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께서 가끔 말씀하시는 일화 중의 하나가 원숭이 일화가 있다. 어떤 사람이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높은 위치에 매달아 놓았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잡기 위해 다가가면 갑자기 위에서 샤워기가 틀어지게 되어 차가운 물이 순식간에 쏟아지게 된다. 원숭이는 찬물 세례를 극도로 싫어하므로 몇 번 바나나를 집으려다가 이내 찬물이 무서워 포기하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몇 번 경험을 하게 된 원숭이들이 다른 원숭이들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줘, 그들은 정작 한 번도 물세례를 받아본 적이 없으나 '선배'로부터 전해들은 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 애초부터 바나나 먹기를 단념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 없는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조직이야말로 문제가 있는 집단이다. 겉으로 봐서는 수직적인 의사 전달을 통해 빠르고 효율적인 행동이 가능할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경직된 사고로 인해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 상당히 유연하지 못하고, 고비를 맞닥뜨렸을 때 효과적으로 위기를 넘기지 못하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 ??문이다. 우리 사회는 항상 '왜?'라는 질문이 억압받았던 때마다 암울한 시기를 맞이했다. 위정자들과 나이 든 사람들은 대중이 던지는 물음표가 사회 혼란의 주범이며 앞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의 고견을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엄연히 '왜?'는 사회 변혁의 중심에 선 단어였으며 고인 물을 시원하게 순환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질문이었다.

'왜?'에서 비롯되는 의견 충돌은 건강한 사회와 건강한 관계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종속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한 이유의 명확한 이해 및 비판적 성찰을 통해 더 나은 결과를 도모할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게다가 가끔은 '왜?'라고 질문한 사람 뿐 아니라 질문을 받은 사람도 그 질문을 통해 새로운 것을 깨닫고 고쳐나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도 잘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원숭이들이 처음부터 단념했던 바나나를 어쩌면 가질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단지 다른 도구를 살 돈이 먼저 필요한 게 아니고, '왜?'라는 질문을 던져봤어야 했던 것이다.

나는 무비판적인 수용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물론 그래야 할 때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관계에서나 용인해야 할 불가피한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충분한 고려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행동을 바꾸는 일,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는 일,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을 바꾸는 일 모두 단순한 하향식 메시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피곤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왜?'라고 묻는 사람을 환영한다. 그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나도 뭔가를 개선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왜?'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끔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비록 그건 힘든 일이지만 나는 그게 제일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