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학생 시절 국어 시간에 한국어가 알타이어족(族)으로서 터키어, 퉁구스어, 몽골어, 만주어 등과 근연 관계에 있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이것은 충격적이게도 확립된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설에 불과했던 것이며, 심지어 근래에 들어와서는 많은 언어학자들이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주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알타이어족설에 힘을 실어주는 연구가 2021년 과학 저널 『네이처(Nature)』에 실린 적이 있으니, 바로 트랜스유라시아어족(transeurasian languages)의 분화 과정을 농업 기술의 전파와 견주어 연구한 논문이 되시겠다 (Triangulation supports agricultural spread of the Transeurasian languages. Nature, 2021, 599, 616.) 이 논문은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데, 여기서 triangulation은 본래 거리 측량을 위해 쓰는 삼각측량법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서로 다른 학문 분야인 언어학, 고고학, 유전학의 검증을 종합한 연구 방식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 연구는 관련 학계에서 ㅡ 특히 한국어의 뿌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학자들에게 ㅡ 굉장히 큰 주목을 받은 듯한데, 나도 오랜만에 네이처에서 흥미롭게 읽어볼 만한 사회 과학 논문을 알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기존 알타이어족설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에서 유목민 생활을 하던 사람들 중 서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의 언어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 걸친 튀르크 언어의 조상이 되었고,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의 언어는 차례로 퉁구스, 몽골, 한국어, 일본어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본 연구 논문에 따르면, 이 알타이어의 조상은 다름아닌 9,000여년 전 중국 동북 지역에 있는 요하(遼河, 랴오허) 서쪽 지역에서 곡물의 한 종류인 기장을 재배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인구가 늘자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적은 기장의 특성상 사람들은 더 큰 부양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경지를 확장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 결과 농경 문화가 확산되면서 6,500여년 전에 일부 사람들이 한반도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쓰는 한국어의 근본을 구성했다고 한다. 하긴 요하 지역의 고대 문명은 중국 중원의 황화 문명과는 애초에 다른 점이 많았고, 오히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무척 비슷했다 ㅡ 국사 시간에 열심히 배웠던 빗살무늬토기 비파형 동검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항상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요하와 만주 지방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에서도 출토되는데, 그 이유가 이 연구 논문의 결과와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 나라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기장을 재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한반도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곡식 낟알은 다름 아닌 기장이라고 한다. 이 기장은 주식이기도 했지만 술을 빚는 데 쓰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요동(遼東)과 산동(山東) 반도 지역에서 약 3,300년전에 이주한 사람들에 의해 비로소 우리의 주식인 쌀을 맺는 벼가 건너오게 되었다고 하며, 벼농사법은 3,000년 전쯤에 일본 규슈(九州)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장구한 한반도 역사 속에서 쌀은 기장의 한참 후배인 셈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쌀은 자포니카 쌀(japonica rice)이라는 품종으로 길이가 짧은 쌀이었는데, 이것으로 밥을 지으면 차지고 윤기가 나는 특징이 있었다. 정작 한반도보다 앞서 쌀이 전래된 중국에서는 인디카 쌀(indica rice) 혹은 안남미(安南米)를 주로 재배하는데, 이 쌀은 길이가 길며 찰기가 없어서 밥을 지으면 밥알이 서로 분리된다. 현재 자포니카 쌀을 압도적인 비율로 소비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인데, 자포니카 쌀 특유의 끈끈한 특징 덕분에 한국과 일본에서는 주먹밥이라고도 하는 독특한 형태의 뭉친 쌀밥 요리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쌀보다 앞서 한반도로 전래된 기장도 끈기가 있는 편이다. 기장으로도 죽이나 떡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오죽하면 허신(許愼)이 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기장을 의미하는 한자인 '기장 서(黍)'를 풀이할 때 「禾屬而黏者也 。(끈끈한 곡류를 뜻한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 한자는 갑골문(甲骨文)에서는 가지를 많이 친 곡물 형태를 본뜬 모양이었지만, 금문(金文)에 이르러 물을 의미하는 글자가 주변에 같이 쓰이기 시작했고, 예서(隸書)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벼 화(禾) 밑에 물 수(水)가 있는 지금의 형태에 근접하게 되었다. 글자 속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술을 담그기 위해 썼다는 의미로 집어넣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끈적끈적하다는 의미로 집어넣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동아시아에서 오래 전부터 재배한 기장의 끈끈함은 예로부터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끈끈하다는 의미를 가진 한자를 만들기 위해 중국인들은 뜻과 관련된 기장 서(黍)에 소리와 관련된 점칠 점(占)을 더해 '차질 점(黏)'이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한자를 [점]이라고 읽는 것은 한국인 뿐인데, 본래 이 한자의 발음을 나타내는 반절(半切)에 따르면 女廉切 이므로 [념]이 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소리를 나타내는 占의 발음에 이끌려 속음(俗音)으로서 [점]이라고 읽은 것이다. 반면 본음(本音)을 따르는 중국어로는 이 한자를 [니엔]이라고 읽고, 일본어로는 [넨]이라고 읽는다.

그런데 여기에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끈끈하다는 성질을 표현할 때에는 黏이 아니라 '끈끈할 점(粘)'을 쓴다는 것이다. 이 한자는 黏과 비슷하지만, 뜻과 관련된 한자로서 '기장 서(黍)'가 아닌 '쌀 미(米)'를 쓴다는 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과 일본에서는 3,000~3,300년 전쯤에 전래된 자포니카 쌀의 재배와 소비가 압도적으로 늘면서 기장의 생산량을 아득히 추월했고, 그러다보니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끈끈한 곡물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것은 기장이 아니라 쌀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黏과 粘 중에서 끈끈하다는 의미로 쓸 한자를 선택할 때 후자에 이끌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끈끈한 성질, 곧 영어로 viscosity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粘度[넨도]라 쓴 것이고,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인들도 [점도]라고 일컬은 것이다. 이와는 달리, 중국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찰기가 없는 인디카 쌀을 재배하고 소비한다. 그러니 한자를 쓰는 중국인 입장에서 굳이 黏이라는 한자 대신 粘을 쓸 욕구가 강하게 들지 않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어에서는 점도를 나타내는 단어로서 粘度가 아닌 黏度[니엔두(niandu)]라고 표현한다.

사실 중국인들이 粘이라는 글자를 전혀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자 개수는 너무 많은데다가 같은 의미를 가졌어도 형태가 다른 글자들, 곧 이체자(異體字)가 무척 많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신중국 수립 이후 간체자(简体字)를 확립하면서 소수의 정자(正字)만 남기고 여러 이체자들을 폐지하는 식으로 글자들을 정리하곤 했는데, 黏도 원래 1955년에 1053개의 이체자가 제거될 때 함께 없어진 한자였다. 하지만 이 중에서 15개의 이체자는 사용상의 이점이 있다 하여 1988년 복원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黏이 바로 이 15개의 부활한 글자 중 하나였다. 대신 조건이 붙었으니, 끈끈하다는 의미를 형용사로 쓸 때에는 黏을 쓰고 동사로 쓸 때에는 粘이라고 쓴다고 명확하게 구별한 것이었다. 그리고 黏은 [니엔(nian)]으로 읽지만, 粘은 한국어처럼 [잔(zhan)]으로만 읽는다는 발음규칙도 추가로 달아두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글자 사용에 구별이 생겼다:

瓶子里是一种黏液 。(병 안에 점액같은 게 있다.)
几个饺子粘在一起了。(만두 여러 개가 서로 붙어 있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