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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터넷을 가장 뜨겁게 달구었던 사건은 바로 인기 아이돌 그룹 AOA의 멤버 설현과 지민이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사진을 보고 이름을 알아맞히지 못한 채 엉뚱한 일본인 이름들을 되뇌었던 것이 전파를 탄 사건이었다. 방송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이들의 무지함을 비난했는데, 반응중에는 '원래 아이돌이라는 애들이 뭇기해서 아는 것이 없겠거니...'와 같은 조롱에서부터 '이것은 참된 역사인식이 부재한 신세대의 문제'와 같은 거창한 깊은 탄식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신곡 발매일을 앞두고 대형 악재를 만났다고 판단한 AOA 측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로 사과의 글을 올렸다.
나야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또 관련 인물들의 사진 자료들을 몇 번 두루 본 적이 있으니 안중근의 사진 역시 익숙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서 1909년 안중근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던 사건은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뒤흔드는 이슈 중 하나였다. 물론 역사 시간에도 이 드라마틱한 사건을 그냥 지나가지는 않으며 대중들도 안중근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은 대충이라도 ― 최소한 일본놈 죽인 의사 정도라도 ― 안다. 다만, 대한 제국 시기 이후부터 시작된 상류층 남성들의 콧수염 스타일은 드라마나 연극 등에서 일제 강점기 시절 인텔리들이라든지 왜놈의 앞잡이로 그려지는 인물들의 전형적인 스타일로 그려지기 때문에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혹은 역사 자료에 그리 친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안중근의 사진을 보고 과연 이 사람이 독립운동가 안중근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만도 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흔히 성토하듯 이 문제를 역사 인식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문제는 다소 (과장되게) 심각해진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요즘 학교에서의 한국사 교육, 그리고 가정과 개인 생활에서의 한국사 공부는 이전에 비해 상당히 축소되었다. 한국사가 필수 과목도 아닐진대 역사와 관련된 자료와 이야깃거리를 탐독하는 것보다는 영어와 수학 공부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그러니 요즘 아이들에게 예전의 아이들과 동일한 수준의 역사 상식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다시 말하면, 요즘 아이들에게는 안중근이니 안창호니 이 사람들이 천구백몇십몇년에 무슨 일을 했다라는 한 줄 정도의 내용을 암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안중근이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는 말을 했다든지, 혹은 안창호가 돌배나무에서는 돌배가, 참배나무에서는 참배가 열린다는 말을 했다든지 하는 것은 수능과 내신에 전혀 도움이 되는 사항이 아니므로 바쁜 공부 시간을 쪼개에서 해당 내용을 탐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물며 이 사람들의 생김새는 또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들의 행적과 중요성이 간단히 정리된 한 줄 노트에 간편하게 섭취되는 교과서 속 역사 이야기에서 이 사람들의 콧수염 스타일이 어떻네, 머리 스타일은 어떻네, 복장은 어떻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논의가 이쯤 진행되면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서 그런 건 상식적으로 알아야한다고 핀잔을 준다. 즉, 교과서에서, 혹은 시험에서만 나올 이야기들만 줄줄 외는 것은 참다운 역사 공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들이 그런 식으로 공부해왔기 때문에 역사 인식이 결여된 지금의 이 참담한 결과를 목도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탄하며 앉아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의문이 있다. 정말 안중근의 얼굴을 아는 것이 역사 상식 혹은 역사 인식과 관련된 심대한 문제일까?
서울대 법대 쪽을 지나가다보면 이준 열사의 동상이 있다. 이준 열사는 고종 황제의 특명으로 헤이그(Hague)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 제국의 주권 강탈을 규탄하고 대한 제국 문제를 열강들에게 호소하려고 했던 특사 셋 중 하나였다. 안타깝게도 특사들은 일본 제국의 방해와 열강들의 방관 속에서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였고, 이에 분개했던 이준 열사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어느날 교정을 걷다가 이 분의 동상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서울대학교 학생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준 열사의 삶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까? 나는 자문한 질문에 '당연하지'라고 자답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준 열사를 잘 모를 서울대학생들이 멍청하고 무지한 것인가? 사람에 따라 두 가지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우수한 학생이 이준 열사도 몰라? 이거 문제네 문제." 혹은 "이준 열사는 솔직히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나 알 수 있는 사람이지 보통 학생들은 원래 다 몰라." 나는 바로 이 점을 잘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AOA 멤버를 비난하는 논리의 기저에는 표면상 다음과 같은 인식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
1. 그들은 안중근이 누군지 모른다.
2. 그들은 무지하다.
3. 그들은 역사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
4. 따라서 그들은 비난받을 만 하다.
나는 1-2번의 고리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무지(無知)라는 단어 뜻 자체가 모른다는 것이니까. 사진을 보고 알아맞히지 못한 것은 무지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2-3번의 연결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역사의 단편적 사실들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역사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고 판명할 수는 없다. 이렇게 치면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 한국사 검정시험을 보게 하고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사람들이니 앞으로 역사 관련된 이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대역죄인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게 말이나 될법한 소리인가? 띄어쓰기나 맞춤법에서 실수가 있었다고 한국어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지식 체계와 인식의 공간은 다양한 정보들로 꽉 찬 구체(球體)가 아니라 오히려 구멍이 숭숭 뚫리고 가느다란 섬유 조직으로 그 형상이 유지되고 있는 해면(海綿)과 같다. 따라서 개별적인 사항들에 대한 무지를 식견이 짧다, 혹은 무식(無識)하다고 표현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더 문제삼고 싶은 것은 3-4번이다. 왜 무지한 것이, 혹은 무식한 것이 비난받을 일이라는 것인가?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배우고, 배움을 통해 앎으로서 모르는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세상에서 살았던 이 아이들에게서 역사적 상식에 대해 모르는 것이 왜 비난의 소지가 되어야 하는가? 게다가 안중근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것이 아이돌 그룹 멤버에게 역사적 상식으로서 기대되어야 한다니 나는 그것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식이면 나는 질량 보존의 법칙과 구개음화(口開音化)는 모두가 알아야 할 과학적, 언어학적 경험이자 사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과연 당신은 그 수많은 '상식'이라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운가? 물론 이 사태를 보면서 '쯧쯧.. 애들이 저런 것도 모르는구나'라고 혀를 끌끌 차며 속으로 안타까워 할 수는 있을지언정 소위 '상식같지 않은 상식'에 대한 무지가 인신 공격으로 표출되어야 할 정당성이 무엇인가?
혹자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인이니까 한국 역사를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 분야에 대해서 무지 혹은 무식을 드러내는 것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에 심각한 훼손을 주기 때문에 비난받을 만한 일이라고. 말은 그럴 듯하지만 이는 실체는 없는 뜬구름과 같은 근거이다. 안중근의 얼굴을 모르는 것, 혹은 안중근의 행적을 모르는 일이 2016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과 자긍심에 무슨 영향을 준단 말인가?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과 자긍심이 어디 그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의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된 것인가? 역사란 시대를 산 모든 이들의 삶과 정신의 총체 아닌가? 도대체 무슨 연결 고리가 그렇게 거대하기에 안중근의 얼굴을 모르는 것이 이토록 한국인의 한국인다움을 모독한 심대한 죄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그저 지금까지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 하에서 학습 및 되물림되었던 한국,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이상적 존재에 대한 허상, 그리고 비이성적인 국가 및 역사관에서 비롯된 근거 없는 악성 여론이다.
물론 여기에는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로 비난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비난을 퍼붓기에 아주 만만한 아이돌 그룹 멤버, 그것도 '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안 그래도 승승장구하는 AOA에게 이번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들을 넘어뜨리게 만드는 호재와도 같았다. 대중들은 언제나 '까댈' 사람을 필요로 하니까. 그러니 역사 운운하는 것은 솔직히 표면적인 얘기고 AOA는 운 나쁘게도 발을 헛디뎌 비난의 수렁에 빠져든 것이다.
너무나도 웃긴 것은 공부와는 거리가 먼 아이돌 여성 멤버에게는 이토록 호되게 역사적 상식과 지식을 강요하면서 정작 이런 것들을 겸비하여 나라를 이끌어 가야할 상류층과 지도자들에게는 무척이나 관대하다는 것이다. 역사 인식도 희미한 그들이 상식 이하의 행동과 범죄를 서슴없이 저지르더라도 말이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것일까? 정말 부끄러운 모습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
읽으면서 왜 사학과에선 이런 글을 쓰지 못했나란 부끄러움이드는 글이네요.
무지에 대해 인신공격을 해온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여론을 형성한 원인인 국가가 가이드라인 내린 소설만을 역사의 전부로 알고있는 한국 국민의 전체주의적 사고 그리고 사실상 제대로된 역사교육의 부재의 문제를 개인에게 책임을 돌린 문제까지 다루고 여성혐오 문제까지 다룬 정말 샘나는 글입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글이 너무 좋아서 그런데 주변에 공유해도 될까요?
잡설 노트에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제 글들은 모두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정작 궁금했던 것은,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義士)의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를 역사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자 하는지였습니다. 우리는 수업 시간에 단순히 안중근이 조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라는 '나쁜 일본놈'을 하얼빈 역에서 총탄으로 처결한 사실,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당한 사실,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민족주의적 의분밖에는 배운 적이 없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누구인지, 도대체 그가 죽은 장소는 왜 하얼빈이라는 조선이 아닌 지역이었는지, 안중근의 의거가 현대 테러리즘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안중근의 어떤 사상이 그를 극단적인 폭력 행위(=사살)로서 자신의 뜻을 내보이게끔 하게 했는지는 모두 배제한 채 말이죠. 그러니 도대체 누가 역사를 잘 안다기에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비난하고 공격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유식을 자랑 삼아 상대방을 깎아내릴 처지가 못 되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 기저에 있는 여성혐오(misogyny)적 시선에 대해서는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이 사건의 핵심은 아니긴 하지만요.
왜 학교 수업에서 그러한 내용이 배제되었는지 이야기를 하자면
(전 역사교육과가 아니고 휴학전에 역사교과교육론이라는 수업 한번 들을거 뿐이어서 전문성이 있다고 할 순 없습니다;;)
첫째로 한국 교육에서 역사 교과는 국정, 검정체계의 교과서 한계상 국가의 입장에서 본 역사 서사와 그를 통해 나오는 역사관을 잘 외우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http://ncic.re.kr/mobile.kri.org4.inventoryList.do) 여길 보시면 검정교과서 체계일때도 내용체계, 영역 및 학습 내용 성취 기준으로 한국사를 어떻게 써야하고 학생은 거기서 무엇을 배워야하는지 국가가 지침을 내리고 이 지침대로 쓰지 않은 교과서는 심사에서 떨어져 교육현장에서 쓰이지 못합니다.
즉, 국가가 국정, 검정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의 다양한 역사인식을 막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역사 해석을 방해하기에 그렇습니다. 하얼빈 의거에서 '민족주의적 의분'을 느끼고 그렇게 해석하라는 것이 국가의 지침이니 나머지 내용은 배제한 것이지요
(한국에서의 역사교과는 '역사학'을 배워 역사적 사고력과 역사의식 함양이나 현재의 이해가 목적이 아니라 '국가가 쓴 소설'을 배워 외우는 것이 목적인 교과인게 슬픈 현실입니다.)
둘째, 수능이라는 제도로 인한 것입니다.
시험이 교육(내용)을 지배한다는 이론이 있는데요(이름은 까먹었습니다;;)
5가지 선택지중에 하나를 택해야하는 수능이라는 획일화 시험에서 묻는 것은 학생들의 역사적 사고력이나 시비가 갈릴 만한 것을 물어봐서는 안 됨으로 단편적인 사실과 년도를 묻는 문제를 내게 됩니다.
(물론 수능을 출제하는 교수님과 선생님께선 어떻게든 역사적 사고력을 묻는 좋은 문제를 내고자 하시지만 어떻게 문제를 내던 결국 단편적 사실과 년도 문제로 귀결되고 만다고 수능출제위원이신 제 고등학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ㅠㅜ)
그리하여 사실상 대학입시교육의 장이 된 학교 현장에서(뱀발로 많은 분들이 착각하시는게 고등학교는 대학입시교육이 아니라 지덕체 전인교육이 목적입니다.)
역사선생님이 아무리 자료 수업과 토론 수업 등등을 활용하여 학생들에게 fluorF님과 같은 의문을 품고 해결하도록 하고 싶어도 수능에 나오지 않으니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교과서 속 서사와 수능의 키워드, 년도 중심의 수업을 하게됩니다.
이러한 수능 역사시험이기에 연극영화과 출신인 사교육 한국사 강사가 학생들이 외우기 쉽게 CG와 줄임말로 수업을 꾸며도 큰 인기를 얻고 수능시험에서 큰 효과를 보게 되는 겁니다.
쓰다보니 울적하고 마음이 아프네요.....
많은 선진국에서 역사 교과서는 자유발행제거나 교과서가 없습니다. 과거 나치와 같은 자국민의 긍지를 고양시키고 애국심과 도덕심을 불어넣는 전체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역사교육이 어떤 결과를 부르는 가에 대한 교훈 때문이죠.
그리하여 자국사 중심 역사를 버리고 광역적 현대사 중심을 원칙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능력 함양을 목적으로 하였죠.
독일 같은 경우 그래서 비중의 85%를 근현대사로 다룹니다. 고대사는 자칫하면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또한 1차 사료를 학생들이 직접 다루며 본인의 역사의식을 세우고 역사적 사고력을 키우는 훈련을 합니다. 대입 시험또한 논술로 그러한 것을 묻고요
언젠간 역사교육과 시험 뿐만 아니라 한국의 교육이 교육다워지기를 희망하게 되네요. 저절로 바뀌는건 없으니 현장에 있는 사람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싸워야겠지만.....ㅋ
긴 똥글을 써놨네. 배설하느라 수고했다.