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들이 극도로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는 자신들의 비평이 비평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할 때라고 한다. 도대체 누가 그들의 비평을 비평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면, 그렇게 평론가들을 낙담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이다. 첫 번째는 비평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중 일부이다. 두 번째는 비평문을 읽는 사람들 중 일부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비평문을 쓰는 자기네들 중 일부이다. 그 중에 첫 번째와 세 번째의 경우는 '개인'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옆동네 성질 고약한 친구, 그리고 정말 같은 반 친구라고 남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애물단지 급우같이 느끼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두 번째 경우이다. 즉, 다수인 대중에 관한 것이다. 왜 대중이라는 주체가 평론가들에게 민감한가? 가장 중요한 것은 평론가들이 쓰는 비평문을 읽는 주체는 일반 대중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수요를 창출해내기 때문에 평론가들에게 할 일이 떨어지는 것이고, 사실 평론가들은 읽어주는 대중 없이는 고고하게 살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런데 평론가와 대중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제품 생산자와 구매자의 관계와는 다른 것 같다. 즉, 후자의 경우 제품 생산자는 구매자의 수요에 철저히 복종한다. 즉, 구매자의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어쨌든 잘 팔리게끔 마케팅을 하고 자신들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전자는 다르다. 전자의 경우 컨텐츠의 제공자는 컨텐츠의 소비자가 알지 못하는 전문적인 것을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소비자가 원하는 바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 지를 그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게 오히려 그들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르는 것을,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알고, 보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알려줄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전문적인 지식과 소양을 쌓아 온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평론가로서 업을 얻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을 전할 사명감을 부여받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대중이 이러한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에 대한 복종도에 따라 서로의 관계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예를 들면 의료나 법리에 관련된 컨텐츠라면 대중은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대개 복종하는 편이다. 의사의 처방과 변호사의 조언은 들어서 해가 되지 않을 것들이니까. 수학이나 철학에 대한 컨텐츠라면 사실 복종을 초월한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은 이러한 전문지식에 대해 일반적으로 관심이 없으니까.

그런데 문화 컨텐츠라면 사정이 복잡해진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컨텐츠에 무관심하지 않다. 더욱이 이런 컨텐츠를 접하는 방식은 다양하고 게다가 느끼는 방식도 개인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볼까? 1) 감기에 걸렸다는 사람들이 의사에게 간다면 의사는 약을 지어주면서도 손을 자주 씻고 무리를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한다. 이것은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이고 거기에 이의를 달거나 의문을 다는 사람은 없다. 2) 어느 수학자가 사람들에게 페르마의 정리가 와일드라는 영국 수학자에 의해 증명되었다고 소개하며 이 엄청난 수학사적 사건이 앞으로의 수학,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소개한다. 이것은 애초에 '페르마'가 누군지도 모르는 대중들에게는 먼 나라 안드로메다의 이야기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 여기에 대해 이의를 달거나 의문을 다는 사람은 없다. 3) 어떤 감독이 영화를 한 편 냈다. 영화평론가들이 이 영화의 의미와 특징에 대해 소개하고 결과적으로 이 영화가 어떤 수준인지,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 지 소개하며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관심 있는 이야기이긴 하다. 나는 그 말이 진짜처럼 느껴지고 실제로 영화를 봤는데 그런 의미가 느껴지는 것 같다. 따라서 평론가의 감상과 전문지식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내 친구는 영 그 영화는 쓰레기라며 비난한다. 따라서 평론가의 감상과 전문지식을 경멸하며 쓰레기통에 버려 버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사람들에게 일어난 걸까? 사람들은 각자 '자존심'과 '개인적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대신, 과학적이거나 혹은 계량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자존심과 개인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서는 잘 정립된 학문의 잣대를 따르는 것이 좀 더 안전하고, 믿을 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 컨텐츠에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여기에는 잘 정립된 학문을 따른다고 내가 더 이득을 보거나 하는 일이 없다. 삶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진보나 목적성을 성취하기 위한 특정한 매뉴얼이라는 게 있을 필요가 없다. 자신의 방식대로 만족할 줄 알면 그것으로서 좋은 것일 뿐이다. (사실 문화라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런 것들의 전문지식에 대해 대중은 매우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른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식의 입장이다. 만일 전문지식이 자신의 만족하는 방향과 일치한다고 보면 그러한 전문지식을 자신들의 선호에 대한 근거로 삼는다. 반대로 전문지식이 자신의 만족하는 방향과 다른 곳을 가리킨다면, 그러한 전문지식은 딴 사람의 사견일 뿐이고 난 나대로의 방식이 중요하니 나는 선호한다고 말한다. 이건 순전히 어떤 대상에 대한 전문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너무나도 좋은데다가 그 대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무조건 개인의 자유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은 약간 그것을 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렇기 때문에 '평론가들이 존재해서 무엇 하나?'하는 논란이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다. 나는 내 식대로 느끼면 되는 것이고 개인의 사고와 감정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인데 어찌 감히 평론가 따위가 그런 것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며 감상의 대상을 자기 멋대로 이리 자르고 저리 붙여 재단하느냐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문제는 평론가의 입장과 대중의 입장이 극명하게 엇갈릴 때 더욱 심하게 불거지는데 가장 최근의 예로는 심형래 감독의 영화 'D-War'에 대한 평론가들과 충무로의 입장, 그리고 대중들의 입장의 차이였다. 평론가들은 정말 기대를 저버린 난삽한 영화에 불과하다고 혹평을 가했고, 대중들은 심형래 감독을 적극 지지하며 ㅡ 물론 감정에 기댄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ㅡ 영화가 의미가 있었다고 호평해 마지 않았다. 이러면서 등장한 것이 '평론가 지들이 뭔데...'하는 식의 불만이었다. 이러한 과잉 충돌은 충무로의 몇몇 감독들이 심형래에 대한 비난글을 게재하고, MBC 100분 토론에서 ㅡ 나는 아직도 대체 MBC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제를 가지고 100분이나 토론하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ㅡ 진중권 씨 등의 '독설가'들이 영화 하나를 가지고 설전을 벌이는 바람에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진중권의 '미학적 비난'은 앞에서 말한 대로 대중들이 정말 관심 없어하는 전문지식에 기댄 말이었기 때문에 '평론가 무용론'을 주장하는 대중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음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이적을 예로 들까? 음악평론가들은 항상 이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나 늘 무용함을 느끼곤 했다고 한다. 그들의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적은 본인의 음악이란 존재하지 않고 좋게 말하면 다채로움, 나쁘게 말하면 시류영합적인 난삽함만이 존재하는가? 2) 그렇게 만든 곡이 아무리 좋아봐야 '고급스런 음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2번의 비평은 비단 이적 뿐 아니라 많은 비평가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다른 가수들 ㅡ 예를 들면 유희열, 자우림 ㅡ 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가수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팬덤으로 조성된 강력한 울타리 내지는 '성역'이 가수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들은 가수가 아닌 '뮤지션 혹은 아티스트'로 불려진다. 이러한 덫 혹은 함정에 대해 비평가들은 그들이 내놓는 허구한날 똑같은 '고급스러운 음악'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날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충성도 높은 팬들의 집중포화였다. 대개 이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다 똑같다. 개인이 느끼는 것은 다 각자 다르고 자유인데 평론가의 의견 따위는 자기가 느끼는 바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내지는 '그래도 우리 오빠 노래가 제일 좋아'하는 거의 교조적인 감상평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과연 평론가들의 비평이 과연 온전히 대중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느냐 하는 문제이다. 물론 절대 다수의 대중이 그들의 비평문을 읽는다는 것은 재론할 여지가 없는 확고한 사실이다. 그리고 평론가들이 주장하고 이야기하는 바를 대중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계몽적인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몇몇 평론가들은 이러한 계몽적인 성격을 시니컬한 문체로, 아니면 불타는 듯한 문체로 표현하는 것 같다.)도 인정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문화에 무지몽매한 우리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식자층 노릇을 우리 위에서 하는 것이라고 봐도 되는 걸까?

내 요즘 생각에는 평론가들의 비평의 끝은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문화 컨텐츠를 생산해 내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는 것 같다(이는 앞에서 그들은 우리를 향한 일말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라고 생각했던 사고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비평을 듣고 격려를 얻거나 혹은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것은 사실 대중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가들, 작가들, 영화감독들, 화가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최근에 어떤 사이트에서 발터 벤야민이라는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가 이렇게 얘기했다는 것을 보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비평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는 것과는 반대로 비평은 그 핵심 의도에서 평가가 아니다. 오히려 비평은 작품을 완성시키고 보완하며 체계화하는 한편, 작품을 절대성 안에서 해체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비평이라는 행동은 컨텐츠의 소비자 입장에서 가까운 일이라기보다는 생산자 입장에 더 가까운 일이라는 것이다. 생산의 활동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이고, 보완하고 점검하는 것이며, 그것이 내재하고 있는 위험성과 대중에 끼칠 악영향을 경고해 주는 일종의 조력자 역할인 셈이다.

물론 대중의 입장에서는 평론가들의 행동이 매우 눈꼴시려운 것일 수도 있다. 저들은 앉아서 감상을 하고는 어디서 주워들은 현학적인 말들로 글만 써내려 나가는 게 생업의 전부 아니냐고. 괜히 훈계하려는 듯한 그러한 문체는 싸가지 없게 보인다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혹여라도 까는 비평이라도 하면 확 뒤집어 놓고 싶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적어도 평론가가 평론가임을 자처하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더 다양한 문화 컨텐츠를 접했을 것이고, 자신 안에서 수용하고 거르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했을 것이며, 그리고 비평하는 일도 한두 번 한 게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떤 의견을 개진했다고 했을 때 '나와는 다른 생각'이라고 해서 평론가 무용론을 들고 나오는 것은 현대 사회를 사는 시민으로서 다소 부적절한 태도가 아니겠나? 존중. 존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은, 어쨌든 평론가도 비평을 하기 이전에는 우리와 같은 감상자요 대중의 일부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그들의 감상도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이다. 비평이 교과서나 백서에 실릴 만한 선언이 아닐 바에야 그 글에 절대성을 부여할 필요도 없을텐데,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사람은 이렇게 이해하는구나, 이런 이해의 방식이 있구나, 내가 알지 못했던 느낌이나 감상적 초점에는 이런 것이 있구나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게 문화 컨텐츠의 소비자들의 비평과 평론가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평론가 무용론을 외치며 내 것을 고수하는 그런 쇄국 정책을 펴지 말고, 그 비평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비평을 읽어보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또 아는가. 그렇게 성장한 몇몇이 참신한 비평을 할 줄 아는 또다른 제 2의, 제 3의 평론가로 성장할 수 있을는지.

아참. 그런 면에서 한 가지 덧붙여 말해야겠다. 평론가들을 적으로 돌리는 몇몇 문화 컨텐츠 생산자들의 태도는 지양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스스로의 울타리 안에 가두는 행동을 하는 것이고, 결국 자신의 울타리에서 침윤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평의 준엄한 해체와 냉철한 보완이 없이는 결코 문화의 지평을 확장해 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