어 테살로니키의 주교로 복권시켰다. 이에 반발한 헤시카즘 반대론자들은 이시도로스를 적법한 세계총대주교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으며 여전히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를 파문된 대상으로 여겼다. 아르세니오스(Αρσένιος) 분열 이후 다시한번 동방 교회에 분열이 찾아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1348년에 그리고리오스 아킨디노스가 사망하면서 반헤시카즘 운동의 구심점이 사라지게 되었다. 신학을 연구하는 천문학자이자 역사가인 니키포로스 그리고라스(Νικηφόρος Γρηγοράς)가 반헤시카즘 세력을 다시 규합하였지만 칸타쿠지노스의 재위 기간 동안 헤시카즘은 점차 정통 신앙으로서 그 기반을 다져가기 시작한다.

헤시카즘 공의회를 주재하는 비잔티움 황제 요안니스 6세.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을 내전에 참여시킴으로써 제국의 운명은 더욱 암울해지고 말았다. 9

그리고 1349년 이시도로스 1세가 선종하자 총대주교 후임으로 헤시카즘 지지자인 수도사 칼리스토스 1세(Κάλλιστος Α΄, 1350-1353, 1355-1363)가 재빨리 등극하게 되었고, 이 칼리스토스의 재위 기간 중에 헤시카즘 논쟁을 최종 종결하게 되는 공의회가 바로 1351년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열리게 된다. 여기서 헤시카즘은 정통 신앙으로 재확인 받았으며 바를람을 비롯하여 그리고리오스 아킨디오스, 니키포로스 그리고라스 등 반대파는 모두 파문당하고 단죄당했다.

그러나 헤시카즘 반대론자들에게 최후의 기회가 주어졌으니 때는 1354년, 헤시카즘을 옹호하던 황제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가 권력을 잃어 황제의 자리를 내어놓은 채 수도원에 칩거하게 된 것이었다.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황제를 오랫동안 지지했던 헤시카즘 반대론자들은 드디어 설욕할 때라고 여겼고 에페소스(Έφεσος)에서 회의를 열어 헤시카즘을 단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지난 10여년동안 헤시카즘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는 사이 헤시카즘이 어느새 뿌리 깊이 주류 신앙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었다. 당장 세계총대주교에서부터 성직자 다수, 그리고 그들의 사목적 지도를 박는 평신도들이 모두 헤시카즘을 긍정하고 옳은 것으로 여기고 있던 것이었다. 헤시카즘의 결정적인 최종 승리였다.

여기에는 동방 교회에 뿌리깊게 박혀 있던 반서방 정서와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헤시카즘 논쟁의 한 축이었던 바를람의 주장과 사상은 서방의 스콜라 철학으로 대변되는 (이슬람을 통해 수입된) 라틴화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었다. 이에 반해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는 헬레니즘 세계에서 여전히 전통적으로 전해지던 그리스 철학 그 자체에서 연원한 주장을 펼쳤고, 거기에는 동방교회의 영성 중심의 분위기와 그 전통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그리고리오스의 가르침을 더욱 동방교회답다고 여길만 했다. 더구나 바를람은 논쟁에서 지게 되자 회개하고 동방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기는 커녕 서방교회로 건너가 로마 교황 밑에서 성직을 얻었으니 이것은 동방 교회 교인들을 심히 불쾌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헤시카즘을 반대한다는 것은 동방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을 반대한다는 것으로, 곧 자신들 입장에서 이단적인 신학을 유포하는 라틴인들과 같은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경멸적인 표현으로 이러한 사람들은 '친(親)라틴파'라는 뜻의 라티노프론(λατινόφρων)이라고 불리었다.

에크하르트의 초상화. 10

물론 서방 교회에서도 이러한 신비주의적 신학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세 이후로 서방 세계에서는 엄밀한 스콜라 철학이 해체되면서 다양한 신학적 사고들이 전개되었다. 거기에는 독일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가 주창한 신비주의 신학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것은 동방 교회의 주류였던 영성 운동과 신비주의적 신학과 완전히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모든 피조물은 존재성이 없는 무(無)의 단계이고, 오직 신이 인간 안에 내면화 되심을 통해 인간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보았으며,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신과의 합일을 넘어서 나중에는 신에 대한 초월까지도 역설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당대 그리스 철학 뿐 아니라 수많은 다양한 사상을 독특하게 집대성한 에크하르트의 노력의 정수였고, 선불교(Zen Buddihsim)에서 논하는 해탈의 의미와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방 신학은 신비주의 신학을 단죄하였고 요한 22세는 칙서 '인 아르고 도미니코(In argo Dominico: 주님의 뜰에서)'를 내려 에크하르트의 주장에 모두 이단성이 있다고 공포하였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서는 여전히 신에 대한 이해를 위한 영성 신학과 그 수도의 방식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물론 헤시카즘이 초기에 인정받기 시작할 때쯤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의 논쟁에 대해 소상히 잘 알지 못하는 외지의 주교들 중 일부는 헤시카즘의 교리화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368년 세계총대주교 필로테오스(Φιλόθεος: 1353-1355, 1364-1376)는 헤시카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를 성인으로 추대하였고 헤시카즘에 반대하는 세력에 압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수십년동안 펼쳐지면서 15세기에 접어들어 헤시카즘은 대부분은 동방교회에서 정통 신앙으로 인정받았고 그 정통성은 지금까지 내려오게 된다.

여기서 필로테오스가 동서교회 일치에 극렬히 반대하였던 사람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의 헤시카즘이 단순한 영성신학 논쟁 주제중 하나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바로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헤시카즘 논쟁의 배경에는 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 동일한 위(僞)디오니시오스의 저작을 두고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엇갈린 사고가 일으킨 철학적 충돌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필리오케 논쟁을 비롯하여 교리 및 전통의 해석상 동서 교회의 차이로 인해 빚어진 분란은 몇 차례 있어왔다. 하지만 헤시카즘 논쟁은 아예 동방 교회만의 새로운 교리 성립을 전제로 한 것이라서 지금까지의 논쟁과는 그 의미가 사뭇 남다르다 할 수 있겠다. 정교하게 각자 성립된 두 철학적 사유 사이에는 절충안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것을 다시한 번 여실히 보여주는 논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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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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