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어느 정도 주부의 생활을 체득했다. 나와 동생이 따로 안양에서 둘이 살고 있는 이 상황, 부모님은 이곳에 계시지 않는 이 상황에서 마냥 아들과 딸로만 살아있다면 금새 우리는 기아에 허덕이게 될 것이요, 집은 어느새 쓰레기장이 될 것이 뻔하다. 가정부를 끌어와 쓰는 건 사치이고, 조부모님을 모시자니 이건 고생을 떠넘기는 꼴이 되어 대학생이 된 손자들의 온당한 처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둘이 부부가 아닌 이상 한 집에서 남자와 여자가 산답시고 남편과 부인의 일을 구분하기는 힘든 ㅡ 아니, 우스운 ㅡ 법, 결국 우리 둘은 서로 외조에 힘쓰는 남편이 되기보다는 집안일을 돌보는 마누라들이 되어 집안일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ㅡ.

결혼도 하지 않은 마누라들이 처음부터 겪어야 했던 task는 가히 만만치 않았다.




1. 음식물 쓰레기

나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음식물 쓰레기가 많이 나와서 국가적인 낭비라는 소리를 그냥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로 치부해 왔다. 왜냐고? 나는 내게 주어진 밥공기를 늘 다 비웠다. 반찬? 가끔 똑같은 반찬이 상 위에 올라가도 별 말 없이 조금씩 조금씩 먹어갔다.

그런데 이게 지금 와서 보니 만만치 않다. 사실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한 게 벌써 며칠 전인지 모르겠다. 반찬을 며칠간이나 냉장고에 넣어두고 유통기한이 지나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더니 내게 주어진 건 온통 냉장고 속 쓰레기 뿐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는 생기는 즉시 쓰레기통에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한꺼번에 많이 생기면 모를까. 그렇다고 냄새가 고약한데다가 외형이 상당히 불쾌감을 주는 이 물질들을 어느 때나 방치할 수는 없다. 폐지처럼 한꺼번에 모았다가 버리기에 이상적인 쓰레기가 아닌 이 음식물 아닌 음식물은 정말 만들기 싫다.

때문에 최근 집 식탁에 등장하는 반찬이며 밥은 남김없이 먹게 된다. 여기서 '남김없이'는 내가 주부가 되기 전의 '남김없이'와는 사뭇 다르다. 왜냐고? 예전에는 쌀 한 톨에 들어간 농부의 지극정성을 생각해서 남김없이 먹겠다는 아주 지고지순한 도덕적 윤리에서 비롯된 '남김없이' 였지만, 지금은 당장에 처리하기 싫은 음식물 쓰레기를 차라리 내 위장 속에 버리겠다는 아주아주 현실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남김없이' 이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남기고 간 밥과 반찬을 애들 학교 보낸 뒤에 모조리 먹는 주부들, 이해한다. 그래서 살이 찌는 주부들, 정말 이해한다. 누구나가 그 상황이 되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음식은 더 이상 음식이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음식물 쓰레기를 내 위장에 버리는 거나 다름 없다.




2. 방바닥의 머리카락

미시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생체활동이 거시적 세계에서 사람을 아주 귀찮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털이 빠지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흔히 열역학 제 2법칙을 설명할 때 시간이 지나면 방이 더러워진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굳이 물건으로 더러워진다고 말하는 것보다도 이렇게 몸에서 떨어진 털로 더러워진다고 설명하는 게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예전에는 방바닥이 그리 더러울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 혹은 놀이를 하는동안 우리의 어머니들은 열심히 청소기를 돌리시며 방바닥에 침잠했던 먼지와 쓰레기, 털들을 모두 처리하셨기 때문에.

하지만 최근에 나는 머리카락과 털들의 실체를 방바닥에서 적나라하게 발견했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여자방은...... 한번은 교회에서 열 명 가량의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왔다 간 적이 있었는데 왁자지껄 웃고 즐긴 후에 남겨진 집의 어수선함보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에 더 황망함을 느껴야 했다.

가끔 TV를 보거나 할머니 댁에 가면 수건으로 어른들이 방바닥을 문지르면서 이잡듯 바닥을 헤집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 공감할 수 있다. 청소기가 없던 그 시절, 방바닥에서 머리카락 하나를 발견하면 갑자기 이전에는 보이지도 않던 그 주변에서 또다른 머리카락들이 환영이 나타나듯 연속해서 발견되는 그 끔찍함. 휴 =3




3. 서러운 부엌

솔직히 내가 안양에 남아 하는 집안일의 대부분은 곧 부엌과 관련이 있다. 밥을 짓는다든지,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서 정리한다든지, 설거지를 한다든지 할 때에는 언제나 부엌 싱크대 앞에 곧이 서서 이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부엌이, 주부의 영토인 부엌이 나를 가끔 울리게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부엌의 싱크대 높이가 너무 낮다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 나라의 모든 가구와 물건들은 한국인의 표준 체형이 맞춰져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심했다. 내가 단재 신채호처럼 꼿꼿하게 서서 세수를 할 그런 지조까지는 발휘하기는 좀 힘들고, 그렇다고 허리를 굽히자니 이거 보통 십수분 이상 서 있다가는 허리가 끊어질 지경이다.

한국인의 표준 체형이라는 미명 하에 나를 울리게 하는 것은 바로 고무 장갑이다. 나는 설거지 도중에 고무 장갑을 끼지 않는다. 아니 끼지 못한다. 내 손은 대한민국 표준 주부들 손 크기보다 큰가보다. 항상 고무 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이상을 품지만 현실에 묶여 어찌할 수 없는 펄럭이는 깃발처럼 고무장갑은 싱크대 수도꼭지에 매달려 흔들거리고만 있다.




4. 일번가보다 북적이는 곳, 그대 이름은 은행

은행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지금 주거래은행의 통장을 ATM에서 거래할 수 없게 조치가 되어있기 때문에 홈뱅킹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일들은 직접 내가 은행에 가서 처리해야 한다.

은행에 직접 가서 예금이나 출금을 한 건 정말 오래 전 기억이다. 한창 초등학교 때였나ㅡ. 중고등학교 이후로 은행에 추위와 더위를 피하려 잠시 입구 쪽으로 들어갔던 적은 있었어도 통장과 인감을 들고 현실적인 경제 행위를 하려고 은행에 들어간 적은 드물었다.

그런데 그 때도 사람이 그렇게 많았나? 아니, 어떻게 은행을 갈 때마다 대기인수는 늘 두 자리이고 앞 자리는 1이 아닐 수 있냔 말이다. 이게 무슨 멀티플렉스 영화관 대기인수도 아니고. 그나마 영화관에서는 영화 광고지를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는데 엄숙하기 그지 없는 은행에서는 아무리 금융상품과 주식정보를 가득 담은 광고지가 손에 들려 있어도 그 무료함을 달랠 길이 없다.

은행에 가서 잠깐 졸고 있는 아줌마들을 이해할 수 있고, 은행 갔다오느라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고 호소하는 아줌마들도 이해할 수 있다. 도대체 널린 게 은행인 거 같은데 사람은 왜 더 그 안에 널려있냔 말이다 T.T




5. 잔소리

이런저런 일들도 많이 있지만 가장 주부가 억울한 이유는 자신의 주된 업무인 '집안일'이 남편들의 '바깥 일'에 비해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주부들은 절대로 집 밖의 사람들이 자신의 살림살이를 칭찬해주길 원하지는 않는다. 단지 같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서만 인정을 받게 되면 그만이다.

나는 주부의 집안일과 관련된 잔소리를 이해한다. 그건 분명 이유가 있는 호통이요, 꾸지람이며, 권고사항이다. 양말을 거꾸로 뒤집어서 빨래통이 넣지 마라, 책은 책장에 좀 꽂아 놓아라, 밥을 먹고 그릇은 싱크대에 갖다 놓아라, 휴지는 쓰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두지 말고 휴지통에 버려라...

어느새 남편들과 자식들은 부인, 어머니의 이런 말들을 차차 들어가면서 이런 '고귀한 권고'를 잔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게다가 사람이란 자신의 정말 사소한 잘못에서 비롯된 시정과 권고에 대해서는 은근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혹은 그건 잠깐의 실수였을 뿐 내 잘못은 아니라는, 또는 별 걸 다 트집잡는다고 반항하는 기질이 다 있다.

예컨대 100만원을 내일까지 납부하라는 카드사의 독촉은 엄중하게 받아들이면서도 고스톱 하다가 돈 100원을 덜 냈다는 상대방의 말에 '쫀쫀하기는' 하면서 혀를 끌끌 차는 것이 우리네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결재문서를 철해놓지 않은 잘못에 대해서는 상사에게 대단히 민망해 하면서도 고작 양말과 속옷들을 한 빨래통 안에 놓지 않고 너저분하게 '전개'했던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민망함이 없이 당당한, '뭐 그런 것 가지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잔소리는 '잔-'이라는 그런 하찮은 경멸의 의미를 다소 포함한 접두사가 붙을 만한 소리가 아니다. 정말 이건 함께 피를 나누고 항상 얼굴을 맞대고 사는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최소한 집안일에 몸을 던진 주부에게 해 주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자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들에 대한 권고이다. 고로 이건 권고할 만한 대상도 못 되는 것이지만 주부는 그래도 가족 구성원들이 알아서 하도록 무려 말로써 권유하기까지 한다.

우리들은 으레 '이런 건 엄마가 알아서 하지 이런 걸 왜 나한테 시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주부의 입장으로 보자면 '아니 이런 건 너희들이 할 수 있는데 왜 그걸 나한테 미루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이거 충분히 이해간다. 가끔 내 방 책상에 널브러진 휴지조각을 보면 '아차!' 싶고, 내 동생 이부자리가 정말 난장판이고 쑥대밭인 것을 볼 때면 잔소리가 하고 싶어진다.





6. 집안일은 보이지 않는 일, 티 내서도 안 되는 일

언제나 수업이 파한 후에 집으로 돌아오면 방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고 어느새 텅텅 비었던 속옷과 양말 넣는 서랍 안은 곱게 접힌 직물들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부자리는 어느새 말끔하게 개어져 있고, 엉망이 된 책상과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은 제 자리를 찾은 채 나를 반기고 있었다.

보통 일은 아닌데 이런 고마운 일들이 계속 반복되다보니 어느새 은혜는 잊고 당연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비단 방 청소 뿐이에랴. 설거지, 빨래, 바닥청소, 쓰레기 분리수거, 관리비 납부 등등.. 지금 내가 당장 당면한 이 집안일들 하나하나를 생각해보면 내가 도대체 이 '집'의 구성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지했고, 무관심했으며, 은혜를 몰랐던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어버이날이 되면 으레 하게 되는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감사하다는 그런 형식적인 감사 말고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사를 전할 때 우리네 주부들이 얼마나 기뻐할까.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집안일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졌고 어두워졌다.

어쩌면 우리는 공상 과학 서적에서 늘 등장하는 집안일 해주는 로봇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네 어머니들은 로봇이 아니다. 인격을 가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너저분하게 상승시키는 엔트로피(Entropy)를 감소시키려고 자신의 엔트로피를 상승시키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주부 말고 어디에 있나. 로봇들이야 전력만 공급해주면 아무 문제없지만, 사람이 어찌 일에 대한 급료만 받는다고 아무 문제없을 수 있나. 인간이 하는 일에는 항상 격려와 칭찬, 공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미 가족이란 사람들은 주부에 대한 격려와 칭찬, 공조를 잊은 지 오래고, 심지어는 로봇같이 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시대의 주부들도 이미 그런 분위기를 아는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티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말이야 아침부터 일어나서 설거지 하고...' 이렇게 말을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기에, 분하기도 하고 내가 왜 이런 걸 새삼 말을 꺼내나 싶기도 하고, 그리고 동시에 이런 집안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가족들에게는 별로 어필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아무튼 집안일은 그 특수성 때문에 그동안 그 중요성이나 고마움에 대해 가족들은 항상 함구해왔고, 간과당했으며 주부들 자신들도 자신들이 독립된 개성 자체로서보다는 여자, 아내, 엄마이기에 그렇게 내세우지 않아 왔다. 어쩌면 주부들의 바가지와 잔소리, 남편, 자식간의 말다툼의 근원은 바로 여기서 솟구치는 스트레스와 분노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우리 가족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해야 할 최선의 과제는 보이지 않는 집안일을 아내, 어머니를 대신해서 조금씩 해나가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집안일을 어떻게 하면 되냐고? 간단하다. 아내, 어머니의 잔소리를 그대로 실행하면 된다. 그게 당장 당신의 아내, 어머니가 필요로 하는 우리들의 노동이며 이해이며 공조인 것이다. 거창한 선물보다 이것이 우리네 주부들에게 시급히 필요한 남편과 자식들의 모습이다. :)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