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국어국문학이나 한국사 전공이었다면 유학은 절대로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고? 국어국문학과 한국사는 서울대가 세계 최고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지금 화학과 물리를 공부하는 나는 유학을 생각하고 있는가?

유학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건 정말 거짓말이 아닐까. 병역이 어떻게든 해결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토플이 어쩌고, GRE가 어쩌고 하면서 유학을 준비한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유학파이신 외숙부께서는 강력히 유학을 권장하다 못해 아예 미국에 가서 눌러 앉아 거기서 연구하며 살라고 적극 권고하셨다. (실제로 외숙부의 장남은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선택했다.)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전개해보자. 외숙부는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본인의 경험으로는 미국같이 고등교육 환경이 잘 조성된 곳이 없으며 만일 그 곳에서 연구활동을 한다면 다른 것에 신경쓸 필요없이 마음 놓고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은 환경도 열악하고 신경써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제대로 된 연구활동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이라는 게 외숙부의 설명.

GRE를 준비하는 한 친구는 자기는 절대로 한국에서 직업을 갖지 않고 미국에서 교수를 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렇기 때문에 학사를 마치면 바로 유학을 갈 생각인데 학점 관리가 쉽지 않아 걱정이라고 내 앞에서 탄식을 하곤 했다. 최근에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물리학부에서 성적이 매우 우수한 한 학생 역시 병역은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후에 귀국하여 해결하기로 하고 학사 졸업 후 외국대학으로 유학갈 것을 희망한다고 했다. 그 뿐만 아니다. 어떤 블로그에 들어갔는데 우연히도 우리 학교 물리학부 선배라서 찬찬히 읽어봤더니 거기에도 유학에 대한 논의가 이런저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사촌누나도 지난 여름에 일본에서 GRE를 매우 잘 쳤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는 유학의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우리 학부의 정두수 교수님과 입장을 같이 한다. 우리 나라는 마치 고급인력의 씨앗을 잘 발아시켰다가 이제 막 가꾸려고 하면 미국에 싸게 팔아넘겨서 나중에 거기서 열리는 열매를 맛 보지는 못하고 입맛만 다시는 그런 나라인 것 같다. 고급 인력은 죄다 밖으로 나가니 국내에서 질 좋은 연구가 진행될리 만무하다. 우리나라 과학 연구 환경이 매우 개선된 것은 초기 유학파 교수님들의 공헌이 매우 크긴 했지만 정작 이 분들을 도와 연구에 매진할 좋은 대학원생들은 국내에 없는 것이다.

일본같은 경우는 고등교육을 통한 고급 박사 인력을 국내에서 자급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물론 우리나라가 일본같은 경제대국, 과학기술대국은 아니지만 일본은 이미 메이지 유신 때부터 유학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설사 유학을 했더라도 그 사람들은 아예 해외에 눌러 살 작정을 한 사람들이며 그 사람들이 일본으로 돌아와 직업을 가지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공부를 좀 한다 하면 유학이 대세이며 유학을 해서 외국 학위를 가져오면 그것은 특권이 되어 버리고, 그것을 통해 온갖 우대를 받게 된다.

이 상황이 과연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판단은 유보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공부를 어디서 하느냐 하는 것은 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완벽히 보장된 '자유'에 따르는 것이고, 실제로 외국의 대학이 대체적으로 괜찮은 환경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식으로 가뜩이나 이공계 기피현상도 심한데 국내에서 박사할 사람은 줄어들고 또 외국에서 박사를 해도 취직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게 될 것을 염려하여 외국에서 직업을 갖는 경향이 많아지면 10년, 20년 후에는 우리 나라가 어떤 파탄을 맞이할 지는 경계해야 할 문제이다. 심각한 인력 유출이고 외화 유출이고 그리고 국내 고등교육의 질은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보할 수 있다.

상황이 매우 묘한 것이 유학을 다녀오신 교수님들은 학생들더러 유학을 가지 말라고 권하고 싶지만 또 상황상, 그렇게 붙잡는 것도 좀 뭐하고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인의 가치는 늘 불투명하니까. 국내 박사가 아직은 저평가되어 있는데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고 유학을 보내자니 당장 함께 연구할 만한 재목은 부족하고 가뜩이나 신입생들의 실력은 저하되는데 의대, 치대, 한의대로 빠지는 똑똑한 인재는 막을 길이 없어 한탄만 하는 게 현 상황이라는 것이다.

요전에 교회에서 서형식 집사님을 만났다. 지금 우리 학교 수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밟고 계신데, 신약연구소에서 일을 하시다가 학교로 다시 돌아오셨다. 길게 대화하지는 못했지만 그 분이 내게 이야기해주신 몇 가지가 뇌리에 확 꽂혔는데, 그 중 하나가 국제적인 연구가 외국에서 하는 연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아무리 유명한 MIT나 하버드라도 미국에서는 연구비 못 받아서 가난한 랩이 부지기수이며, 요즘같이 세계가 서로 소통하는 이 시대에 의사 소통 언어, 연구 시설만 다를 뿐 연구하는 것은 국내나 해외나 일반이라는 것이다. 국내 랩은 외국의 자유로운 사고가 허용되는 그런 랩보다는 약간 수직적이고 소통이 활발하지 않은 그런 한국적 분위기가 아직 남은 그런 랩이긴 하지만 그건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고 하시면서, 집사님은 내게 석박사 통합으로 1년을 벌고 그 기간동안 포닥을 더 오래 뛰는 것이 경력에도 좋고 연구 성과와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글쎄. 정택동 교수님도 지난 학기 학번 대표들을 모아 놓고 국내 대학원 진학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던 적이 있으셨다. 사실 틀린 말이 아니다. 예전에 비해 서울대의 위상도 많이 높아졌고, 국내 박사들의 채용이 점차 늘어가는 것이 보이고 있으며 게다가 교수님들 사이에서도 국내 학위를 장려하고 격려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아마 내가 연구 성과를 내기 시작하는 10년, 20년 후 쯤에는 지금과 같은 이공계 기피 현상이 완화되어 있지는 않을까? 해외 박사를 국내 박사보다 그저 우대해 주는 그런 현상이 감소하거나 혹여나 역전되지는 않을까? 국내 연구 환경은 지금보다 더 개선되고 선진화되지 않을까?

나는 요즘 때 아닌 미래의 일 문제로 고심 중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