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전도사역을 다룬 내용이지만 사실 중반부 이상의 대부분의 지면을 차지하는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사도 바울(Paul)이다. 그는 원래 독실한 유대교도로 당시 가장 유명했고 가장 존경을 받았던 랍비인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그의 청년시절 목표는 당시 이스라엘 내에 우후죽순처럼 자라나던 예수의 잔당들, 곧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교도를 잡아들이려고 다메섹(현재의 이름은 다마스쿠스, 시리아의 수도이다.)을 향해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다. 그 일로 예수님을 영접한 그는 사울(Saul)에서 바울(Paul)로 이름을 고치고 열렬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고 초기 전도 시대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사도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는 3차례에 걸쳐 소아시아 지역(지중해 주변 팔레스타인-터키-그리스 지방)에 전도여행을 다녀왔고 최종적으로 로마에까지 자신의 전도를 잇고 거기서 최후를 맞이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전도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스 신화를 우리가 잘 알듯 당시 아테네에는 수많은 신상과 신전들이 있었을 터이다. 성경에서는 바울이 이런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함을 느꼈다고 적고 있다.

사실 바울이 가지고 온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은 당시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종교이자 철학이었을 것이다. 그리스 시민들은 이러한 철학적인 주제로 길거리나 야외 강론장 등에서 쟁론하기를 좋아했는데, 바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울은 아테네에 들어선 이후부터 온 유대인과 헬라인들과 논쟁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성경에서는 아테네 사람들은 단순히 새로운 사상을 듣고 말하는 거 외에는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성경에서 최초로 '철학'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사도행전 17장 18절을 보면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라는 말이 등장한다. 에비구레오, 스도이고. 이것은 옛날식 번역어라 지금으로서는 생소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현대식으로 외국어를 읽는다면 에피쿠로스, 스토아. 바로 당시 그리스 사회의 유명한 두 철학의 축을 말하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모두 사람의 행복, 인간으로서, 철학으로서 올바른 위치를 추구한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목적을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접근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마치 북극과 남극에서 적도를 바라보고 출발한 것과 같았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들로 절제하는 쾌락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모든 종류의 쾌락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철학자로서의 삶의 방향이라고 여겼다. 그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고요한 균형을 찬미했다. 그렇다고 에피쿠로스 학파가 문란했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그들이 육체적인 쾌락을 멀리했을 리 만무했으나 그들은 그것보다도 절제된 영혼의 향락을 더 기뻐했다. 그리고 그 영혼의 향락을 느끼기 위한 수단이자 곧 생의 중요한 것이 '철학'이라고 여겼다.

이에 대해 철학자 제논은 정반대로 생각했다. 그는 쾌락은 사람을 병들게 만드는 유혹이라고 비난했다. 오히려 그는 도덕적 의무와 자연에 내재된 '거룩함'을 중시하였고 특히 이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이성의 목소리에 따라 움직일 것을 미덕으로 삼았기에 그들에게는 '의무'가 '쾌락'보다 앞섰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주로 '정원'이라는 야외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제논과 그의 학파는 엄숙한 기둥이 늘어선 홀 내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들 학파의 이름이 '스토아'인 것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어느 것이 참이다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학파는 동시대의 철학파였고 같은 목적을 바라봤지만 접근 방식이 너무나도 판이하게 달랐다는 게 차이이다. 글쎄, 쾌락도 중요하고 의무도 중요한 것 같은데. 나는 어디를 더 무겁게 느끼고 있는 걸까? 사실 답은 생뚱맞게도 다른 데 있긴 하다.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더 무겁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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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