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여행 중에 언젠가 달을 본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자주 봤던 그믐달이었다. 문학의 클리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 그믐달은 꽤나 새색시의 눈썹을 닮았으며, 할머니의 굽은 허리를 보는 듯 했다.

순간 마음 한 구석에 '아, 모레정도면 달이 없는 밤하늘을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쇼팽의 야상곡이 은은하게 퍼지면 더 없이 좋을 이 야심하고 고요한 밤을 처참하게 깨부수는 생각이다. 비단 아름다운 달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는 아픔에서만이 아니고 이 감상의 영역에 '과학'이 끼어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과학처럼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학문이 어딨냐고 반문한다면 나야 뭐 반박할 마음은 없지만 쇼팽과 유기화학이 주는 감상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좀 말해주고 싶다. 슬프게도 우리들은 화학의 감상에 쇼팽의 감상을 더하면 완벽한 낭만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지만 쇼팽의 감상에 화학을 더하면 왠지 김이 팍 새는 것을 경험한다. 과학의 용어로 설명한다면 '보강 간섭'과 '상쇄 간섭'이 적당하지 않을까.

아무튼 더 이상 달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감상적으로 서술하는 건 글러먹은 것 같으니, 에라 모르겠다. 내가 왜 과학 얘기를 꺼냈는지 말해야겠다. 달은 지구 주위를 공전하면서 그 위상이 바뀌는데 우리가 중학교 때부터 익히 배워 안 초승달이니 하현이니 합이니 삭이니 이런 게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배운 바에 의하면 지구와 태양 사이에 달이 존재할 때 달은 보이지 않으며 이를 삭이라고 하며 달이 지구 주위를 반시계 방향으로 공전하면서 차츰 배가 불러오면서 초승달, 상현을 지나 보름달이 된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점차 이지러지는 보름달은 하현을 지나 그믐달이 되어 결국 다시 삭이 되고 만다. 큰 권세를 휘둘러 온 밤을 비춘 달도 결국은 그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니 내가 작은 슬픔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겠는가. 분명 저 그믐달은 모레 정도 되면 이 밤하늘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거야. 이런, 남아공의 밤하늘에는 온갖 별들이 반짝이는 장관을 연출하는데 달님이 없다니 꽤나 슬픈걸. 하지만 달의 반격은 정확히 모레부터 시작되었다. 무심코 창밖으로 쳐다본 밤하늘에 달이 떡하니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전전날보다 더 배부른 모습으로.

이럴수가. 지금 하늘이 날 농락하고 있다. 아름다운 밤하늘의 모습을 한낱 단순한 중학교 수준의 과학으로 분탕질친다고 내게 벌 주는 것인가. 내가 잘못 봤나. 그제 본 건 초승달이었나. 아닌데. 나는 동서남북을 잘 판별하는 대학생이란 말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한다.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이 지구상에 사는 60억 인구의 기준은 제각기 다르다.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서로 다른 기준들을 이해하면서 사람들과 살을 맞대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에겐 고집이란 게 있다. 내 생각, 내 기준은 어떤 큰 사건이나 감명받는 일이 없다면 바뀌기 힘들다. 사실 이런 것도 외부의 어떤 자극이 있어야 바뀌는 것이지 나 스스로의 사유를 통해 '나를 바꿔보자!'라고 해서 내가 가진 틀을 바꿔나가는 것은 대단히 드문 경우이다. 어렵다.

단체 생활과 해외 여행 때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양자 모두 내 생각, 내 기준을 잠시 내려놓고 단체의 생각과 기준, 그 나라의 생각과 기준을 어느 정도 맞춰나가야 한다. 하지만 내 생각과 기준은 대단히 배타적인 존재인지라 '나'에 대한 기득권을 잃기 싫어 강력하게 저항한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아무튼 나는 좌표의 원점이 되려고 하지 한번도 0이 아닌 다른 숫자가 내 위치의 좌표 이름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려 들지 않는다. 다른 것을 중심으로 잡고 생각해보면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법인데, 내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된다면 이상하게 느껴지던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법인데 말이다.




며칠 후, 어느새 하현달이 된 남아공의 달이 밤하늘에 떠 있었다.

남반구에서 볼 수 있다는 남십자성조차 못 찾은 나로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나는 한국인의 시선으로 남아공의 사회를 바라본 것도 부족해 남아공의 밤하늘까지도 한국인의 눈으로 바라봤던 것이다.

뭔가 잘못되었군, 이렇게 생각을 했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비유컨대 지구가 돌고 있어도 하늘이 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랄까.

진리가 어떤 때에는 하찮은 쓰레기로, 어떤 때에는 값진 진주로 느껴지는 건, 어떤 때에는 명백한 거짓이요 오류처럼 느껴지다가도 어느 새에는 눈물을 흘리며 그것이 맞더라고 고백하게 되는 건, 그것의 성질이 원래 그러해서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진리를 두고 내가 왔다갔다 하기 때문이 아닐까.

보름달이 찬란하게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남아공의 달빛은 정말 강해서 정원에 약하게 등을 켜 놓은 것 같았다. 이제 나는 그믐달의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보름달의 영광으로 구원받은 남아공의 달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여기선 초승달의 순간을 안타까워 할 뿐.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