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공직자들의 도덕성 논란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었다. 고위공직자들을 임명하는 절차가 단순히 '임명 → 고지'가 아닌 '지명 → 청문회 → 승인 → 임명'으로 바뀐 게 십수년 정도 되었나 싶다. 내 기억에 이러한 절차 변경에 의해 '지명은 되었으나 임명이 되지 못했던' 최초의 사람은 국민의 정부 시절 국무총리로 지명되었던 장상氏이었고, 그녀는 꽤 오랜 기간동안 국무총리서리라는 뭔가 부끄러운 직함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위공직자들의 청문회는 세간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높은 분들의 부정과 비리, 꼼수들이었다. 병역, 재산, 위장전입은 기본이고 국적과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도대체 이런 인간들이 정부를 이끌어나간다는 것이 말이나 되나 반문하고 싶을 정도인 것이다. 이 때문에 청문회는 언제나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는 야당의 춤판이 되곤 했고, 어떤 경우에는 여당의 일부 사람들마저 그 춤판에 조연으로 참석하기도 한다. 지명이 될 때의 사유를 보면 '와,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싶지만 청문회 중에 그 인상은 '결국 그 나물에 그 밥' 이라는 클리셰로 변하기 마련이다.

 

세상에 도덕적으로 무결한 사람이 어딨겠느냐. 사실 그 말이 옳은 말이다. 오랜만에 추석특집 영화 '댄싱퀸'을 다시 봤는데, 거기서 가상의 정당인 민진당에서 서울 시장 후보를 새로 낼 때 앉아있던 사람들에게 병역, 위장전입, 사생활을 물어보니 도무지 흠결이 없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이었다. 현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원래 부자가 하늘 나라에 가기는 밧줄[성경에는 약대, 곧 낙타로 번역되었지만 이것은 히브리어의 오역(誤譯)이라고 한다.]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지만 대한민국에 적용해 보자면 도덕적으로 무결한 사람이 고위공직에 진출하기는 정말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나보다. 지금 윗선에 있는 사람치고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었을 때 통과할 만한 사람은 거의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청문회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결국 개인의 치부는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고, 어차피 힘의 논리와 타협에 의해 정치적으로 임명되는 것이 뻔한데 국민들 앞에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은 절차라는 것 아니냐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청문회를 토한 임명절차는 필요하다는 것이 대부분의 주장이다. 우선 고위공직자가 될 사람에게 도덕성은 원래 강조되어야 할 덕목 중의 하나이며 국민들은 그것을 검증할 권리와 의무 또한 있다는 것이다 ㅡ 물론 그 세부적인 절차는 민의(民意)를 대변한다는 국회의원들이 대리해주지만. 그리고 실제로 청문회 과정을 통해 심각한 문제를 가진 사람은 걸러질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된 바 있다. 정말로 될 사람이라면 그 시끄러운 굿판에도 꿋꿋이 견뎌 대통령의 임명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안 될 사람이라면 결국 낙마하거나 사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자연 선택설을 따르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후대(後代)의 보다 나은 공직자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즉, 요즘 시기의 청문회 사태들을 보면서 가장 많은 충격을 받을 사람들은 훗날 고위공직에 진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이 선한 도덕적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혹은 공직에 오르기 위해 최소한의 것들만 지키자는 기회주의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든 결과적으로는 현재보다는 좀더 나은 도덕적 수준을 가진 공직자들을 배출해내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 세대들이 자신들이 욕하는 기성 세대를 본받아 그런 행태를 반복하지는 말아야 자기 모순에서 벗어나는 것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린 세대들을 계도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부정적인 것들을 때려 잡는 것보다는 긍정적인 면들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교육자들은 말한다. 예를 들면 학급 청소를 장려하기 위해서 교실을 어질러놓는 학생을 벌주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청소를 잘 한 학생에게 상을 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해외의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돕기 위한 홍보 다큐멘터리로 가끔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어린이 옆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대머리독수리의 모습을 계속 보여주기보다는 구호단체의 활동 덕에 끔찍한 사태를 넘겨가며 희망을 꿈꾸는 어린 아이들의 성장을 보여주는 게 더 감동적이고 호소력 짙은 법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요즘의 청문회는 그런 감동과 호소력이 없다. 도대체 멋지게 넘어가는 공직자가 없다. 권력의 정점에 가까워질수록 세간의 평가는 더욱 극단이 되고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기게 마련이라지만 아니 대한민국 정부수립 6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그 수많은 공직자 중에서 그런 존경을 받는 사람이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ㅡ 그리고 중요한 건, 그런 분들이 정계 일선에서 활약상을 인상적으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게 ㅡ 안타까운 노릇이다. 깽판을 치고 온갖 막말을 쏟아낸 국회의원들, 해외에서까지 나라망신 톡톡히 시킨 정부부처 관계자들, 정의를 외면한 채 비리에 결탁한 검찰과 경찰 등등. 우리나라 국민들이 막장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가 오히려 이런 데 있지 않나 싶다.

 

도덕적으로 무결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무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난장판이 되는 청문회, 그 청문회를 다룬 수많은 기사들, 그 기사들을 잃고 허탈해하는 국민들, 도대체 이 모든 것들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개량된 문화(文化)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방식', '한국인의 정서' 라는 미명 하에 사회 전반에 퍼져 암약하고 있는 후진성, 이런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 없이는 그 어떠한 좋은 방책들도 미봉책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 뻔하기에...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