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정말 오랜만에 욕조에 서서 때를 밀었다. '오랜만에'라는 것은 내가 때 미는 행동을 무려 반 년 만에 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정말'이라는 부사어를 붙인 것은 일생에 이렇게 오랜 기간 공백기(?)를 가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서서'라는 것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때를 밀어야 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려다 실패해버린 단어임을 보여준다.

내가 왜 하필이면 오늘을 택했을까? 선택의 순간은 성령(聖靈)이 강림(降臨)하듯 순식간이었다. 지난 수련회 때 뜨거운 창녕에서 3박4일간 지내다보니 양 어깨 위부터 피부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올림픽 경기를 보며 두 눈을 모니터에 고정해 놓고 몇십 분 있노라니 심심해진 두 손톱이 자꾸 어깨를 침범한 게 결국 전황(戰況)을 확대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래선 안 되겠다, 결국 한국산 이태리 타올을 손에 착용한 채 욕실로 담대히(?) 나아갔다. 내 오늘 기필코 내 피부 위에 부유(浮遊)하고 있는 너희들을 멸절(滅絶)시키리-!

때를 민다는 것은 사실 지구인들의 범속(凡俗)한 풍습이 아니라는 게 알려져 있다. 포경수술(包莖手術)이 비슷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듯 ㅡ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한국인처럼 열심히 피부를 대패 밀듯 박박 긁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고 한다. 반대론자들은 우리 몸의 일부인 이 피부껍질 조각들(물론 '가야할 때를 알고 있는' 조직인지라 버려도 미련이 없다만)을 구태여 온 몸 시뻘겋게 만들며 밀어버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이러한 행동은 건강한 피부에 자칫 해가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한국인들의 머리에 각인(刻印)된 공중 목욕탕의 풍경(風景)은 곧 서로 등 밀어 주는 친구들, 몸집이 풍만한 때밀이 아저씨, 아줌마, 그리고 단조롭고 어두침침한 목욕탕 내부에서 빛을 받아 찬란히 제 색을 뽐내고 있는 때밀이 수건들인 것을 어쩌랴. 이것이 한국인의 고유한 풍습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정체성을 확실히 하라고 한다면 나는 때밀이 찬성론자이고, 그래서 '내일 우주가 멸망해도 때를 밀겠다'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래서 때 미는 것을 미화(美化)하자면 ㅡ 때를 미는 시간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진실로 순수(純粹)한 시간이다. 왜냐하면 때를 미는 시간에는 오로지 때를 미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내 짧은 인생동안 때를 밀어봐야 백 번도 채 안 밀었겠지만 때를 미는 동안 내 생각의 경주가 몸과 때 그 울타리 이상을 넘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누가 때를 밀면서 자유(自由)를 논하고, 누가 때를 밀면서 고유가(高油價)에 탄식하며, 누가 때를 밀면서 독도문제를 상기하겠는가? 적어도 나는 때를 미는 시간엔 오로지 순수하게 때를 밀었다. 말 그대로 '때를 미는 시간'이 곧 '때 미는 때'이니 시간 마저도 때에 용해시켜 시간이 무한히 정지해 버린 그 욕실 공간 안에서 나는 순수히 때에 대한 탐구활동만을 줄기차게 벌여왔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기도하는 것도 때를 미는 것과 비슷한 속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기도하는 것은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하고도 거룩한, 그래서 순수한 행동이다. 기도가 어려운 것은 외형적으로 폼만 잡으면 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을 신에게 집중하고 머리 속의 잡념(雜念)들을 모두 제(除)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도 제목이 자유가 아닌 이상) 누가 기도하면서 자유를 논하고, (기도 제목이 고유가가 아닌 이상) 누가 기도하면서 고유가를 탄식하며, (기도 제목이 독도가 아닌 이상) 누가 기도하면서 독도문제를 상기하겠는가? 인간의 힘으로는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기도하는 게 쉽지 않으며 오직 성령이 주는 마음대로 기도할 뿐이다. 그러고 보면, 때를 밀며 '나'를 잊어버리고 몸에서 수북히 떨어지는 때에만 집중하며 헌신(?)하는 것은 '나'를 잊어버리고 오직 성령을 통해 신과 교제하고 대화하는 수준에 이르는 기도에 대한 일종의 훈련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아무튼 때밀이 타올 만세!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