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소그래피(lithography)는 그리스어로 '돌(λίθος)에 새기다(γράφω)'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리소그래피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중학교 1학년 미술 시간에서였다. 사실 리소그래피는 석판화(石版畵)를 뜻하는 말이다. 판화의 기법에 대해서 배울 때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평판화(平版畵)였는데 이전까지는 당연히 판화이기 위해서는 요철(凹凸)이 있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래야 잉크를 묻히든지 채우든지 하여 새긴 판 위에 종이를 올려 놓고 찍어낼 수 있는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도대체 평평한 면에 무슨 수로 그러한 잉크의 묻음과 묻지 않음을 구별시킬 수 있겠나, 그럴 수는 없지 하는 것이 당시의 내 생각이었다. 그 때 중학교 미술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히 남는다. "여러분 돌에 물이 안 발리죠? 그런데 아라비아 고무를 쓰면 물이 잘 발려요." 발린다는 표현이 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아라비아 고무가 어떻게 생겨먹은 지 알 수 없는 생소한 존재라서 그랬는지 이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칠하다의 뜻을 가진 바르다라는 동사의 피동형은 도대체 뭘까? 발리다? 발라지다? 한국어에서는 피동형 동사의 사용을 다소 자제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어쩌면 바르다라는 동사의 피동형은 잘 발달되지 않아 한국어 화자에게 익숙하지 않을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정체불명의 '발린다'라는 단어가 다시 나를 격동하게 만든 것은 훨씬 시간이 지나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였다. 수업 시간에 'wetting'과 'dewetting'이 나와서 한창 설명이 진행되고 있는데 머릿속은 온통 갑작스럽게 떠올린 옛 친구에 심금을 울리는 기억 마냥 이 생각 뿐이었다. 저게 바로 리소그래피 아니던가, 아라비아 고무로구먼.

물이 어떤 표면에 잘 발리는지 안 발리는지는 표면의 특징을 살펴보면 된다. 쉽게 말해 물이랑 표면이랑 친한지 안 친한지를 살펴보라. 만일 표면이 공기와 맞닿는 것보다 물을 훨씬 좋아하면 물이 표면에 떨어졌을 때 기왕이면 표면을 넓게 적시는 쪽으로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것을 wetting이라고 하고, 이 때 표면은 친수성(hydrophilic)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대로 표면이 물을 극도로 혐오하는 상태라면 차라리 표면과 맞닿아 있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 역시 나를 싫어하듯 물도 표면과 맞닿아 있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런데 물은 표면 위로 떨어졌다. 이 경우에 물은 표면과 맞닿는 면을 최소화하려 들 것이고 이렇게 되면 표면 위에서 최대한 구형을 이루면서 '동그랗게' 응집된 방울의 형태로 표면 위에 여기저기 흩어져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것을 dewetting이라고 하고, 이 때 표면을 소수성(hydrophobic)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좀 더 유식한 과학적 표현을 쓰자면 이는 표면 장력(surface tenstion)과 관련된 것으로 이는 접촉 면적을 단위 면적만큼 늘리기 위해 필요한 깁스 자유 에너지(Gibbs free energy)로 정의할 수 있는데, wetting과 dewetting에 대한 물리화학적 현상은 표면과 물(AB), 물과 공기(BC), 그리고 공기와 표면(CA) 이 세 접촉에 대한 표면 장력 값들의 크기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일 AB의 표면 장력이 BC와 CA에 비해 월등히 크다면 wetting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그 유명한 천재인 토마스 영(Young, T., 이 사람은 로제타 석을 해독한 언어학자이자 빛의 파동성을 뒷받침해주는 이중 슬릿 간섭 실험으로 유명한 그 사람이다.)이 밝혀내었다.

리소그래피는 결국 아라비아 고무를 통해 대리석과 같은 돌 표면의 표면 장력을 변화시켜 줌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최초의 리소그래피는 세네펠더(Senefelder, J.A.)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방식은 다음과 같다: 대리석 위에 기름으로 그림을 그리고 아리비아 고무액을 그 위에 바른다. 아라비아 고무는 기름이 칠해진 곳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찐득찐득하게 달라붙을 것이고 물은 오직 아라비아 고무가 덮여진 부분에만, 즉 기름이 칠해지지 않은 곳에만 발린다. 이제 유성 잉크가 돌판 전체에 칠해진다. 이 때 유성 잉크는 기름이 칠해진 부분에만 묻게 되고 그 외의 부분을 적시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찍어내면 된다. 물론 세밀한 과정에는 더 복잡한 절차와 화학이 포함되어 있지만 기본적인 방식은 저렇다. 결국 친수성과 소수성을 조절하는 것에서 결판이 나는 것이다. 기름이 칠해진 곳은 소수성 표면이 되는 것이고, 아라비아 고무액이 붙은 부분은 친수성 표면이 되는 것이다. 결국 유성 잉크는 소수성 표면을 wetting하지만 친수성 표면에서는 dewetting이 되어 제거되고 결국 wetting된 표면만이 종이에 찍혀 판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리소그래피는 18세기 말에 홀연히 등장하여 기존의 양각, 음각 방식의 판화 제작 기법(intalio printing)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왜냐하면 평면 위에 판을 제작하여 종이로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요철을 주어 판을 만들었다면 종이로 찍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위에서 판과 종이를 압착시켜 발라진 잉크가 종이에 묻어나도록 해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요철이 파손되거나 심하면 판 자체에 균얼이 가거나 망가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판을 보관하는 중에 제작된 판의 요철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만다. 평판화는 이러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시켜 주어 판의 유통 기한을 이전보다 훨씬 더 길게 해 주었던 것이다.

20세기 말에 반도체 산업이 현대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산업이 되면서 리소그래피라는 말은 다시 한 번 더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리소그래피라고 하면 석판화보다는 반도체 제작 공정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통용되는 그러한 리소그래피는 엄밀하게는 리소그래피가 아니다. 왜냐하면 반도체 공정에서의 리소그래피 ㅡ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빛 리소그래피(photolithography) ㅡ 는 표면에 수십 나노미터 정도의 선폭을 갖는 요철을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감광제(photoresist)를 표면 위에 깔고 빛이나 전자 빔을 쪼여 빛을 받은 부분에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양각이나 음각이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빛을 받은 부분은 없어지게 된다. 이윽고 최종적으로 식각(etching) 과정을 통해 없어진 부분만이 일정한 깊이로 깎이고 빛을 안 받아서 감광제가 마스크(mask)로서 덮여 있는 부분은 식각되지 않고 그대로 남게 된다. 결론적으로 감광제를 모두 없애면 수십 나노미터의 선폭을 갖는 요철이 형성된다. 어찌보면 이러한 과정은 드라이포인트나 에칭(동판화의 일종)과 비슷한 것이다. 원리와 과정이 이런 식이니 미술가들이이라면 혀를 끌끌 차면서 현재의 빛 리소그래피의 이름을 빛 에칭(photoetching)으로 바꾸라고 성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돌에 새기는 석판화가 추억으로 사라졌어도 리소그래피라는 단어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이야기되는 건 순전히 빛 리소그래피 덕분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창안자아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최근에는 후배격이라 할 수 있는 빛 리소그래피가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는 탑-다운(top-down) 방식이라 하여 분자의 자기 조립(self-assembly)과 같은 방식을 이용한 바텀-업(bottom-up) 방식으로 반도체 공정을 혁신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있다. 그러나 어느 사람이나 공히 인정하는 것은, 빛 리소그래피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지금 즐기고 있는 이만큼이나 고도로 발전된 첨단 정보 사회 문화를 향유하는 것을 담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2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라. 선배격인 리소그래피의 출현으로 인해 인류의 판화, 인쇄 기술이 급속도로 진보하게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 당시로 치면 작금의 반도체 기술의 발전만큼이나 위대하고 가히 혁명적인 과학기술의 진보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리소그래피라는 단어에 행운이 깃든 좋은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후배나 선배나 매한가지로 인류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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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