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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섭씨 30도를 넘고, 겨울엔 섭씨 영하 10도까지 내려가는 대한민국의 극한 날씨.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 계절마다 다른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고 한다. 물론 한복의 특성상 여러 옷을 겹쳐 입기에 겨울의 경우 무조건 두터운 옷감으로 여러 겹 껴입으면 그만이긴 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솜으로 누빈 옷을 중간에 껴 주면 금상첨화! 그런데 여름엔 이게 보통 난감한 것이 아니다. 집안에서도 의관을 정제해야 한다는 엄격한 유교 규칙을 따르자면 바지 저고리에 창옷과 포까지 다 입어야 하는데, 에어컨과 선풍기도 없이 그렇게 집안에 앉아 있다가는 더워 죽는 것은 시간문제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여름에 적극적으로 사용한 옷감은 삼베나 모시라고 했다. 삼베와 모시는 각각 대마와 모시풀의 줄기에서 얻는 인피섬유(靭皮纖維)로서, 화학적으로는 주성분이 셀룰로스(cellulose)인 섬유이다. 이들 섬유로 직조하여 얻은 천으로 옷을 지어 입으면 촉감이 까실까실하고 피부에 잘 달라붙지 않아 땀이 많이 나는 여름에 옷을 입어도 쾌적하다. 그리고 씨실과 날실 사이의 구멍을 통해 바람이 솔솔 잘 통해 더운 여름이더라도 가벼운 모시 옷이면 바람 좀 불 때에 오싹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시원하다. 그런데 모시의 시원함과 까실까실한 감촉을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구김이 덜 가게 하려면 모시 옷 착용 전에 풀을 먹이는 과정이 필수라고 한다. 과거에는 찹쌀을 물에 넣고 끓여 점성이 있는 흰 풀을 만든 뒤 이를 옷감에 먹였다고 하며, 풀물에 담가 말린 모시 옷에 물을 묻혀가며 다림질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모시옷이 빳빳해지는데, 씨실과 날실이 형성하는 네모난 구멍이 잘 유지될 뿐더러 잘 구겨지지도 않아 바람이 잘 통하는 여름옷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화학이 숨어있다. 우리가 식품으로 섭취하는 곡류의 주성분은 녹말(starch)인데, 사실 셀룰로스과 녹말은 모두 포도당(glucose)를 단량체로 하는 바이오고분자(biopolymer)이다. 단, 구조상에 큰 차이가 있는데 셀룰로스는 포도당 분자들이 β-1,4-글리코사이드 결합을 통해 선형으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인데 반해, 녹말은 포도당 분자들이 α-1,4-글리코사이드 결합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셀룰로스 고분자는 길게 이어진 선형 고분자로서 섬유를 구성할 수 있는 형태이지만, 녹말 고분자는 결합의 특성상 나선구조를 형성하게 되어 섬유를 형성할 수 없으며, 나선 모양으로 돌돌 말린 녹말 형태를 아밀로스(amylose)라고 한다. 한편, 이 아밀로스 구조 중간중간에 α-1,6-글리코사이드 결합이 있으면 포도당 화학구조에서 삐죽 튀어나온 6번 탄소에 붙은 수산화기(-OH)로부터 새로운 아밀로스 구조가 가지를 치며 뻗어나갈 수 있는데, 이런 난잡한(?) 형태의 구조를 가진 아밀로스를 아밀로펙틴(amylopectin)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녹말은 아밀로스와 아밀로펙틴을 아우르는 일반 명칭이라고 볼 수 있는데, 통상적으로 녹말 구성 성분 중 아밀로펙틴의 양이 아밀로스보다 많으며, 찹쌀과 같이 차진 곡류의 경우 아밀로펙틴의 비율이 훨씬 높다고 한다.
돌돌 말린 형태로서 외부와의 상호작용이 최소화가 되는 아밀로스에 비해 아밀로펙틴은 외부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굉장히 많은 수의 수산화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밀로펙틴은 높은 친수성(親水性, hydrophilicity)을 보여 물에 잘 녹는다. 물에 녹는다는 것은 물 분자들이 충분히 아밀로펙틴 분자를 둘러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찹쌀풀이 물에 녹은 상태에서는 아밀로펙틴 고분자들이 물 속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면서 물에 흩어져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모시 옷에 묻은 풀물이 마르게 되면 상황이 급변한다. 아밀로펙틴을 녹이는데 쓰인 물 분자가 증발되어 사라지면, 아밀로펙틴 사슬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 준 가소제(plasticizer)가 사라지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 결과 아밀로펙틴 고분자의 유리전이온도(glass transition temperature)는 상온보다 급격하게 올라가게 되어 아밀로펙틴 고분자 사슬은 모두 딱딱해진다.
이때 아밀로펙틴 고분자는 친수성인데다가 모시 옷의 주성분인 셀룰로스와 동일한 단량체인 포도당으로 구성된 분자이므로 수소결합(hydrogen bond)에 의해 섬유 고분자 표면에 잘 흡착될 수 있다. 그리고 아밀로펙틴은 다분지고분자(hyperbranched polymer)이기 때문에 서로 엉겨붙은 상태에서 딱딱해지면 분자사슬들끼리 강력한 판데르발스(Van der Waals) 상호작용 힘으로 묶이게 되어 웬만해서는 아밀로펙틴 고분자들을 외력으로 떼어내기 어렵다. 우리의 경험을 빌려 말하자면, 면으로 된 옷 위에 묻어 말라붙은 밥풀을 떼어내기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ㅡ 우리는 보통 밥풀만 온전히 떼어내는 게 아니라 밥풀과 강력하게 결합된 섬유을 동시에 찢어냄으로서 밥풀을 제거하곤 하니까 말이다. 이제 이런 상태에서 뜨거운 다리미가 지나가게 되면 모시 옷을 구성하는 씨실과 날실들은 풀에 의해 단단히 지탱된 채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고착된다. 풀먹임 결과 빳빳한 모시 옷을 얻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상들이 모시 옷에 먹인 찹쌀풀에는 두 가지 화학적 조건이 필요하다: 1) 옷에 먹일 풀은 친수성이면서도 유리전이온도가 높은 고분자여야 한다. 2) 용매가 증발하고 나면 친수성 고분자들끼리 강한 판데르발스 힘을 발휘하여 높은 접착성을 보여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요즘에는 곡류에서 얻은 아밀로펙틴 대신 다양한 친수성 고분자를 쓰게 되었고, 또한 풀먹임 과정을 간편하게 하고 직물 전체에 고르게 할 수 있도록 다이메틸이써(dimethylether)와 같은 유기용매를 이용하여 에어로졸(aerosol) 형태로 분사할 수 있는 스프레이가 개발되었다.
당장 내가 오늘 사서 쓰기 시작한 말표 스프레이 풀은 폴리바이닐피롤리돈(polyvinylpyrrolidone, PVP)을 쓴다. 친수성이면서도 유리전이온도가 높은 PVP는 꽤 다양한 용도로 각종 산업에서 사용하는 고분자이다. 미국에서 많이 쓰이는 스프레이 풀 중의 하나인 Niagara 스프레이 풀은 소듐 폴리메타크릴레이트(sodium polymethacrylate)를 주 원료로 사용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 고분자를 사용하면 일관된 품질을 가진 풀을 값싸게 대량 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에 더해, 오랫동안 보관할 때 옷감에 잔류한 녹말에서 피어나는 곰팡이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세제를 이용하여 옷을 세탁할 때 옷에 먹인 풀이 비교적 쉽게 제거될 수 있다는 점도 상기할 만한 장점이다.
이처럼 옷에 풀을 먹이는 것, 그리고 잘 다려서 옷을 관리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셀룰로스 기반 섬유로 옷을 지어 입은 모든 이들의 소망이었다. 그 소망이 이렇게 편리한 과정을 통해 실현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기술의 발전에 따른 혜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