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광해'라는 영화로 인해 광해군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고 한다. 최근 한국사 교육에서도 광해군은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도덕적으로 패륜을 저지른 악한 왕으로 비록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긴 했으나, 명나라와 만주족(후금, 훗날 청나라) 사이의 실리적 외교 노선을 통해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강조되고 있다. 나 또한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고, 한국사 책을 다시 봤을 때에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이는 실제 광해군의 모습을 한 쪽으로만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편협한 재해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광해군을 이렇게 재해석한 최초의 사람은 1933년 일본의 사학자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고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공을 들인 식민사관의 집약체인 '조선사'의 편수에 참여한 사람이며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사람은 당시 일본이 만주 지방에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만주 지방이 이미 식민지로 삼은 조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네이멍구(內蒙古) 지방에 세우게 되는 또다른 괴뢰국인 몽강국과 만주국, 조선, 그리고 일본으로 연결되는 동북아 지역을 하나의 새로운 일본 중심의 역사 틀에 집어넣어 이 지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의 만주-조선 역사관에 따르면 광해군의 중립외교 노선은 조선의 주체적인 발전과 외교적 성숙에 따르는 필요에 따른 것이 아닌, 타율적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사의 독창성과 주체성을 무시해버리고 한국의 역사를 하나의 새로운 대륙사(몽고-만주-조선-일본)의 한 파트로 전락시켜 버렸다. 한국과 만주는 태고 때부터 민족·영토·경제 면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주장하면서, 은근히 광해군을 그러한 관계를 복원시킨 뛰어난 실용주의 외교의 선구자로 드높이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시각을 더욱 확고하게 만든 한국사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1959년 '광해군의 대후금정책'이라는 논문을 낸 이병도. 그는 식민사관을 가진 역사학자로 매우 유명한 사람이다.
조선과 같은 유교 국가에서 한 나라의 왕이 대비를 유폐시키고 이복동생을 쪄 죽이는 일을 과연 묵과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 당시 관념과 사회적 흐름에 비춰보았을 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폐위의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과연 당시 대북(大北) 정권이 백성을 위한 정권이었을까? 그 당시의 수탈과 정치적인 대립의 격화 ㅡ 북인 정권은 그 짧은 기간동안 엄청나게 분열했다. 대북, 소북, 골북, 육북, 청북 등등... ㅡ 의 책임은 도대체 광해군의 책임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최근 들어와서 재조명되는 광해군은 중립 외교 하나의 자주적은 측면으로만 너무 좋게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의 실정과 폭압적인 정권은 인조반정을 낳았고, 인조반정을 통해 정권을 확고하게 잡게 된 서인(西人) 정권은 두 번의 호란을 겪었음에도 성리학 명분론에 기초한 조선 후기의 밑바탕을 그려나가게 되었다 ㅡ 그리고 이것이 조선이 정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과 사회적 현실에 비추어보았을 때 광해군은 정말로 묘호를 받지 못할 만한 혼란스러운 군주이고 흉악한 왕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정조 역시 마치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연 성군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 또한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정조는 조선 후기에 왕권 강화과 유교 이념 강화에 치중한 왕인데, 마치 조선 전기의 세종과 견주어 평가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대내적, 대외적 정책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왕의 나라'가 아닌 '사대부의 나라'였던 조선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독선적이고 아집만 센 골치 아픈 왕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들이 산업의 발전과 활발한 무역으로 부를 쌓고 기술을 발전시킬 때 나라를 더욱 정체시키고 자기 자랑에만 공을 들였던 아주 완고한 보수주의자. 그가 설령 노론에 의해 독살당했다 하더라도 나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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