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려서부터 나이 든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늘 가져야 한다고 배워 왔다. 어른에게는 공손히 인사하고, 자리를 양보해 드리고, 말씀을 하실 때에는 경청하고, 원하시는 바가 있다면 그대로 이행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양식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는 어른, 더 확장하면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공경해야 하는가? 다만, 여기서 다루는 어른, 혹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범주 내에는 우리가 마땅이 공경 그 이상의 태도로 대해야 할 사람들 ㅡ 이를테면, 부모님 ㅡ 은 제외한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우선 이러한 가르침을 그대로 수용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에서 연연한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하자면, '왜?'라는 질문을 해서 이유를 구하지 않아도 한국인들은 응당 그래야 한다는 답변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부터 내려온 효(孝) 사상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가끔은 충(忠)보다도 지나친 효로 인해 문제가 된 적이 있을 정도로 우리 나라 사람들은 효를 중시했다. 지금 내가 나이 든 사람을 “왜 우리는 누군가를 공경하는 걸까, 그 근거를 찾아보자.” 라고 제안하는 것인데, 어쩌면 이 글을 처음 봤을 때에는 나를 오히려 이상하게 쳐다볼 법도 하다. 한두살 차이로도 엄격한 선후배 관계를 내세우는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 자체가 하나의 직위이자 권위이며 이는 거의 무비판적으로 한국인의 정서에 수용된 것인데 무슨 근거를 찾나 싶어 하면서.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반드시 있다고 생각했다. 본성이 타락한 인간이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응당 타인을 공경해야 한다고 생각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으로서는 자신이 이득을 보게 될 경우가 아닐 바에야 절대로 어떤 이유도 없이 나를 낮추고 남을 받들어 모실 리가 없다. 성경에서도 십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 말은 타락 이후 인간의 본성이 그렇지 못한 수준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좀더 생각해보니 '나이 든 사람일수록 인생의 경험이 많고 그간 익힌 것도 많으니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을 기대할 수 있고, 그러한 기대의 표현이 바로 공경이다'라는 근거를 찾기에 이르렀다. 어른의 말씀 들어서 하나도 틀린 말 없다고 다들 입을 모아 얘기하듯 어른들이 나이 어린 사람보다 더 살아온 인생의 나날들, 그 자체가 귀한 자산이고 시간을 통해서밖에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지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나이 많은 사람에 대한 공경은 합리화된다. 즉,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으니 나보다 우월한 상태에 있는 존재이므로 공경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다. 좀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보편적인 인간의 속성에서 바라볼 때, 사람들은 자신보다 나은 것이 없으면 절대로 남을 공경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멸하고 내리누르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자연 상태의 인간이라면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조차도 경쟁으로 취하려는 죄된 속성이 있다.

진짜 그런지 살펴볼까?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를 치는 어른을 눈 앞에서 목격했다고 하자. 아니면 성적은 바닥을 기는데 담배를 입에 달고 사는 고등학교 선배가 내 옆을 지나간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공경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은 너무나도 쉽게 무시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사람들은 나보다 나이만 많았지 공경할 만한 점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공경 받을 만한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한다. 대개 눈살을 찌푸리고 혹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험담하면서 ‘나이가 먹었다고 다는 아닌 거다’라고 쉽게 얘기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런 저급한 행동들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아마 사람들은 그 어른과 선배를 다른 나이 많은 사람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공경했을 것이다.

또 공경의 정도가 같은 어른이라 할 지라도 다르다. 많은 것을 이루었거나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할아버지들에 대한 공경의 수준과 노인정에서 한가로이 장기를 두시는 이웃집 할아버지에 대한 공경의 수준은 무척이나 다르다. 그나마 이웃집 할아버지에 대한 공경의 수준은 어쩌다가 우체국에 소포를 부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할머니에 대한 공경의 수준보다는 훨씬 높은 편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행동은 결코 사람들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당연하게 공경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공손하게 대하는 것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이 과연 나보다 우월한 사람인지 열등한 사람인지 알 길은 없으나 나이가 많으니까 일단 그것만으로 우월한 존재라고 가정하고 공경으로 대하는 것이다. 만일 지속적인 관찰을 통해 진짜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인가를 판단한 뒤 실제로 그러하다면 그것은 ‘공경’으로 남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곧바로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에 대한 ‘경멸’로 태도가 바뀌는 것이다.

또한, 유교 사상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슬픈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 본성은 철저하게 계산 중심으로 흘러가는 속성이 있으므로 유교적 가르침과 어긋난다. 단지 공경은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를 통해 자신이 얻게 될 영향이나 이득을 기대함에서 비롯된 행동일 뿐이다. 많은 이득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 혹은 나의 이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공경심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높다. 인간이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감정을 가지고 보편적인 대우를 해줄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럼에도 ‘공경’이라는 인간의 행동은 이기적이고 타락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인간적인 행동 중 최고급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교육이 전제되지 않은 자연 상태의 인간들에게는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로부터 얻을 것을 기대하기 보다는 그러한 우월한 존재를 어떻게 하면 깎아내릴까, 제거할까 하는 고민만을 안고 지낼 것이다. 그러니까 공경을 위시한 ‘효 사상’은 자연 상태의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벌어지게 될 온갖 무질서와 혼란, 인간 본성의 타락과 폭악함을 단속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교육인 셈이다. 비록 그런 행동의 동기는 사뭇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행동의 결과는 바람직하고 선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에 대한 공경, 더 나아가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한 공경은 이 사회에 존재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인간의 ‘이기적이지만 고상한 행동’을 적극 지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의 상황들을 지켜보면 과연 그나마 인간의 이기적인 행태 중에서도 고급에 속하는 ‘공경’마저 상실될까 매우 우려된다. 옛날에 이러한 공경 사상이 잘 받아들여진 것은, 우선 당시의 지식과 경험은 진실로 나이에 거의 비례하였기 때문이고, 비록 영리한 소년들이 당대의 어른들의 수준을 뛰어넘더라도 과거 우리 나라의 교육은 유교 사상의 정수였고, 상당히 앞선 수준의 동양 윤리학, 도덕, 철학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을 공경하는 자세는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는 어떠한가? 지식과 경험이 결코 나이에 비례하지 않다.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과 빠른 속도의 정보 처리 능력을 가진 컴퓨터 실력을 가진 젊은 세대의 수준은 어른 세대의 수준을 훨씬 압도하고 있다. 게다가 이제는 더 이상 공경이 사회에서 강조하는 마땅한 덕목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에서 얻게 될 ‘이득’에 더욱 집중하게 되면서 공경으로 ‘타인을 받들어 모시기’보다는 비인간적이고 천박하게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어째 현대 문명이 진일보할수록 인류 사회의 수준은 자연 상태의 저급한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 뿐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