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쉬운 번역, 가까워진 성경]
Date 2009.03.16
이 땅 위에 성경을 번역한 언어는 엄청나게 많다. 최초로 쓰인 헤브라이어 성경이 그리스인들에 의해 그리스어로 번역되고 이렇게 쓰인 그리스 번역 성경은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라틴어로 번역이 된다. 가톨릭에서는 라틴어로 된 성경만을 중시했으나 종교 개혁 이후 독일어로 최초로 성경이 번역된 이래로 전 세계의 많은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성경이 최초로 한글로 번역되어 들어온 것이 아마 19세기 말이었을 것이다. 당시 한글 번역 작업을 주도한 사람들은 주로 평안도 사람들이라고 하며, 한학자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한자어가 풍부하게 들어간 그런 문체의 번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주시경 선생 등에 의해 한글 맞춤법이 일제 강점기 시대라는 암울한 역사 속에서 제정되었고, 성경 번역도 이에 발맞추어 새롭게 진행되어왔다. 그 결과 1961년, 각고의 번역 작업 노력 끝에 개신교 대부분의 교회가 공인하는 번역판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를 '개역한글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번역'의 특성상 시대가 지나면 자연스레 '번역한 것을 번역'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즉, 문체나 어휘의 변화로 인해 점차 최초에 번역되었던 것이 어색해지고 고루해 보이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영국에서 제임스 1세가 영문학자들을 통해 번역작업을 수행하여 만들었다는 흠정역(KJV)을 대신하여 20세기에 '고어체, 문어체의 문제점 해결'을 위해 새롭게 번역되어 새 국제판(NIV)이 나오게 되었고 이 번역판이 전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국역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개역한글판'이 나온 후부터 번역의 개정을 위한 다양한 시도가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있었고 종교를 초월해서 '공동번역' 작업을 시도하여 그 결과를 낸 때도 있었다 ㅡ 물론 개신교 측에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여 공동번역 성경은 그 빛이 바래긴 했지만 말이다. 특히 20세기 말에 이르면서 문체와 어휘가 20세기 중반과 사뭇 달라지게 되면서 현대인의 국어 감각에 맞는 번역 성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최근에 내가 갖게 된 성경이 바로 이러한 논의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아가페 성경사의 '쉬운 성경(Easy Bible)'이다. 예전에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이 있었지만 수련회 장소에 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그 좋은 성경을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새로 다른 쉬운 번역 성경을 살까 하다가 최근에 찾아낸 쉬운 성경. 물론 집에는 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 성경이 몇 권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교회용'이라고 할 수 있고, 사실상 '독서와 묵상'을 위한 것으로는 쉽게 번역된 성경을 애용하는 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쉽게 쓰여있으니까. 여기서 '쉽게'라는 말을 곡해하면 안 된다. '이해하기 쉽게' 쓰인 것이지 결코 '단순하게' 쓰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까지 '체휼'이나 '미쁘시다'라는, 현대 국어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단어로 쓰인 성경을 봐야 한단 말인가? 또한 '애굽'이나 '바사', '앗수르'와 같은 현대 감각에 맞지 않는 이러한 국명과 '다메섹', '그레데'와 같이 어색한 지명을 계속 마주하는 건 정말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은 채 머리는 상투를 튼 그런 어정쩡한 모습과도 같다.
'가독성'의 중요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실제로 내 경우, '현대인의 성경'을 손에 들기 시작했을 때에는 성경을 정말 순식간에 많이 읽게 되었다. 가끔 개역한글판을 읽다 보면 내 국어 실력이 의심될 정도로 '이게 대체 무슨 말이라는 건가?'하는 의문을 수도 없이 내뱉어야 했는데, 쉬운 성경을 읽으면서는 논리적 흐름이나 표현 등이 매우 자연스럽게 다가오면서 이해가 쉽게 되었다. 벌써 문체와 단어의 선택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딱딱한 고문이 아닌 잘 쓰여진 훌륭한 글'을 읽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성경을 금세 술술 읽어나가게 된다.
예를 들면 사무엘상 20장 3절.
[개역한글판]
다윗이 또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네게 은혜받은 줄을 네 부친이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를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
[쉬운 성경]
다윗이 다시 말했습니다. "자네 아버지는 내가 자네 친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네. 자네 아버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계실 걸세. '요나단에게는 이 일을 알리지 말아야지. 만약 요나단이 이 일을 알면 다윗에게 말해 버릴 거야.' 그러니 여호와와 자네에게 맹세하지만 나는 곧 죽을 걸세."
또 예를 들면 시편 2편 1절
[개역한글판]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쉬운 성경]
어째서 나라들이 남몰래 나쁜 일을 꾸미며, 민족들이 왜 그토록 헛된 일들을 계획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이러니 내가 새롭고 현대적 감각에 맞는 번역을 원하는 것 아니겠는가.
혹자는 현대인의 감각에 맞춘 이러한 쉬운 번역이 원래 성경의 의미를 해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영어 성경의 경우, 흠정역(KJV) 추종자들의 공격이 매우 심각한데, 그들은 흠정역이야말로 무오, 무결점의 번역이며 성경의 본의를 제대로 담고 있는 유일한 번역본이라고 주장한다. 새로 번역되는 다양한 번역은 의미를 왜곡하고 잘못 해석하여 기독교의 바른 가르침을 훼손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한국에서도 동일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과 같이 '고전적인 번역'을 옹호하며 이들만이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주장하며, 일부는 KJV를 숭앙하는 외국인들처럼 아예 KJV를 국역한 성서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최근 쉬운 번역들을 출간한 곳들은 대개 출판사, 그러니까 '사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전적 번역 옹호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역 성경들이 성경의 참 뜻을 해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고급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가 통속 라틴어로 생활하는 ㅡ 사실 그나마도 글을 잘 모르는 ㅡ 민중들에게 전혀 은혜를 가져다주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면, 하나님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절실한 것은 '자신이 까막눈임을 확인시켜 주는 라틴어 성경'이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루터가 종교 개혁 때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았는가. 아무리 최초의 번역이 완벽했던들 독자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책이라면 외면당하거나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 일쑤인 것이다.
물론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한국어를 다 유창하게 할 줄 알고, 한글을 읽을 줄 알기 때문에 개역한글판의 탄생으로 인해 '한국어로 번역'해야 하는 일은 사실상 끝난 셈이다. 그러나, 문화가 바뀌고 세태가 바뀌는 요즘, 수십 년 전의 번역이 지금도 항상 유효하다고 말하기는 다소 어폐가 있지 않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가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도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고 하지만, 요즘 인기 가요 1위 자리가 이미자의 몫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읽어봐야 고리타분한 맛만 봄날 대청소 때풀풀 날리는 먼지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런 어려운 번역이 아니라 직독직해가 가능해서 접근성이 탁월한 그런 쉬운 성경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도 문장의 의미 하나를 파악하지 못해서 갈팡질팡하는 자녀들을 '애끓는 마음으로' 목도하기 보다는 청산유수같이 당신의 말씀을 읽어가며 마음으로 그 말씀을 곱씹는 자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짓기를 원하실 것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 이로다.
상대적 차원(관념,개념,문화,도덕=세상풍조=땅) 의 지식은 절대적 차원(경계,구렁,위 가없는=하늘)을 뛰어넘지 못한다.
2천년전 유대청년 예수는 바리새인에게 말한다, 형상에 묶인자여,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느니라.
이천년전 유대청년과 관계를 맺고 거기에 머무르고 있는가?
창세전부터 계신 무위의 예수와 관계를 맺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