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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2-14

Religion 2-14

동서교회 대분열 14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14

서방 교회 대이교 I
Western Schism I


목차

  1. 필리프 4세의 도전
  2.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맞대응
  3. 아비뇽 유수
  4. 참고 사이트 및 출처

필리프 4세의 도전

동서교회 대분열을 봉합하고자 했던 최후의 노력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14-15세기의 서방 교회 대분열과 동시대에 있었던 동방 교회 교리의 변화에 대해 살펴봐야겠다. 먼저 서방 교회의 분열을 살피기 위해 이야기의 주 무대를 프랑스로 옮긴다. 프랑스 카페(Capet) 왕조의 필리프 4세(Philip IV)는 빼어난 외모로 르 벨(le Bel)1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필리프 4세의 할아버지는 십자군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성인으로 인정된 루이 9세(Louis IX)였고, 아버지인 필리프 3세는 교황 마르티노 4세(Martinus IV: 1281-1285)가 일으킨 아라곤 십자군에 참전하였던 전력이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이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왕국은 교황좌와 매우 긴밀한 관계가 되었고 때로는 지지와 협조를 보내면서, 때로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서 서로의 이권을 챙겼다.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좌) 필리프 3세와2 그의 아들 (우) 필리프 4세 3

그러나 필리프 4세의 대에 이르러 프랑스는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하고 말았다. 당시 잉글랜드(England)의 왕 에드워드 1세(Edward I)는 노르망디(Normandy)의 공작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표면적으로는 프랑스 왕의 봉신(奉臣)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프랑스 왕이 직접 통치하는 영지보다 외국인 왕을 겸하는 에드워드 1세 및 다른 영주들이 통치하는 영지가 더 넓었다. 왕의 영향력이 정작 왕국 내에서 밀리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었다. 또한 점차 중앙집권적 군주정 및 국민국가로 나아가려던 프랑스에게 파탄난 재정은 큰 걸림돌이었다. 다른 세력들을 꺾으려면 전쟁을 해야 하고, 전쟁을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프랑스 왕국의 금고는 기나긴 유럽 패권 다툼 중에 거의 비어가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왕국의 재무부가 '성전 기사단(Ordre du Temple)'4이라고 할 정도로 왕국의 재정은 피폐하였는데 정부가 기사단에게 엄청난 채무를 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전 기사단의 이름은 십자군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고귀해졌으니 왕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존재를 꺼려 하는 왕정(王政) 입장에서는 이들이 별로 마뜩치 않은 것이었다.

필리프 4세는 분명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현실적인 이익을 철저하게 추구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드워드 1세와 마찬가지로 그는 각종 물건들에 세금을 매겼고 유대인들을 쫓아낸 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하지만 필리프 4세가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에 꺼낸 카드 중 궁극의 마지막 카드는 성직자 과세였다. 프랑스 사회는 성직자(1계급), 영주/귀족(2계급), 평민(3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중 성직자 계급은 면세의 혜택을 누리며 넓은 영토와 농노,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비록 적은 수지만 성직자들에게서 과세를 한다면 다수의 평민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이 프랑스 재정을 채우게 될 것이었다.

면세의 특권을 누리고 있던 성직자 계급은 이 정책에 당연히 반발하게 되었다. 1215년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 1198-1216)의 주재 하에 라테라노(Laterano)에서 열린 공의회는 교황의 동의 없이는 성직자 과세를 금하는 법령 46항을 추인한 바 있었다. 성직자들이 지금까지 누려온 특혜를 포기하라는 세속 권력의 수장에게 강하게 항의하는 것은 당연했다. 프랑스의 시토(Citeaux) 수도회 소속 수사들은 그들의 영적 수장, 곧 오직 순명(順命)할 대상인 교황에게 상소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교황은 보니파시오 8세(Bonifacius VIII: 1294-1303)였는데, 매우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세속의 권력보다 교황의 권력이 더 우월하다는 그의 생각은 그 어떤 교황보다 확고했으며, 자신 스스로 복잡한 유럽 국제 정치에 직접 끼어들어 온갖 일들을 중재하거나 스스로 이끌었다.

보니파시오 8세의 초상화. 보니파시오 8세의 재위기간은 교권우위 시대의 마지막 정점이었다. 5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와 그의 맞상대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의 성직자 과세 정책이 교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보았으며 이에 1296년 칙령 '클레리키스 라이코스(Clericis Laicos: 성직자와 평신도)'를 내린다. 내용은 단순했다. 성직자들은 평신도와 같이 세속 군주에게 복종해야 하지만, 교회의 재산이 세속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자문을 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교회의 재산을 세속 권력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없으되 오직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 되는 교황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수위권을 강하게 믿고 있던 교황으로서 내릴 수 있는 당연한 조치 중 하나였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필리프 4세가 이 칙령에 크게 분노한 것은 이 칙령이 담고 있는 매우 불편한 그 고압적인 자세 때문이었다. 칙령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말들이 등장한다.

… 예부터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고 현재의 경험에 비추어봐서도 이것은 명백한 사실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만족하지 않고 금지된 것을 좇는가 하면 위법적인 것을 좇고자 고삐를 풀기도 할 정도이니 말이다.

… 이와 같이 황제나 왕이나 대공이나 공작이나 남작이나 행정관이나 관리들은 그 어떠한 이름으로든 어느 도시나 성이나 어떤 장소에 언제 있든지 어떠한 덕성이나 조건 혹은 평판을 가졌든지간에 이러한 세금을 부과하거나 요구하거나 받아내는 자, 혹은 성당 내부에 있는 교회와 성직자들의 소유를 빼앗거나 점유하거나 혹은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는 자, 혹은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자, 혹은 그렇게 빼앗은 물건들을 받아 가지는 자,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에 공개적으로 또는 비밀스럽게 조력하거나 자문해 주거나 찬동한 자들은 그러한 행동 자체만으로도 파문의 형벌을 받게 될지어다.

… 성직자들에게 강력하게 명하노니 복종한답시고 혹은 폐위되는 처벌 때문에 교황좌의 허락도 없이 과세의 요구를 절대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중략) 혹여나 세금을 주거나 받는 자가 있다면 그 행동 자체만으로 그들은 파문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 파문과 출교의 징벌로부터는 교황좌의 특별한 권한과 허락 없이는 어떤 누구도 용서받지 못할 것인데, 이는 절대로 세속 권력의 끔찍한 권력 남용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뜻이다.

… 어느 누구도 우리의 헌장과 금지와 칙령을 다음 이 종이를 위반하지 말 것이며 무엄하게도 이것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지어다. 하지만 혹 그러한 일을 도모하는 자가 있거든 그는 큰 화를 당하게 될지니 곧 전능하신 하느님과 그의 축복받은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진노로다.

분노한 필리프 4세는 프랑스는 교황령에 공급되는 재화의 수송을 완전히 차단시킨다. 당시 교황청의 주 수입원 중 하나가 프랑스 교회였기 때문에 교황청의 수입은 급감하게 되었고, 이에 보니파시오 8세는 칙령 '인에파빌리스 아모르(Ineffabilis Amor: 형언할 수 없는 사랑)'를 내려 필리프 4세의 정책을 비난하였을 뿐 아니라 영국과 신성 로마 제국과 연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교황의 권위가 이토록 세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필리프 4세는 우선 민심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은근히 공작을 펼친다. 그는 다양한 팜플렛을 은밀히 살포하여 왕의 권한을 초월하는 교황의 권력이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의 전임교황이었던 첼레스티노 5세는 원래 은둔하며 수도생활을 하는 수사였다. 첼레스티노 5세는 마치 세속 군주처럼 국제정치적 노력을 필사적으로 벌여야 하는 교황직이 수도사 생활에 적합한 자기가 맡기에는 너무 역부족이라는 걸 알고 교황직을 사임하했다. 7

때마침 보니파시오 8세는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정치적 문제에 빠져들게 되어 프랑스와 대립하느라 역량을 소모할 수 없었다. 1297년에 자신과 자신이 속한 카에타니(Caetani) 가문에 대항하는 또다른 이탈리아의 유력 가문 콜론나(Colonna) 가문6이 이탈리아의 팔레스트리나(Palestrina)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명분인즉 보니파시오 8세의 전임 교황인 첼레스티노 5세(Celestinus V: 1294)가 부당하게 사임하였고, 여기에는 교황좌 등극 야욕을 드러낸 보니파시오 8세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것이었다. 자기 가문의 번영과 로마에서의 권위를 확고하게 하는 게 더욱 급한 일이 된 교황으로서는 프랑스와 괜한 소모전을 지속시킬 필요가 없었다.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여 한발짝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1297년 두 차례 칙령을 통해 프랑스의 성직자들은 자원하여 내는 재물의 경우 세속 권력이 세속적인 목적으로 걷어 이용할 수 있다고 명시했고 이러한 과세는 국가적 위기상황에 긴급할 때 허용된다고 했다. 이는 사실상 필리프 4세의 성직자 과세를 인정해 준 것이었다. 이에 더 나아가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의 할아버지이자 십자군 영웅인 루이 9세(Louis IX)를 성인으로 시성할 것을 결정하여 둘 사이의 화해 분위기는 더없이 강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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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맞대응

하지만 교황이 이탈리아에서 맞닥뜨린 불리한 상황이 극적으로 타개되면서 필리프 4세의 정책을 지켜보는 보니파시오 8세의 심경은 점차 불편해져만 갔다. 1298년에 교황은 친교황파 구엘피(Guelfi)인 오르시니(Orsini) 가문과 결탁하여 콜론나 가문의 팔레스트리나를 굴복시켜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8 또한 1300년에 희년(喜年)을 선포하면서 전 세계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를 찾게끔 했는데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자신감을 되찾은 교황은 필리프 4세를 견제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마침 1301년에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남부 지역인 팔미에(Palmier)의 주교였던 베르나르 세세(Bernard Saisset)가 프랑스 정부에 의해 대역죄 및 신성모독죄로 체포되었다. 사실 이 죄목은 당시 프랑스 중앙 정부가 푸아(Foix)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남부 지역 주민들을 징벌할 때 자주 붙인 죄목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독립적이었던 프랑스 남부 사람들이 카페 왕조의 중앙집권적 통치를 거부했기 때문에 자주 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당시 법관이자 왕의 고문인 피에르 플로트(Pierre Flotte)는 문서를 날조하여 하지도 않은 말과 행동들을 근거로 베르나르 세세를 고소하였고 이로 인해 팔미에의 주교는 감금되고 말았다. 그런데 베르나르 세세는 보니파시오 8세가 잘 아는 친구 중 하나였다.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가 자신에게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했다고 여겼으며 이제야말로 방자한 프랑스의 젊은 국왕을 훈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이 시기에 쓴 칙령들은 모두 프랑스 국왕에 대한 교황의 고압적인, 그리고 우월적인 태도를 담고 있었다. 특히 필리프 4세에게 보낸 서한 '아우스쿨타 필리(Ausculta, Fili: 들을지어다, 아들아)'에서는 성직자에 대해 과세를 하는 필리프 4세의 반가톨릭 정책들은 모두 위법적이며 교황을 비롯한 교권은 세속 권력보다 우월하고 이는 하느님의 정하심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다음해인 1302년 11월 1일, 곧 모든 성인들의 축일인 만성절(萬聖節)에 로마에서 주교 회의를 열기로 하고 프랑스 주교들도 이에 참석하도록 소집령을 내렸다.

하지만 필리프 4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더 굳세게 맞선다. 그가 취한 첫번째 행동은 처음으로 성직자, 귀족, 평민들의 대표로 구성된 프랑스 왕국 유일의 의회 기구인 삼부회(三部會, États généraux)를 소집한 것으로, 여기서 성직자 과세를 비롯한 반교황 정책들에 대한 폭넓은 지지를 확인받았다. 기세가 등등해진 프랑스의 왕은 교황이 열겠다고 한 1302년의 주교 회의에 프랑스 주교들이 참석하는 것을 가로막았으며, 이러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간 주교들의 경우 그들이 속한 교구의 재산을 몰수하는 행동을 취했다. 결국 상당수의 주교들이 교황이 개최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림은 1614년에 열린 삼부회로, 이후로 175년간 안 열리다가 루이 16세(Louis XVI)가 과세 문제로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그것이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 9

이에 대한 최후의 일격으로써 보니파시오 8세는 1302년 11월 18일, 세속권력에 대한 교황과 교권의 우위성을 집약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선포한 저 유명한 칙령 '우남 상탐(Unam Sanctam: 하나의 거룩한)을 반포한다. 교회사학자들은 이 칙령과 이를 반포한 보니파시오 8세를 교권의 위세가 정점에 이르렀다는 증명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점으로 여긴다. 이 칙령은 워낙 유명하고 당시 대립에 대한 교황의 생각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문서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믿음을 좇아서 우리는 교회가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임을 변치 않고 믿는다. 우리는 교회를 굳세게 믿으며 교회 바깥에는 구원도 없고 죄 사함도 없음을 순전히 믿는다. 아가서에 등장하는 남편이 말하기를 '티없는 나의 비둘기는 오직 하나뿐. 낳아준 어머니에겐 둘도 없는 외동딸'이라고 하는 그녀는 홀로 하나인 신비로운 몸을 상징하며 그 몸의 머리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느님이시로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가 하나요, 믿음이 하나요, 또한 세례도 하나이다. 홍수 시대 때에 오직 노아의 방주 하나만 있었으며 교회를 상징하는 이 방주에는 오직 한 인도자가 있었을 뿐이니 바로 노아였다. 성경이 말하길 방주 밖에 있던 것들 곧 지상에 있던 모든 것들은 파괴되었다.

우리가 하나라고 생각하며 축복하는 이 교회에 대하여는 주님께서도 선지자의 입을 통해 '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 개 입에서 빼내 주소서.'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그의 영혼, 곧 자기 자신을 찬미했고, 마음과 몸을 찬미했는데 여기서 몸은 곧 교회이다. 그는 신부와의 연합과 믿음, 성사, 그리고 교회의 사랑 때문에 그의 몸을 하나라고 일컬으셨다. 이것은 위에서 아래까지 혼솔 없이 통으로 짠 주님의 옷과 같아서 찢겨지지 않고 제비 뽑아 가져간 바 되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인 교회에는 오직 하나의 몸과 머리가 있을 뿐이니 괴물같이 두 개의 머리가 있지 않으며 그 머리는 곧 그리스도와 그의 대리자인 베드로, 그리고 베드로의 후계자들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길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기 때문인데, 이는 양이 특별한 사람이 아닌 보편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들을 모두 베드로에게 맡기셨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이나 다른 이들이 베드로와 그 후계자들의 돌봄을 받지 않겠노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양떼가 아님을 고백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복음서에서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 떼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내용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된 것은 교회와 권력에는 두 개의 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영적인 칼이며 다른 하나는 세속적인 칼이다. 사도들이 '주님, 여기에 ㅡ 즉, 교회에 있다는 뜻이다. ㅡ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라고 얘기했을 때 주님께서는 칼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만 하면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세속적인 칼이 베드로의 권능 안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자는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라고 명령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분명 제대로 못 들은 자이다. 따라서 영적인 칼과 물질적인 칼은 교회의 권세 안에 있는 것인데, 영적인 칼은 교회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것이며 물질적인 칼은 교회에 의해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영적인 칼은 사제들의 손에 있으며 물질적인 칼은 왕들과 병사들의 손에 있을진대 사제들의 뜻과 용인 하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칼은 다른 칼에 종속되어야 하며 세속적인 권력은 영적인 권세를 따라야 한다. 사도가 말한바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셨으니 만약 한 칼이 다른 칼에 복종하지 않고 열등한 것이 다른 것에 의해 따르지 않는다면 이들은 세움 받을 수 없다. 복된 디오니시오(Dionysius)10에 따르면 가장 낮은 것이 중간자를 통해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는 것이 신성의 법이다. 우주의 질서에 따르면 모든 것들이 다 동시에 똑같은 형태로 마지막을 향하는 것이 아니며 중간자에 의해 낮은 것들이, 그리고 우월한 것에 의해 열등한 것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분명히 인정해야 할 것은 영적인 권세는 위엄에서나 고귀함에서나 어떠한 세속 권력보다 우월한다는 것인데 이는 영적인 것이 세속적인 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는 십일조의 봉납과 축복과 축성을 통해 명백히 인지할 수 있고, 권력이 인정되는 방식, 영토 내에서 정부가 여겨지는 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우리가 목도하는 진실에 따르자면, 세속 권력을 세우고, 만일 그것이 선하지 않다면 법정에 앉힐 수 있는 것은 영적인 권력의 몫이다. 그리고 교회와 교회의 권력에 대해서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한바 '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 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 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만일 지상의 권력이 오류를 범한다면 영적인 권력이 그것을 심판할 것이다. 만일 낮은 영적인 권력이 오류를 범한다면 상위에 있는 영적인 권력이 그것을 심판할 것이다. 그러나 상위에 있는 영적인 권력이 오류를 범한다면 그것은 오직 사람이 아닌 하느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으며 이는 사도가 '영적인 사람은 무엇이나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사람 자신은 아무에게서도 판단받지 않습니다.'라고 증언한 바 그대로이다.

비록 이 권위가 사람에게 주어져서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적인 것이 아니고 신적인 것이며 신적인 말씀을 통해 베드로에게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확증된 것이니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거짓되고 이단적이라고 선언한 마니 ㅡ 마니교의 창시자 ㅡ 의 주장대로 태초에 두 개의 원리가 존재했다는 것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면 누구든지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의 증언에 따르면 '태초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고 말씀하셨지 태초가 여럿 있다고 표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선언하고 또 주장하노니, 모든 인간 피조물들은 로마의 제사장11에게 복종하는 것이 구원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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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유수

이 칙령을 본 필리프 4세는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파리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교황을 고소하는 결정을 추인한다. 여기에 참석하지 않은 성직자들은 처벌을 받았으며, 참석한 주교들과 귀족들은 보니파시오 8세가 살인, 남색(男色), 이교도적인 예언 등을 일삼았으며 교리에 부정한 악을 깃들게 하였다면서 세계공의회를 열어 그를 폐위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필리프 4세는 플랑드르(Flandre) 주민들의 반란 와중에 숨진 피에르 플로트의 뒤를 이어 왕의 고문이 된 기욤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를 이탈리아로 급파한다. 그는 토스카나 지방에서 교황의 정적들, 특히 콜론나 가문과 접견하였고 적절한 때에 교황과 담판을 벌이려 했으나 일이 부드럽게 진행되지 않을 것을 간파하고 아주 극적인 일을 벌이기로 은밀히 모의했다.

당시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가 여전히 반교황 책동을 벌이는 것을 보고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고 치밀하게 준비 중이었다. 그는 또다른 칙령의 작성을 준비 중이었고 이를 통해 필리프 4세와 그를 따르는 세력을 일거에 파문 조치할 계획이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곳이자 교황권과 세속 권력간의 투쟁 해결 장소로도 역사적으로 유명한 아나니(Anagni)에서 정해 거기서 칙령을 반포할 예정이었다. 예정된 날짜는 9월 8일이었다. 그러나 기욤과 콜론나 가문은 이미 아나니의 지도자들과 함께 공모를 끝마친 상태였고, 그들의 거사일은 바로 9월 7일이었다.

그날 교황의 거처가 습격당했다. 교황을 돕는 자들은 기욤 드 노가레와 콜론나 세력에 항복했고 그들은 계획대로 교황을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교황은 이들의 고압적인 언사와 태도, 그리고 구타와 폭행에 역대 교황들이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수모를 당했지만 그럼에도 교황으로서의 권위를 굽히지 않았다고 전한다. 1298년에 교황의 공격으로 인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었던 콜론나 가문은 당장 보니파시오 8세를 죽이자고 성화를 냈으나 다른 이들이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극구 만류했으며, 기욤 드 노가레는 보다 확실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내기 위해 교황을 공의회의 재판대로 보내기를 희망했다. 교황의 처분을 두고 의견차가 발생하여 행동이 지체되자 이들의 공모에 협조했던 아나니 사람들은 교황을 기만한 대죄로 인해 벌을 받지 않을까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교황에 우호적인 아나니 시민들은 교황이 납치된 지 사흘째인 9월 9일에 교황을 구출해냈다. 보니파시오 8세는 이 초유의 사건으로 인해 칙령을 반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아 쇠약해졌고, 9월 25일에 로마로 귀환했으나 시름시름 앓다가 10월 12일에 선종하고 만다.

아나니에서 습격당한 교황. 알폰소 드 뇌빌(Alphonso de Neuville)의 삽화. 12

보니파시오 8세의 뒤를 이어 교황좌에 등극한 베네딕토 11세(Benedictus XI: 1303-1304)는 보니파시오 8세의 은덕을 입은 사람이긴 했지만 어수선한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콜론나 가문과 필리프 4세와 모두 화해정책을 편다. 단지 기욤 드 노가레만이 신임 교황의 용서를 받지 못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를 제대로 고소하지도 못한 채 짧은 임기를 뒤로 하고 선종하고 만다.

한편, 필리프 4세와 보니파시오 8세와의 대결이 필리프 4세의 승리로 굳혀지면서 교황청 내 프랑스인 추기경의 세력이 급성장하게 되었다. 프랑스 추기경 세력의 성장은 곧 프랑스인 교황의 탄생을 예고했다.13 당시 교황 호노리오 4세(Honorius IV: 1285-1287) 이후 20여년간 교황은 이탈리아인들이었는데, 프랑스인 추기경들은 필리프 4세를 위시한 프랑스 왕국의 권력을 등에 업고 프랑스인 교황 선출을 적극 지지했으며 그 결과 필리프 4세의 꼭두각시인 클레멘스 5세(Clemens V: 1305-1314)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원래 보르도(Bordeaux)의 주교였으며 대관식을 위해 이탈리아로 소환되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대관식을 리옹(Lyon)에서 필리프 4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하였다.

클레멘스 5세의 대관식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소문들이 많다. 우선 그가 선출될 때 필리프 4세의 동의를 구했다는 낭설이 횡행했다. 또한 그가 선출되어 말을 타고 시가 행진을 벌일 때 갑자기 벽이 무너져 말에서 떨어졌으며 이 사고로 인해 클레멘스 4세의 형제와 늙은 추기경 마테오 오르시니(Matteo Orsini)가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교황이 쓰는 삼층관(tiara)에 있던 귀중한 보석이 이날 소실되었으며 다음날 교황의 또다른 형제가 암살을 당했다고도 전한다. 진실이 어찌되었든 교황이 되어 로마에 머물러야 할 클레멘스 5세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했을텐데, 왜냐하면 프랑스 추기경단과 이탈리아 추기경단의 반목과 견제가 점차 극심해져가는 상황속에서 교황청이 있는 로마로 돌아가게 된다면 주변에 허다한 이탈리아인들의 등쌀에 고생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아비뇽 교황청. 아이러니하게도 로마보다 아비뇽 교황청의 보존 상태나 역사가 더 오래되었는데, 이는 유럽 역사상 아비뇽을 비롯한 프랑스 남부가 전쟁의 참화를 덜 겪어왔기 때문이다. 14

교황의 거처를 아예 로마 말고 다른 곳에 뒤로 결심한 클레멘스 5세는 원래 자신의 교구였던 보르도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다른 지역인 푸아티에(Poitiers), 툴루즈(Toulouse)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1309년 나폴리 왕국의 해외 영지이자 이전에 교황에게 기증된 바 있던 콩타 브네생(Comtat Venaissin)으로 이주한다. 비록 프랑스령은 아니었으나 프랑스에 매우 가까워서 이탈리아의 영향력보다는 프랑스의 영향력이 훨씬 강력했으며 필리프 4세의 비호 아래 가장 안전한 장소가 바로 콩타 브네생이었던 것이다. 교황의 거처는 콩타 브네생의 수도인 카르펜트라스(Carpentras)가 아닌 아비뇽(Avignon) 근처였다.

그런데 아비뇽의 교황 거처는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1311년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쟁 때문에 도저히 로마로 귀환할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변명에 불과햇고, 그저 아비뇽에 머물면서 지위의 안정을 도모했던 것이다. 교황청은 이제 아비뇽에 설치되었고, '로마의 주교'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교황이 7대나 아비뇽에서 교황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아비뇽 시기의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VI: 1342-1352)는 8만 굴덴의 금화를 주고 나폴리 왕국의 여왕 조반나 1세(Giovanna I)에게서 아비뇽을 아예 사 버렸다.

교황의 아비뇽 거처는 그레고리오 11세(Gregorius XI: 1370-1378)가 1377년에 로마로 귀환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를 유대인들의 바빌론 포로 시기에 빗대어 '아비뇽 유수(幽囚)'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모든 교황들이 프랑스인이었으며 프랑스인 교황들은 강력한 프랑스 왕정의 영향력 하에서 그 눈치를 보느라 자연히 활동이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교권은 '우남 상탐'에서 주장한 것과는 달리 이제 더 이상 세속 권력 위에서 그들을 심판할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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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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