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었던 2월 초순의 한 새벽이었다. 늦은 새벽이었는데 아버지께서 바둑 대국을 TV로 지켜보고 계셨다. 목소리가 아주 낯익은 노영하 9단의 해설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게 옛날 생각이 났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바둑을 늘 강조 하시면서 노영하 9단(당시에는 7단)이 해설한 바둑강좌 비디오를 사 놓으시고, 또다른 바둑 해설 책들을 책장 위에 진열해 두셨다. 바둑을 비록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그 비디오와 책들을 시간 날 때 열심히 읽은 끝에 '촉촉수, 소목, 매화오궁, 치중, 빈삼각은 두지 마라'와 같은 말들은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TV에서는 젊은 기사와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든 기사가 서로 대결하고 있었다. 나는 후반부부터 대국을 보기 시작했는데 이미 끝난 바둑이었다. 백이 실착을 하는 사이 흑은 손쉽게 수십집을 아예 '굳혀놓은' 상태였고 해설자 역시 이미 승부는 났다는 듯이 끝내기 도중 '흑과 같이 유리한 상황이라면 백이 어떻게 두더라도 적당히 대응해 주는 것이 무난한 선택이죠' 라고 했다. 백은 중앙에 세력을 비교적 두텁게 만들려고 했지만 흑에 의해 잠식당하고, 귀와 변이 대부분 흑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참사(?)를 당하는 바람에 아무리 5.5집을 더하더라도 승부가 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와 아버지는 백이 돌을 던지겠거니 싶었다. 한술 더 떠 나는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샤워를 하고 나오자 아버지 曰 "성수야 바둑이 바로 이런 거야"

네? 그게 판세가 바뀌기라도 했나? 그건 불가능했는데 말이다. 아버지도, 노영하 9단도 인정했던 것 아닌가. 그런데 결과는 백의 불계승. 흑이 기권한 것이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노영하 9단은 '신년벽두에 참 재미있는 상황이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하며 해설을 하기 시작했다. 해설을 듣고 보니 흑은 다 이긴 경기를 단 한 순간의 판단착오로 인해 놓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앙에 자리 잡은 흑 대마는 무난하게 두 집을 내어 살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백의 도발에 흑이 잘못 대응하여 '패'가 만들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열세였더 백에게는 팻감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흑은 이 패에서 완벽하게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 패에서 지면 중앙의 흑 대마가 모두 잡힌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안 흑은 돌을 던졌던 것이다. '과연 바둑돌 한 수의 잘못에 의해 바둑 한 판을 그르치게 될까?'하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예시로 들 수 있는 대국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사실 이게 결코 게임 속에서나 일어나는 '황당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일들은 언제나 많이 일어나니까. 잘 나가다가 한 번 삐끗한 일로 인해 파국으로 치달은 우리의 계획과 관계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날 노영하 9단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바둑이 아닌 삶에 대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