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쓴 내용이다. 시험 기간에 마음이 울적(?)하여 위키피디아(http://www.wikipedia.org/)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지식욕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Sennacherib(센나케리브, 성경에서는 산헤립)' 내용을 보게 되었다. 성경에서는 유다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포위한 산헤립이 유다의 하나님을 조롱하고 훼방해서 이를 참지 못한 히스기야가 눈물을 흘리며 옷을 찢고 기도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자 천사가 왕을 안심시켰고, 그날 밤 앗시리아의 185,000명의 군사가 모두 하룻밤 사이에 다 송장 되어버린 그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 앗시리아는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참 하나님이 놀라우신 분이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사실 마치 여리고성이 무너진 사건을 보고 우리가 으레 느끼듯 '하나님 참 대단하시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어났을까 고것 참...'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 185,000명의 군사가 밤 사이에 모두 죽게 된 이 사건이 정말 신기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위키피디아에서 건진 Taylor Prism이라는 유물을 알고나서 이젠 의심의 잔털조차 갖지 않게 되었다. 이른바 '산헤립의 육각기둥 프리즘'. 지금은 폐허가 된 앗시리아의 옛 수도인 Nineveh(니느웨)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이 벽돌 프리즘에는 아주 산헤립이 자기 자신을 찬양하는 글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거기에 이런 글이 적혀있어요...
나의 멍에에 복종하지 않았던 유다의 히스기야로 말할 것 같으면, 그의 왕국에 있던 46개의 강한, 성벽으로 둘러쌓인 도시들과 수많은 작은 마을들은 공성망치로 뭉개어졌고, 포위 공격을 받았고, 화포로 광산과 터널을 습격받았으며 나는 그들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200,150명에 달하는 크고 작은 남녀와 셀 수 없는 말, 노새, 당나귀, 낙타, 소와 양을 사로잡았고 나는 이들을 전리품으로 삼았다. 이렇듯 내가 히스기야를 유다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꽁꽁 묶어두었으니 사실상 그는 새장 속의 새나 다름 없었다. 나는 성문 쪽에 토루를 급히 만들었고 결국 히스기야를 아주 비참한 신세로 전락시켰다.
나는 유다왕국의 도시를 빼앗아 애쉬닷의 왕인 미틴티, 에크론의 왕인 파디, 그리고 가자의 왕인 실리벨에게 하사했다. 말하자면 유다 왕국의 영토를 줄이고 앞서 말한 종족들에게 땅을 더해주었으며 나의 위엄에 대한 선물인 조공과 땅을 따로 떼어 놓았던 것이다.
히스기야는 나의 이 압도하는 위엄과 영광의 놀라운 찬란함과 아랍인들, 그리고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데려온 용병들로 인해 용기를 잃어 절망하였다. 30달란트의 금과 800달란트의 은, 보석, 안티몬(화학 원소 이름), 귀금속, 홍옥수, 상아로 아로새긴 침상과 의자, 코끼리 가죽과 엄니, 흑단, 회양목, 그리고 온갖 종류의 보물들과 그의 딸과 후궁, 남녀 음악가를 나보다 먼저 나의 위대한 도시 니느웨로 보냈다. 공물을 바치고 노역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는 그의 사자를 급히 파송했다.
내용만 보면 아주 자기 칭찬 일색이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의문이 생긴다. 분명 앗시리아 군대는 유다 왕국을 굴복시켰음에도 유다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엔 입성하지도 못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산헤립이 원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을 텐데, 프리즘에 적힌 글을 보면 아주 의기양양하지만 성경에서 나와있듯이, 또 역사가들이 지적하듯 예루살렘은 그대로 유다 왕국의 수도로 남아있고 탈취되지 않았다.
수많은 군대를 거느린 산헤립 왕이 46개의 도시를 점령하고 대체 여기까지 와서 포위 다 한 뒤에 입성도 못한 게 말이나 되는가ㅡ? 게다가 역사가들은 이후의 앗시리아의 정복활동 루트가 아주 급격히 바뀐 것을 지적한다. 산헤립이 말년에 이르러 갑자기 길리기아 이상으로 더 서쪽으로 진격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시리아 남부와 이집트 정복 계획도 멈추고. 이제 성경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ㅡ.
요세푸스라는 유명한 역사학자가 칼데아의 역사학자 베로수스의 글을 인용했는데
산헤립이 이집트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장군 랍사게 휘하의 군사들이 여호와가 보낸 유해한 디스템퍼(전염성 급성 염증)로 인해 매우 위험한 상태에 놓였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185,000명의 장졸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왜 산헤립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까? 이 때 산헤립은 여러 곳에서 전쟁을 동시다발적으로 치른 모양이다. 위키피디아에서는 유다 왕국이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지원을 받아 앗시리아에 대항했다고 하긴 하는데, 아무튼 세 나라 모두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는다. 랍사게를 비롯한 장군들로 하여금 유다왕국의 예루살렘을 치게끔 했고, 자신은 직접 이집트로 내려가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의 기록한 이집트의 전설에 따르면
아라비아와 앗시리아의 왕인 산헤립이 많은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군했을 때 당시 전사들은 파라오였던 세티를 원조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매우 상심하고 화가 난 파라오는 성지 안으로 들어가 신상 앞에서 절박하게 된 자신의 운명에 대해 통곡하였다.
한참 울다가 잠에 든 파라오는 신이 나타나 자기 옆에 서서 용기를 북돋게 하고 대담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을 명하는 것을 보았다. 신은 파라오를 도울 군대를 보내주기 때문에 파라오를 다치게 하지 못할 아라비아의 적들을 대면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 꿈에 의지하게 된 파라오 세티는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이집트인을 모았는데 이때 모인 사람들은 전사가 아니라 무역상, 공예가, 시장 상인들이었다. 그는 이집트의 입구와도 같은 펠루지움으로 진군하여 진영을 세웠다.
이집트와 앗시리아, 두 나라의 군대가 서로 대치한 상황이었다. 그날 밤 수많은 들쥐들이 등장하여 앗시리아군의 화살통과 활시위, 방패끈까지도 모두 갉아먹어버렸다. 다음날 전쟁이 개시되었는데 무기를 모두 못 쓰게 되어버린 수많은 앗시리아 군사들이 이집트 군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산헤립더러 하신 말씀이 '저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다.
실제로 이집트에서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대재앙을 겪어 군사력을 대부분 잃은 산헤립이 패전 이후 이집트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아마 '랍사게 장군이 아마 예루살렘을 정복했거나 포위가 성공적으로 되어서 예루살렘이 우리 손에 떨어지기 직전에 있겠지' 싶었을텐데. 그런데 이게 왠걸, 예루살렘에서도 마찬가지로 대재앙으로 인해 185,000명이라는 수많은 군사가 하룻밤 사이에 다 죽어버렸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헤립은 예루살렘에 화살 하나 날려보지도, 발자국을 성안으로 찍어보지도 못한채 니느웨로 철군해야 했다. 하지만 영광스런 앗시리아의 역사에 이런 경이적인 패전을 기록해서야 어디 멋이 나겠는가. Taylor Prism에 쓰여있던 기록이 왜 그렇게도 허풍처럼 보이는 지 그 이유가 이제 드러난다. 유다 왕국이 바쳤던 조공에 대한 이야기를 부각시키고는 도시를 점령했다는 이야기만 아주 당당하게 써 놓았고 포위가 아주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정작 그 결과 유다 왕국을 복속시켰다는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다. 즉, 경이적인 패전을 감추기 위해 단순히 '포위하고 조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던 것이지 그 결말은 교묘히 밝히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유다가 앗시리아의 침공 전에 기둥에 입힌 금까지도 박박 긁어서 바칠만큼 조공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런 돈보다 세계 정복을 꿈꿨던 앗시리아의 침공을 물리치고 거뜬히 살아남았던 것은 사실이다.
산헤립의 최후는 성경이 말하는대로입니다.
성경에서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그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저를 칼로 쳐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조각에 쓰인 말에 따르면
테벳 월 20일에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이 그의 아들의 모반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아들 엣살하돈이 앗시리아의 왕좌에 앉았다.
이렇게 역사와 성경이 일치하는 것을 보게 되면 기분이 참 묘~해진다. 아무튼 1년 전에 찾았던 내용이지만 지금 보아도 흥미진진한 성경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