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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2-13

Religion 2-13

동서교회 대분열 13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13

리옹 공의회
Council of Lyon


목차

  1. 비잔티움 제국의 내우외환
  2. 리옹 공의회의 선언
  3. 샤를의 최후와 무위로 돌아간 교회 일치
  4. 참고 사이트 및 출처

비잔티움 제국의 내우외환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비잔티움 제국에서 뜻하지 않은 교회 내분이 발생한다. 내분의 발단이 된 사건은 미하일 8세(Μιχαήλ Η')가 공동황제였던 상황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탈환한 직후 단독 황제가 되기 위해 니케아에 머물러 있던 어린 황제 요안니스 4세(Ιωάννης Δ΄)의 눈을 뽑고 요새에 유폐시킨 사건이었다. 당시 세계총대주교였던 아르세니오스(Αρσένιος: 1254-1260, 1261-1267)는 미하일 8세가 니케아에서 요안니스 4세의 섭정을 살해한 것에 대해 이미 1259년에 한 차례 그를 파문한 바 있었는데, 1261년 콘스탄티누폴리스로 돌아오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미하일 8세가 이런 천인공노할 일을 벌이자 황제의 잔인한 행위를 강력하게 규탄하였고 결국 재차 파문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처음엔 용서를 구하던 미하일 8세는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면서 점차 총대주교에 호전적인 태도로 맞서기 시작했다. 결국 아르세니오스에게 누명을 씌운 황제는 그를 총대주교좌에서 끌어내린 뒤 추방해 버렸으며 후임에 예르마노스 3세(Γερμανός Γ': 1267)를 앉혔다. 그러나 황제에 대항하던 아르세니오스의 그 특유의 강경하고 완고한 자세는 미하일 8세를 반대하고 살해당한 요안니스 4세를 지지하는 모든 이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국 아르세니오스는 황제를 반대하는 세력의 유력 인사이자 중심 인물이 되었다. 새로이 총대주교좌에 오른 예르마노스 3세는 이들 세력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결국 그는 황제를 파문에 처한 뒤 총대주교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제 세계총대주교 자리는 미하일 8세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 요시프 1세(Ιωσήφ Α': 1267-1275) 에게 돌아갔다. 요시프 1세는 황제가 바라는 대로 재빨리 전임 총대주교들이 황제를 향해 내린 파문 조치를 철회시켰고 미하일 8세가 결백하다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아르세니오스를 비롯한 황제 반대파를 크게 자극하였으며, 이들은 더 이상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비판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세우게 된다. 이로 인해 발생한 동방교회의 분열을 아르세니오스 분열이라고 하며 훗날 세계총대주교 니폰 1세(Νήφων Α': 1310-1314)에 의해 해소될 때까지 45년간 동방 교회를 양분시켰다.

이 분열은 비록 미하일 8세의 잔악한 행위를 비판하는 총대주교의 조치로 불거진 대결이었지만 이는 점차 팔레올로고스 가문에 협조하는 친황제파와 이전 니케아 제국의 라스카리스(Λάσκαρις) 가문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반황제파의 대결로 발전하였고 전자에는 현실적이고 온건한 정치세력이, 후자에는 보수적이고 강경한 정치 세력이 모이게 되었다. 정치 및 종교 전반에 걸친 폭넓은 분열이 제국의 역량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내분으로 힘을 소모하기가 아까울 정도로 주변에 아직도 적대 세력이 많아 늘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제국의 서쪽에서 또다른 라틴인들로부터 전운(戰運)이 서서히 감돌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가진 권력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서임권(敍任權) 분쟁으로 인해 11세기부터 황제와 교황은 서로 대립하고 있었고, 특히 강력한 제국을 이룩하고자 한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왕조에 접어들면서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신성 로마 제국의 움직임에 대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소위 구엘피(Guelfi)1라 불리는 교황파와 기벨리니(Ghibellini)2라 불리는 황제파로 나뉘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였으며 때로는 서로를 향한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 궁정 내 권력투쟁을 조장하고 분열을 획책하였으며, 심지어 교황 인노첸시오 4세(Innocentius IV: 1243-1254)는 1차 리옹(Lyon) 공의회에서 황제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그를 고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놓고 극에 달했는데, 시칠리아의 왕위가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만프레디(Manfredi)에게 넘어가자 위기감을 느낀 당시 교황 클레멘스 4세(Clemens IV: 1265-1268)는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프랑스 왕 루이 9세(Louis IX)의 동생인 샤를(Charles)을 은근히 지원하기 시작했다.

구엘피의 수장을 접견하는 클레멘스 4세.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의 그림. 3

권력을 향한 야욕이 상당히 컸던 샤를은 교황과 구엘피-기벨리니의 분쟁 상황을 자신의 지위 상승에 적절히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샤를은 클레멘스 4세의 지원을 받아 시칠리아의 왕이었던 만프레디를 죽이고 그의 군대를 짓밟은 뒤 기어이 시칠리아의 왕좌를 차지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은 시칠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그 덕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입김을 덜 받게 된 교황과의 관계는 더욱 더욱 긴밀해졌다. 그런데 샤를은 시칠리아의 왕위로 만족할 만한 그런 사람이이 아니었다. 샤를의 칼끝은 영화로운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향해 있었고, 그는 이 꿈을 성취하기 위해 발칸 반도의 일부 해안지역을 점령하여 비잔티움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다. 또한 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 투르크, 심지어 아르메니아와 몽골까지 외교적으로 포섭하여 당시 막 부활한 비잔티움 제국을 국제적 고립 상태로 몰아넣었다.

나폴리(Napoli)에 있는 왕궁의 샤를 석상. 1266년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왕인 샤를 1세가 되었다. 4

미하일 8세는 아르세니오스 분열로도 벅찬데 설상가상으로 대외적 고립 상태를 겪게 되어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위기감을 느꼈다. 미하일 8세가 이 위기 상황을 타개하고자 내놓은 해법은 바로 외세와 연합하는 것이었는데, 그 상대가 바로 로마 교황이었다. 즉, 동서교회 연합을 구실로 하여 로마 교황과 연대하면 교황의 직접적인 후원과 지지를 받는 샤를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고, 적대적인 서방 세력, 특히 그 때까지도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던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위협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을 터였다. 또한 십자군을 수월하게 유도하여 제국의 동부에서 여전히 위험세력으로 여겨진 투르크인들을 서방 제국 군대를 통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으로' 압박할 수 있으니 당시에 교황과의 연합 정책만큼 매력적인 외교적 해법이 없었다. 미하일 8세는 교황과 연락하면서 연합의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황제가 처음으로 접촉한 교황 우르바노 4세(Urbanus IV: 1261-1264)는 비잔티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협상에 별 소득이 없었다. 다음 교황인 클레멘스 4세는 아주 원론적인 대답, 곧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할 것과 로마 가톨릭 교리를 받아들일 것, 서임권을 보장할 것 등을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기만 했다. 사실 이 두 교황은 프랑스 출신 성직자였다. 다시 말해, 앞에서 언급한 샤를이 시칠리아 왕위를 얻도록 아낌없이 지원해 준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교황들은 샤를의 적인 비잔티움 제국을 도울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클레멘스 4세 선종 이후 이탈리아 출신의 성직자가 교황좌에 오르면서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그가 바로 그레고리오 10세(Gregorius X: 1271-1276)였다. 그레고리오 10세는 교회 개혁과 교황권 확립을 주장하면서 비잔티움 제국과 동방 교회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고, 미하일 8세와의 협력을 성사시키면 유럽에서 보다 강력한 권력을 쥐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교황은 엄숙하게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선언하였고 각국에 사절을 보내 성직자들과 권력가들을 초청하였다. 공의회가 열릴 장소는 29년전 인노첸시오 4세가 소집한 공의회 개최지였던 리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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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옹 공의회의 선언

1272년에 개최가 공포된 제 2차 리옹 공의회에는 저명한 사람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서방 세계의 스콜라(Scholar) 신학자로서 유명한 아퀴노(Aquino)의 토마소(Tommaso)5와 바뇨레지오(Bagnoregio)의 보나벤투라(Bonaventura)가 초청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이 공의회의 수준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서방 교회의 수많은 주교들, 그리고 당시 유럽 여러 나라 군주들의 대리가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심지어 타타르족에서도 사절단이 방문하였다. 교회 일치의 주요 대화 상대인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정교회 성직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리옹 공의회에 참석한 성인 보나벤투라와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보나벤투라는 공의회 기간 중에 리옹에서 사망하였다. 6

그레고리오 10세(Gregorius X: 1271-1276)가 이 공의회에서 가장 역점을 두었던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십자군 전쟁이었다. 이것은 그레고리오 10세의 개인적인 삶에서 비롯된 강력한 소명과도 같았는데,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당시 그는 십자군 원정 중으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Edward)와 함께 안티오키아 프톨레마이스(Πτολεμαίς)7에 있었다. 당시 대부제(archdeacon)이었던 그는 추기경들의 소환에 즉시 응해 로마로 돌아갔고, 거기서 사제품을 받은 뒤에 비로소 교황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항상 예루살렘을 향해 있었전 것으로 보인다. 공의회의 법령 서문을 보면 아예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와 있을 정도였다.

슬프도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셨던 곳, 인류를 살리시기 위해 죽으시면서 흘리셨던 보혈로 성스럽게 하신 바로 그 곳이 오랜 기간동안 무자비하게 공격받아 그리스도인들의 불경건한 적에게 점령당했으니, 그들은 곧 신성 모독스럽고 믿음이 없는 저 사라센(Saracen)인들이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협력 없이는 이 십자군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레고리오 10세였다. 때문에 공의회 4차 회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법령 조항들이 이미 확정되었음에도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의 사절단이 리옹에 도착하기만을 간절히 손꼽아 기다렸다. 선박 좌초 사고로 인해 늦긴 했지만, 유명한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예오르요스 아크로폴리티스(Γεώργιος Ακροπολίτης)를 위시한 비잔티움 제국 사절단이 드디어 6월 24일에 도착했다. 그들은 서방 교회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이윽고 교황은 7월 16일과 17일에 재차 5, 6차 회기를 진행하였다. 이 두 회기의 중심 주제는 동서교회의 통합이었고, 그것은 표면적으로 가장 걸림돌이 되는 문제이자 가장 핵심적인 교리 쟁점인 필리오케(filioque)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8

놀랍게도 단 이틀동안의 매우 집약적인 논의 끝에 동서교회 관계자들은 법령 1조를 합의해서 공포할 수 있게 되었다.9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믿음과 헌신을 다해 고백하노니 성령께서는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發出)하시며 이는 두 원리로부터 발출이 아니라 단 하나의 원리로부터 발출이다. 즉, 두 개의 창조가 아니라 하나의 창조이다. 이것이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이자 돌보는 여주인인 거룩한 로마 교회가 지금까지 고백해 왔고, 선포해 왔고, 가르쳐 온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로마 교회가 강하게 붙들고, 선포하고, 고백하고, 가르치는 내용이다. 이것은 바른 신앙의 교부들과 교회 박사들의 변치 않는 참 믿음이고 라틴인들이나 그리스인들에게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논쟁이 되지 못할 진실에 대한 무지로 인해 다양한 오류에 빠진 몇몇 사람들이 있는바, 우리는 이러한 오류로 인도하는 길을 모두 막고자 신성한 공의회의 승인을 통해 비난하고 꾸짖노니 곧 성령께서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셨다는 사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자와 성급하게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하나의 원리가 아닌 두 개의 원리로써 발출하셨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이 법령이 마지막 회기에 채택되었다는 것은 뒤늦게 합류한 동방 교회와 황제의 사절단의 동의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수백년간 끌어온 필리오케 문제의 종결을 의미했다. 하지만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것은 동서교회의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중발출설(二重發出說)을 주장한 서방 교회의 일방적인 승리로 매듭지어진 모양새였다. 공의회 기간 중 전례에서 동방 교회 사절단들은 서방 교회 사람들과 함께 니카이아-콘스탄티누폴리스 신경에 필리오케 문구를 넣어 낭송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서방 교회의 주장이 가감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데에는 황제 미하일 8세(Μιχαήλ Η')의 강력한 교회 통합 의지가 크게 작용하였다. 1270년대 초, 미하일 8세의 친서방 정책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은 투옥되거나 직책에서 추방당하는 등 갖은 압력을 받았다. 당시 세계총대주교였던 요시프 1세(Ιωσήφ Α': 1267-1275)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하일 8세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미하일 8세의 이러한 교회 일치 정책을 묵인하였다. 미하일은 비록 종교적으로는 다소 패배를 인정하더라도 현실적인 실리를 취할 것을 선택한 것인데, 그 실리란 비잔티움 제국이 다른 서방 국가에 의해 공격받지 않으면서 십자군 공격을 위한 서방 세계의 원군으로 인정받는 것이었으며, 또한 십자군 전쟁 수행시 서방 세계로부터 실질적인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약조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전쟁 수행을 위한 자금 조달에 매우 열성적이어서 향후 6년동안 기독교 국가의 십일조를 모두 교황에게 바쳐 십자군 재원으로 사용하게끔 하였으니, 이 돈의 일부가 분명 비잔티움 제국을 통한 이슬람 제국 공격에 투자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이것은 비잔티움 제국에겐 호재가 될 것이라고 미하일 8세는 굳게 믿었다.

그러나 리옹 공의회에 참석했던 사절단이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돌아와서 공의회의 법령을 낭독한 뒤 동방 교회의 분위기는 매우 험악해진다. 아무리 황제의 압력에 짓눌려 있다고 해도 서방 교회의 교리에 오랫동안 반감을 가져 온 동방 교회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에게 하루 아침에 필리오케를 받아들이고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라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처사였던 것이다. 각지에서 반발이 이어졌고 서방교회에 대한 분노가 더욱 커져만 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요시프 1세는 도저히 총대주교좌에 계속 앉아있을 수 없었고 리옹 공의회가 끝난 다음해인 1275년에 사임하였다. 이에 미하일 8세는 교회 일치에 보다 적극적이고 자신의 입장을 잘 변호해 줄 성직자를 찾아 후임에 앉혔는데 그가 바로 요안니스 11세(Ιωάννης ΙΑ΄: 1275-1283)였다.

요안니스 11세를 그린 그림. 그는 흔히 요안니스 베코스(Βέκκος) 라고 불린다. 10

요안니스 11세는 원래 동서 교회 통합 반대론자였으나 일전에 황제에 의해 감옥에 수감된 뒤 입장을 바꾸었다. 그는 옥중에서 동방교회의 저명한 교부들의 저작들을 탐독하면서 (당시로서는) 독자적인 생각을 키워나갔는데, 우선 동서교회의 교리 차이가 포티오스 1세(Φώτιος Α': 858-867, 877-886) 시기를 거치면서 과장되었다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요안니스는 포티오스가 당시 교황 니콜라오 1세(Nicolaus I: 858-867)에 대해 지극히 사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임기를 유지하지 못할 것을 내다본 포티오스가 오히려 호전적인 강공법을 선택, 필리오케 문제를 끄집어 내 집요하게 서방교회를 공격하면서 동방교회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굳혀나갔다고 주장했다. 요안니스는 비록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이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교부들의 생각과 가르침은 단순히 성령의 원천이 성부에게만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요안니스는 성령의 발출에 대한 이견(異見)이 존재할 수는 있으나 동서교회는 같은 진리에 대한 표현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 것일뿐 논리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그 두 의견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의 저작인 '페리 에노세오스 케 이리니스(Περί ενώσεως και ειρήνης: 연합과 평화에 관하여)'에서 이러한 그의 주장이 상세하게 드러나있으며 이를 통해 그가 기회주의적으로 정치적인 흐름에 따라 입장을 바꾼 교활한 성직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최초로 교회의 연합에 대해 교리적으로 진지하게 탐구한 진정한 에큐메니즘(ecumenism, 교회 일치 운동)의 시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최근 교회사학자들의 의견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주장이 당시 동방 교회 사람들에게 제대로 받아 들여질 리 만무했다. 더구나 비잔티움 제국 사람들이 성인으로 떠받드는 위대한 세계총대주교 포티오스 1세를 능멸하다니! 사람들의 반발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요안니스 11세는 동방교회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질 것이라고 애초에 기대하지는 않았던 듯 싶다. 그래서 초반에는 빗발치는 사람들의 반발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해가 지나면서 미하일 8세의 통치 시기가 저물어가자 강력한 황제의 압력만으로는 사람들의 반발을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한 요안니스는 점차 수많은 주교 회의와 모임, 그리고 책과 팜플렛 등을 통해 끈질기게 교회 통합 반대론자들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러한 그의 정력적인 활동은 많은 동방교회 성직자들의 반발만 더욱 부추겼으며 나중에 그가 탄핵 받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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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의 최후와 무위로 돌아간 교회 일치

아무튼 1274년의 리옹 공의회는 표면적이기는 하더라도 필리오케 문제 해결을 통한 동서 교회 일치라는 매우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이제 법령에서 조인된 대로 서방 기독교 국가들이 행동에 나설 때였다. 그러나 상황은 그레고리오 10세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순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우선 서방 각국의 군대가 출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을 수행하다가 국내에 남은 세력들에 의해 권좌가 빼앗길 위험도 농후했고, 단순히 성지 탈환이라는 순수한 사명감만으로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지출과 위험을 감수하기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시기는 점차 근대적인 의미의 중앙집권적 국가 개념이 정립되어가던 시기로 특히 유럽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던 프랑스 왕국이 교황의 이러한 움직임과 배치되는 행동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카노사의 굴욕으로 정점을 찍었던 교황의 세속 권력은 프랑스 추기경과 이탈리아 추기경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서서히 추락하고 있었고, 교황이라는 한 목자에 의해 모든 세속 국가들이 경영되는 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판단이 유럽 사람들 생각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자연히 십자군 전쟁 자금 또한 제대로 조달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1073-1085)는 성직자 서임권을 회복하고자 했는데 이는 신성 로마 제국 하인리히 4세(Heinrich IV)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자국 내 반대세력에 의한 반란을 우려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맨발로 교황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파문 철회를 호소하였는데 이를 '카노사의 굴욕'이라 불린다. 11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리옹 공의회를 선두 지휘했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1276년에 너무 일찍 선종했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십자군을 일으키고 성지를 향해 공격하는 것을 보고 죽어야, 그러니까 시작이라도 시켜놓고 죽어야 뭐라도 일이 진행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런 막중한 임무를 가진 본인이 공의회 폐회 후 2년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십자군 조직의 중심축을 잃은 서방 기독교 국가들은 더 이상 리옹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준수하지 않게 되었고, 그나마 조달된 십자군 전쟁 재원은 이탈리아 반도에 흡수되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10세 이후의 교황좌는 빈번하게 바뀌며 혼란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다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정치적 반목이 교황좌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원래 그레고리오 10세가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던 이유는 그가 비록 이탈리아인이었으나 사목 장소가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지방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내부 정치 상황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선출된 교황들은 불행히도 국제정치 문제에 휩쓸릴 수 밖에 없는 특정 지역 출신이었다. 예를 들어, 로마 출신의 니콜라오 3세(Nicholaus III: 1277-1280)의 경우 이탈리아인에 의한 이탈리아 정계의 권익을 변호하기 위해 쉼없이 노력했는데, 그는 교황권을 강화시키는 한편 로마 원로원에 외국인들이 관료로 임명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는 명백하게 프랑스 사람들에 의한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그 중심에는 시칠리아의 욕심많은 왕 샤를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의 노력은 후임 교황인 프랑스인 마르티노 4세(Martinus IV: 1281-1285)에 의해 뒤집히고 만다. 샤를이 이탈리아인 추기경을 감금시키면서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만장일치로 선출된 교황이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샤를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꼭두각시 교황을 환영하지 않아 그의 로마 입성을 완강히 거부하였으며 하는 수 없이 마르티노 4세는 오르비에토(Orvieto)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마르티노 4세는 재빨리 샤를을 로마 원로원으로 임명하였다.

마르티노 4세의 초상화. 그의 본명은 시몽 드 브리옹(Simon de Brion)이었다. 12

당시 샤를은 콘스탄티누폴리스를 곧장 공략하고 싶었지만 전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비잔티움 황제 미하일 8세와 손을 잡는 과감한 행동을 펼치는 바람에 교황과 가톨릭 세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침략 의지를 잠시 접어둘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281년이 될 때까지 샤를은 프랑스에 대해 중립적이거나 혹은 적대적인 추기경 및 교황 세력을 잠재우느라 공을 들여야 했다. 하지만 리옹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이 유야무야 없던 일이 되어버린 이 시점에서 교황마저 자기 편인 프랑스인이 되자 샤를은 다시금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향한 야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결국 샤를의 사주를 받은 마르티노 4세는 교회 일치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 비잔티움의 황제 미하일 8세를 파문에 처하였다. 이것은 희대의 아이러니였으며 교황과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사이의 교회 일치는 실로 정치적인 야합에 불과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미하일 8세는 애초에 종교적인 이유에서 통합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교황의 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어느새 비잔티움 제국은 수 년동안 외부 세력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테살리아(Θεσσαλία)에 잔존하던 라틴인들의 세력권을 공격하는 등 강경한 팽창 정책을 펴나갈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에게 파문당한 미하일 8세의 걱정은 당장 현실이 된 샤를과의 맞대결이었지 교회 일치는 이미 딴 나라 문제가 된 상태였다. 어떻게 하면 저 욕심 많은 시칠리아의 프랑스인을 꺾어내릴 것인가? 그런데 골몰하던 비잔티움 황제가 횡재를 하게 된다.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Palermo) 외곽에서 벌어진 부활절 저녁 기도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드루엣(Drouet)이라는 프랑스 장교가 있었는데 이 사람 성격이 과히 점잖치 못했던 것 같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는지 아니면 맨정신에 대담했던 것인지, 혹은 자신은 권력이 있는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과신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이 장교가 같은 자리에 있던 시칠리아 여성을 희롱하였던 것이다. 안그래도 프랑스인들의 횡포에 못마땅해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부인이 이들에게 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의 남편은 그 즉시 프랑스 장교에게 다가가 그를 칼로 살해해 버리고 말았다. 정의를 구현한 시칠리아인들의 의기가 하늘을 찌를 듯할 그 때, 때마침 교회에서 저녁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게 되었고 이는 시칠리아인들의 애국심 혹은 야수성을 끄집어 올리는 신호가 되었다. 교회 종소리가 시칠리아인들의 봉기를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칠리아인들은 만나는 프랑스인들을 닥치는 대로 쓰러뜨리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프랑스인을 남편으로 둔 시칠리아인들마저 살해할 정도로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이 당시 시칠리아인들은 수도사들이 시칠리아인인지 아니면 프랑스에서 온 외국인인지 확인하기 위해 'ciciri'라는 발음을 하도록 강요했는데 만일 이것을 정확하게 구사하지 못하면 바로 즉결 처분당하였다.14 소위 '시칠리아 만종(晩鐘)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인들은 삽시간에 시칠리아에서 축출당했고, 모든 행정 능력과 군사적 억지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큰 승리라는 격언대로 과연 미하일 8세는 손 안대고 코를 풀었던 것이다. 이에 미하일 8세는 명민하게 시칠리아에서 일어나는 내분을 간파하고 이 분열을 획책하여 샤를이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조장하는 계책을 부렸다.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표현한 그림. 가운데 칼에 찔려 가슴을 움켜쥔 사람의 오른쪽 가슴에 프랑스 왕가 문양의 상징인 백합이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3

그 결과 샤를은 시칠리아의 왕임에도 섬에서 쫓겨나 나폴리(Napoli)에 체류하였고, 시칠리아 시민들은 자유국을 설립하여 오직 교황에게만 복종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여전히 샤를 편이었기 때문에 시칠리아 시민들이 샤를의 통치를 따르라고 명하였고, 이는 시칠리아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더 부어버린 꼴이 되었다. 이에 시칠리아 시민들은 아라곤(Aragon) 왕국의 페드로 3세(Pedro III)에게 서한을 보내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양도할 뜻을 내비쳤다. 페드로 3세의 아내가 샤를에게 죽임을 당한 만프레디(Manfredi)의 딸이었기 때문에 정통성 시비도 적은 편이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만프레디의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교황과의 아주 해묵은 다툼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결국 페드로의 함대는 1282년 8월에 팔레르모에 도착하였고, 시칠리아 내부 분쟁은 이제 국제적인 전쟁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페드로는 외국인인 자신이 비록 시칠리아의 왕위를 이양받기는 하지만 신민(臣民)들 위에 군림하기보다는 과거 시칠리아 시민들이 굴리엘모 2세(Guglielmo II) 치하에서 누렸던 폭넓은 이권을 모두 보장하겠노라고 선언하였다. 교황의 고압적인 태도에 실망했던 시칠리아인들은 페드로의 발언에 한껏 고무되었다.

이에 발끈한 샤를은 이탈리아 반도로부터 함대를 보내 메시나(Messina)를 포위하였으나 페드로의 대군 앞에서 찍 소리 못하고 철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분노한 교황 마르티노 4세는 페드로 3세를 파문에 처하고 십자군을 소집하여 아라곤 왕국을 공격한다. 이에 아라곤 왕국은 맞대응으로써 칼라브리아(Calabria)의 해안가를 공략한다. 교황의 아라곤 십자군은 프랑스 왕국과 샤를의 지지를 받았고, 아라곤 왕국은 이탈리아 내 반교황파인 기벨리니 세력,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의 지원을 받았다. 샤를의 야망은 결국 지중해 전역을 황당한 십자군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이 와중에 샤를은 결국 시칠리아를 회복하지 못한 채 1285년 사망하게 된다. 샤를의 사망은 교황 마르티노 4세에게도 치명적이었으며, 결국 정치적 역량을 잃은 그도 같은 해에 선종하고 만다. 마르티노 4세 재위 시절에는 교회 일치라는 구호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같은 가톨릭 국가를 향한 십자군을 일으키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리옹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이행하는 데 실패한 서방 교회는 내부 권력 싸움에 몰두하다가 교황의 위신에 상처만 입은 채 교회 일치에서 슬그머니 발을 빼게 된 모양새였다. 리옹 공의회의 법령은 모두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교회 일치가 없던 일이 되어버리게 되면서 동방 교회 역시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었다. 1282년에 미하일 8세는 세상을 떠났고, 비잔티움의 제위는 그의 아들인 안드로니코스 2세(Ανδρόνικος Β')에게 넘어갔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부황(父皇)에게 적대적이었던 전임 세계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Αρσένιος: 1254-1260, 1261-1267)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지라 그의 종교적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런데 샤를이 더 이상 제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서 껄끄럽게 국내 분쟁을 무릅쓰면서까지 교황 및 서방 교회와 협력해야 할 필요성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안드로니코스 2세는 부황의 친서방, 친교황정책을 폐기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하일 8세의 종교 정책을 열성적으로 찬동하였던 세계총대주교 요안니스 11세는 두려움 속에서 그 해 크리스마스에 수도원으로 물러났고, 혹여나 테러를 당해 죽임을 당할까봐 사실상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유폐시킨 상태에서 자아비판을 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참회를 구하기까지 한다. 총대주교의 자리에는 그리고리오스 2세(Γρηγόριος Β': 1283-1289)가 등극하였고, 그는 전임 총대주교의 죄목을 논함과 동시에 동서 교회 일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의를 개최한다. 1285년에 블라혜르네스(Βλαχέρνες)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리고리오스 2세는 교리적으로 동방 교회의 입장을 정리하여 필리오케 문구에 대한 반론을 실은 글을 발표하여 공식적으로 리옹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거부하였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이콘 15

그러나 뜻밖에도 이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아르세니오스 분열이 리옹 공의회의 법령 공포로 인해 동서교회 일치에 관한 입장차이로까지 비화되면서 분열이 더욱 격렬해졌기 때문이었다. 미하일 8세를 지지하는 온건한 현실 정치세력은 친황제파의 대표적인 세계총대주교였던 요시프 1세(Ιωσήφ Α', 1267-1275)의 이름을 따서 요시프파(派)로 불렸고, 그에 반대하는 보수적이고 강경한 명분 정치세력은 반황제파의 대표적인 세계총대주교였던 아르세니오스의 이름을 따서 아르세니오스파(派)로 불렸다. 전자는 당연히 미하일 8세가 추진한 친서방 정책을 지지했고 따라서 리옹 공의회의 신학적 결정까지도 받아들였다. 이에 반해 후자는 리옹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단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던 것이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리고리오스 2세는 사임하게 되었다.

결국 13세기 가장 화두가 되었던, 그리고 실질적인 어떤 결론 ㅡ 비록 표면적이자 순 정치적인 야합에 불과했긴 했으나 ㅡ 을 얻었던 리옹 공의회는 완전한 실패로 끝나게 된다. 아무런 실질적인 행동이 이뤄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교회의 일치라는 소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신의 징벌을 받아야 했던 것일까, 세기가 바뀌어 14세기가 되면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거대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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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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