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CD 음악을 길거리에서 들으면서 부쩍 느끼게 된 것인데, 우리는 너무 많은 소음에 둘러쌓인 채 살아가고 있다. 집에서는 CDP 볼륨이 고작 3 정도여도 웅장한 소리를 자랑하며 내 귀를 감동시키는데, 도로를 만나면 3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나마 간간이 들리는 음악 소리는 버스에 탑승하게 되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잃어버린 우리의 소리를 찾기 위해서는 CDP의 볼륨을 최소 6으로 올려야 한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최근 입증되었다.
이것이 무슨 말이란 말인가. 평소에 우리가 별로 신경쓰지 않고 지나쳤던 거리의 소리들, 버스 소리, 번화가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언제나 평균 볼륨 3 이상이었다는 것 아닌가. 나는 볼륨 4로만 음악을 틀어놓아도 조금 있다 보면 '이거 너무 크게 튼 거 아닌가, 귀가 약간 화끈하네'라고 느끼는 사람인데, 그것보다 훨씬 더 한 소음은 너무나도 내 주변에 가까운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었다.
기가 막힌 것은, 이들 소음은 분명 소음인데도 소음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소음은 자랑스런 현대 문명 이용에 대해 인간이 짊어지고 가야 할 존재이다. 베틀보다는 직조 공장 기계가 더 많은 소음을 내는 것이 당연하고, 말보다는 자동차가 더 많은 소음을 내는 것이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 대한민국은 현대 문명의 혜택을 너무 많이 받아 그에 불합리한 채무 관계라도 가지게 되었는지, 아니면 현대 문명에 대한 고마움이 너무 많아 통 크게 인심을 쏟아붓기라고 하는 건지 소음이 여기저기서 양산되고 있다. 3대 거짓말 어록에 남대문 시장 상인의 '밑지고 파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어째 우리 나라의 이런 소음 적자 경영은 거짓말에 포함되기는 커녕 저나라한 진실이 되고 있으니 통탄해 마지않을 수 없다.
소음 공학은 현대 공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응용 분야가 그렇듯이 사회의 필요에 의해 크게 발전한 경우가 많은데, 소음 공학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생물체에게 소음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고, 심지어 불쾌함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이러한 소음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가 발전했을 리가 없다. 단순히 소음으로 인해 귀청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질환을 앓게 되거나 전혀 상관 없는 다른 질병을 앓게 된다면? 여기서부터는 이제 전문화된 학문이 나서야 하는 것이다. 이런 소음에 대한 연구는 급속도로 진행되고 '소음도 공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소음을 줄이기 위한 갖가지 노력이 제시되고 있긴 하다.
하지만 결국 둘러보면 소음 투성이이다. 집에서도 냉장고가 돌아가면서 나는 저 소리, 길가의 자동차 쌩쌩 지나가는 소리, 집 앞 철로에 전철이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소리. 학교에서는 환풍기와 펌프 돌아가는 소리, 실험기구 작동하는 소리, 학교 내외에서 들리는 큰 소리들 등등. 굳이 나는 안 들어도 되는데 무차별적으로 퍼지는 음파는 호이겐스의 원리를 더럽게도 잘 따르는지라 내 귀에 전파되고 만다. 아니, 좀 어떻게 해결이 안 될까?
프랑스 태생의 미국 작곡가인 에드가 바레즈(Edgar Varèse)는 우리 주변의 일상의 소음까지도 음악이 될 수 있다 주장하여 '아름다운 소리'라는 개념을 깨 버리고 예술 음악 안에 '일반 소음'들을 끌어 들여왔다. 하지만 아무리 20세기 예술이 엄격한 구분을 거부하고 모호한 경계와 다원주의적 가치를 지향한다고 해도 이런 싸구려 길거리 소음에까지 그 판단을 유보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냥 들을만한 '작곡된 악곡'은 환영할 만 하지만 길거리에서 들리는 '무한 즉흥연주 쇼'는 좀 억제될 필요가 있는 거 아닐까? 우리는 그런 쇼를 보고 싶다고 한 적도 없는데, 그런 자원 봉사 쇼라면 조촐하게 벌여주는 게 좋을텐데 말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